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8화 (18/175)

#18화

대한민국 무림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무공이란 기술이 사회 전반에 기여할 수 있게 선도하는 걸 목적으로 삼은 독립기관, 국가무공원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본청은 도봉구로 잡았다. 외부에 알려져 투기꾼들이 붙을 틈도 없이 재빠르게, 구매한 토지 위 건물들을 모조리 밀고 땅을 다졌다.

구성 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직은.

운하신권의 현천문과 칠익회 일부, 거기에 더해 국정원 블랙 요원 대다수가 주축이 되었으니, 대부분 연화존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전부라는 건 아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연화존자는 물론 무림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도 더러 이 신생 조직의 초창기에 합류하기도 했다.

가령 젊은 여검사, 윤아영의 합류가 그렇다. 그녀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고, 배경 또한 크게 도드라지는 점이 없다.

하지만 반발은 없다. 적어도 조직 내부에선 그렇다. 연화존자를 거슬려 하는 외부인들을 제외하면 검찰에 비딱선을 탄, 그러나 유명하지 않은 평검사 영입에 토를 다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말이 아예 안 나왔다면 그건 또 아니어서, 대략 이런 평가를 내린 게 전부.

‘연화존자께서 알아서 하셨겠지. 듣자 하니 보통은 아닌 사람이기도 하고.’

연화존자의 사람 보는 눈을 믿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것이 연화존자, 개인의 호감뿐 아니라 일종의 메시지라는 걸 예민하게 알아챘지만.

그리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검증하고 의사를 타진하게 되는 것이었는데, 이때 윤아영과 비슷하게 영입 제안을 받게 된 사람들의 조건이란 다음과 같다.

‘유능하지만 신념과 고집을 숙일 줄 몰라 조직과 집단에서 불화하는 사람. 출세와 권력이 좋은 줄 잘 알고 있음에도 태생적으로 야합이란 걸 해내지 못해 언뜻 보기에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 이익을 위해 눈을 감기보다는 주먹을 질끈 쥐고 못 하겠다고 드러누워 남들은 이해할 길 없는 자기만의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

공익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한 내부 고발자, 조직과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 잘못을 외면하지 못해 참지 못한 사람들 등등.

국가무공원 내부의 위와 같은 평가는 윤아영을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내가 저 정도였던가? 가만히 듣고 있자니 묘하게 불만스러운데.

‘저렇게까지… 흠.’

과거를 반추하자 반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하나 따져 보니 틀린 말이 하나 없더라, 과연 무림인의 매서운 눈이란.

할 말은 없고 할 일은 많으니, 일이나 할 수밖에.

바쁠 거라던 연화존자의 말은 옳았다. 일이, 숨도 못 쉬게 많은 일거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생 조직이니만큼 관련 법령을 살피고, 규정을 신설하는 등의 일거리는 한가득 했는데, 어디 그뿐인가?

서울상공인연합회의 유산은 악을 미워하는 정의로운 검사를 유혹 중이기까지 했다. 수사하여 기소할 범죄자들에 대한 자료가 한 무더기여서 대체 어디부터 자근자근 박살 낼지 고민이 될 정도.

나쁜 놈들은 서로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서울상공인연합회의 불법적인 사업에 한발 걸쳤던, 소위 사회 지도층이 연화존자의 손길로 말미암아 하루 두 번씩 혈관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시달리게 된 재벌 자제만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하여 검사 윤아영은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싫지만은 않다는 게 그녀의 본심이다.

국가무공원에서 일함에 있어 적어도 방해자는 없었다.

죄가 아닌 여론을 따지는 상사도, 쪽팔리게 스폰이나 받은 주제에 직업을 이용해 기소를 피하는 검사도, 온갖 인맥을 동원해 수사를 틀어막으려는 권력자도, 돈과 언론으로 회유하려 압박하는 기업가도 아직까진 없다.

그러니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바라 마지않던 직장 환경이 아니던가? 쌓인 피로야 최근에 얻은 방법이 하나 있지.

그녀는 연화존자 김철민에게 앞으로의 포부와 계획을 들은 참이었고, 그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상이 마음에 들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했나?’

