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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9화 (19/175)

#19화

송철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 한들 육신은 피륙으로 되어 있음이라. 블랙아웃으로 인한 단기 기억 상실증을 대한민국의 전도유망한 후기 지수인 그조차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망각의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정신을 잃기 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패배의 순간을 금새 떠오르게 해 주었기에.

깨어난 그를 걱정스레 맞이한 건 마침 송철우도 잘 아는 사람.

뜻밖이긴 했다.

“철우야! 괜찮나?”

“도석 아저씨……?”

멍하니 그 이름을 부르는데 익숙한 내음이 콧등으로 몰려왔고, 마찬가지로 친숙한 소리가 여럿 들려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차고 짠 물방울이 얼굴에 와 닿는다. 증산방도인 그에겐 마음으로나 육신으로나 고향처럼 가까울 수밖에 없는 그곳, 바다.

물론 그걸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다급했던 건 아니다.

“아저씨! 방금 국가무공원에서, 연화존자 그 사람이!”

“젊어서 그런지 튼튼하네, 마지막엔 조금 세게 쳤는데.”

“…당신!”

하나 야속한 배 위의 달은 무심하게도 배 위에 함께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 준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목소리, 증산방의 소방주로서 자부심 가득하던 그에게 전례 없는 패배를 안겨 준 연화존자가 뱃전에 걸터앉아 손을 흔들고 있다.

김철민은 부서지는 포말 속 무지개처럼 웃고 있었다. 왜인지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정신을 찾은 증산방의 소방주는 그렇게 느낀다.

환한 달빛조차 수줍을 만큼 은은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헛헛한 웃음이었고, 기절하기 전에는 미처 몰라 봤던 강렬한 존재감은 파도와 함께 넘실댄다.

그는 진정 고수였다. 비단 아무것도 못하고 쓰러졌기 때문만에 하는 감상은 아니다. 싸울 땐 왜 몰랐는지 모르게 강력한, 기절하기 전과는 달리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 연화존자의 존재감은 달빛 아래 밤바다보다 크고 막강하여 송철우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준에 이른 무인이라면 몰라볼 수 없는, 그런 힘이 여유롭던 두 어깨엔 걸려 있더라.

온몸의 솜털이 일어선다.

하여 송철우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으며 무기를 찾는 것이지만, 그의 칼은 저기 갑판 한구석 도갑에 꽂힌 채 고이 놓여 있었고, 애타게 기어가려던 그를 말리는 건, 어딘지 모르게 다급하고 아련하기까지 한 표정의 중년인.

손수 배를 몰아가던 증산방의 실권자다.

“철우야! 철우야! 그만해라!”

“장로님, 아니. 아저씨? 왜……?”

“…이분이 누군지는 형님을 뵈면 곧 알끼다. 그때까진 니도 암말 마라.”

말리는 이의 이름은 김도석, 증산방의 장로다.

방이 소유한 어업과 무역 관련 사업을 맡은 자로 수더분한 외모와 달리 방에서의 서열은 확고한 이인자.

송철우에게는 친삼촌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긴 세월 증산방주인 송철우의 아버지와 함께해 온 남자이며 증산방이 누리고 있는 작금의 명성엔 분명 강호동도들에게 동래철권이라 불리는 그의 지분이 존재한다.

더불어 오랫동안 배를 탄 뱃사람답게 거칠기 짝이 없는 성격이기도 했다. 저 멀리 소말리아 인근에서 덮쳐 온 해적들이 쏜 알라의 요술봉을 주먹으로 후려쳐 그대로 돌려줬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 돌만치, 호방하고 담대한 바다 사나이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람.

문파의 소문주이자, 목숨도 바칠 수 있는 형님의 아들이 맞고 들어온 걸 그냥 두고 볼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소리다.

한데 뜻밖의 만류라니? 이해하기 어렵다.

“한잔 마실 텐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한 그를 보던 김철민이 실소를 머금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넘겨준다. 멍한 정신으로 복잡하던 송철우는 여지없이 받아들였고, 흘러나오는 강렬한 주향은 이 순간 말도 못 하게 유혹적이다.

맑지만 독한 술을 들이켜고 나서야 조금은 진정된 기분이 든다. 맑아진 게 단 하나도 없음에도 기분만은 그렇다.

하나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말씀 좀 해 주십시오, 두 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원래 아시던 사이입니까? 왜 그동안 말씀이… 아니, 잠깐? 여기는?”

그래서 송철우는 추궁한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연화존자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고, 국가무공원의 설립이 추진되어 이루어지던 얼마 전까지도 그는 방의 장로들을 비롯한 어른들 누구에게도 일절 들은 바가 없다.

그러니 고요한 밤바다와 어울리지 않는 의심과 의혹이 그의 가슴에서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는 일일 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국가무공원과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논의에서 자신이 배제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를 대신해 증산방의 전반을 맡은 지도 벌써 오륙 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방의 중진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한 건가?

설마 배신?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데.

생각이 많아진다. 하지만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없는 더 깊은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다. 돌아가는 분위기상 내가 알지 못하는 인연과 사연이란 것이 여기엔 얽혀 있는 것 같다.

하나 답을 해 줘야 할 김도석은 묵묵할 따름이었고, 그제야 송철우는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거의 다 도착했는지 알게 되었다.

모를 수 없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지 오래인 작은 섬,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오고 갔던 익숙한 장소.

“삼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그제야 김도석은 송철우를 바라본다, 친조카보다 더 아끼는, 어느새 커 버렸는지 모를 청년을.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긴 건 바다보다 깊은 회한이요, 파도보다 출렁이는 격정이었던 바.

평생을 싸워 온 노회한 무림인은 치밀어 오르는 시간과 감정 속에 입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차마 제 입으로 과거의 비사를 밝힐 수 없어, 이 한마디를 겨우 내뱉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

“…돌아오신 게다.

“돌아오다니요?”

“대협께서… 드디어 돌아오신 게야.”

이해할 수 없다. 김도석의 말은 불충분하다. 전후 사정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아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리하여 송철우는 연화존자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대답은 저 유유자적한 낯선 이에게 얻어야 할 듯싶다.

“김철민 씨, 대체… 대체 뭡니까, 이게 전부 다?”

그리고 이 더없이 정중한 물음이 연화존자를 기어코 서글프게 만든다. 주먹과 칼, 총알과 미사일이 날아와도 허허 웃던 그에게 이보다 더 큰 서러움은 없을 듯하다.

김철민이 생각하기에 송철우와 그의 관계가 이토록 딱딱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들이 더 가깝고 정감 있는 사이여야 마땅함을, 돌아온 연화존자는 알고 있다.

이것이 저 아이의 잘못이 아님 역시도.

“본래대로라면 너와 내가 이렇게 서먹한 사이가 아니었을 거다.”

그것은 오래된 기억, 김철민이 아직은 연화존자라 불리지 않고 지금보다 생생히 살아 있던 어느 젊은 시절의 인연.

그 맺어짐과 끊어짐 그리고 회복에 대한 이야기.

“나는 오늘 너의 아버지를 보러 왔다. 한때 서로의 등을 맡기던 형제 같은 이를 삼십 여년 만에 찾아온 셈이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네 아버지와 나는 형제 사이다. 비록 같은 배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옳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겠다는 의기가 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싸웠고, 함께 걸었으며, 함께 나아갔다.”

뒷짐을 지고 선 연화존자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