낯선 포부였다. 그렇지 않나? 요즘 세상에 누가 저런 꿈을 꾸나? 어린애들도 더는 과학자가 아니라 의사를 꿈꾸는 나라에서.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에 든다. 이것이 비단 새로움에 대한 호의는 아닐 터.

이런 일이라면 해야 하지 않겠냐고, 모두가 문제라고 여기지만 손댈 엄두를 못 내거나 내지 않는 일을 하겠다는데 한손 보태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마저 그녀는 한다.

어쩌면 이런 일을 하게 되길 바라 왔던 건 아닌지.

연화존자는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바꿀 것이라 선언했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기초이자 시작.

꼼꼼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으로 조직과 불화하던 법조계 선후배들을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아무리 썩었다, 썩었다 해도 대한민국에 인물이 없진 않다.

‘국가무공원에서 일하다 나오면 앞으로도 좋기야 하겠지. 무림인 관련 사건을 수임하기에 좋은 경력이 될 것 같은데? 사실 그것보다도 검찰에서 그 고생을 하던 아영이, 네가 마음 편히 일하는 거 보니 뭔가 끌리긴 하다.’

‘그래요? 그렇게 돈 좋아하던 것치고는 의외네요, 선배.’

‘좀 재밌어 보이거든, 국가무공원. 거기다 연화존자인지, 뭔지 하는 그 사람. 하는 걸 가만 보니, 대한민국 높으신 범죄자들 싸그리 때려잡을 기세잖아? 돈이든, 이름값이든, 개인 만족이든 법률가가 되어서 거기에 관심 없다면 거짓말이지.’

윤아영이 만족하며 다니는 모습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업계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고 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작은 정의감에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국가무공원에서 일함으로써 갖추게 될 구색 좋은 경력과 그로 인해 얻을 수 있을 기대 수익일 테지만, 아무튼.

막 나가던 검사 시절엔 전혀 없던 이런저런 연락들이 연수원 동기라는 알량한 인연을 통해 전해지는 걸 보면, 확실히 서울상공인모임회를 으깬 것이 좋은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여 윤아영은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라도 밥 먹을 시간, 화장실 갈 시간마저 아껴 가며 일하고 있다.

기틀이 잡히면 바로 시작할 거라던 군 개혁을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할 일이 많지 않나?

국가무공원의 최우선 개혁 대상이자 연화존자가 가장 최우선으로 바꿀 거라 선언한 대한민국 군대에 윤아영 또한 유감이 여럿 있다.

군대, 문제 많지. 대한민국에 거기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산적한 과제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어쨌든 가야 할 지점은 명확하다.

이것이 기존 조직과 불화하던 젊은 여검사가 신생 국가무공원으로 파견되자마자 열의를 갖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이유였다.

그녀가 의욕을 불태우는 사이.

부산으로 내려간 연화존자는 생각과 다른 격렬한 저항에 어찌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도대체 본방을 어찌 보고 이딴 막무가내를 부리는 겁니까?”

바로 오늘 아침, 김철민은 명실상부한 부산 최고의 방파인 증산방(甑山幫)을 찾았다.

서면 한복판에 있는 증산방 소유의 빌딩을 찾아간 것인데,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잠깐의 소동과 대화가 이어졌고 이후 상황은 보는 바와 같이 적의, 그 자체.

칩거 중인 증산방주 대신 자리한 증산방의 후계자, 송철우가 참을 수 없는 노기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사실 그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본방의 고수들을 국가무공원으로 채용하고 싶으니, 방주님을 뵙게 해 달라니요? 아무리 본방이 무림방파라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국가무공원이 출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무림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는 것입니까?”

“…소방주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도와 결과를 위해 제안하는 게 아니야. 나에 대해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방주를… 아니, 방의 원로 중에 누구 없나?”

“현 방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제가 있는데 방의 원로들과 이야기 나눌 것이 있습니까? 혹 따로 약점이라도 잡은 것인지요? 제안이 말도 안 되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약속도 없이 찾아와 다짜고짜 요구할 수 있는 겁니까? 서울에서 가장 큰 조직폭력배를 소탕하고 보니, 본방이 그리 우습게 보이시나 봅니다.”

천하의 연화존자도 이 활화산 같은 분노에 다음과 같은 말을 꺼내기엔 왠지 꺼림직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다.

참고로 증산방의 소방주는 내년이면 서른이다.

“딱히 우스워서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말에 당연히 소방주의 분노가 불을 뿜고, 주먹은 벌써부터 내기를 뽑을 지경.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게 아니냐는 곤란한 생각마저 연화존자는 해 본다.

“사사로이는 제 부모님이지만, 공적인 자리입니다. 오랜 기간 폐관 수련 중이셔서 외부인을 거의 만나지 않는 분을 약속도 없이 찾아온 것도 모자라 그런 말을……. 아무리 요즘 김철민 씨의 명성이 자자하다 해도 좀 무례합니다.”

별호를 부르는 걸 남사스러워하는 젊은 세대답게 증산방의 소방주는 이름으로 연화존자를 부른다. 김철민은 거기서 조금 낯섦을 느낀다.

이것이 구태의연한 세대 차이만은 아니리라.

‘증산방에서 나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안 해 줬나 보군. 이렇게 나올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말이야.’

지각 있는 문명인답게 김철민이 최근의 명성만 믿고 부산으로 내려온 건 아니었다.

과거 그는 이 유서 깊은 문파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만약 그가 왔음을 알았다면 방의 장로니, 호법이니 하는 자들이 버선발로 뛰쳐나올 만큼. 사실 김철민이 올 거라는 걸 자기들끼리 미리 예상조차 했을 만큼 그는 증산방과는 사연이 깊은 사이다.

문제는 김철민과 증산방 그리고 칩거 중인 증산방주의 관계에 대해 아는 건 나이 든 원로들뿐이라는 사실.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엔 다소 민감한 이야기들이 더러 존재하며, 그사이에 놓인 세월은 세대라 칭해야 할 정도로 멀었다.

그리하여 연화존자를 모르는 증산방의 젊은 세대가 국가무공원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은 미심쩍음과 의심과 같은 것이 거의 전부.

비단 부산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국가무공원의 출범은 대한민국 무림계에 악몽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예전, 그러니까 독재자의 죽음 이후 일어났던 무림에 대한 탄압을 떠올리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

천명한 목표 자체가 무림계의 힘을 모아 국가 경쟁력을 재고한다는 게 아닌가? 누군가는 거기에서 기회를 엿볼 수도 있을 테지만, 순진하게 부푼 꿈을 꾸기엔 임진왜란 시절의 활약이 실록에 기록될 만큼 오랜 전통의 증산방은 가진 것이 많고, 아픈 역사 또한 존재한다.

당장 연화존자가 내려와서 하는 말에 기함을 토하는 걸 보라.

그럴 만도 하지. 세상에, 무림 문파에 고수를 요구하다니.

“방의 고수들을 데려간다는 게 본방을 해체시키겠다는 말과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증산방의 소방주는 연화존자가 여기에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칩거 중인 현 방주와 어떤 관계인지 모른다. 알았다면 그에게 그럴 의도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애석한 일이지만,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을 김철민은 하나밖에 알지 못한다.

“내가 증산방에 갖고 있는 마음을 표현하자면 이 두 단어로 수렴될 거다. 하나는 존중, 하나는 미안함.”

씨근덕대던 송철우가 잠시 말을 멈출 만큼, 연화존자의 낯빛은 진지하다.

“난 증산방의 실력과 의기를 존중한다. 어떻게 안 그러겠나?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바다를 통해 침략해 온 외적과 싸워 온 증산방이 아닌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그리고 찬란한 무지개가 연화존자의 주변을 감싼다. 그것은 살짝 거리를 두고 주변을 감싼 증산방의 젊은 방도들을 움찔하게 할 만큼 강렬한 기세.

“미안함은 다른 게 아니다. 내가 한국을 떠나며 너무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러니 이 소란이 있는 게 아니겠어?”

연화존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림인을 말로 설득할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기도 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무림인답게 해결하지. 와라.”

송철우와 주위 방도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납득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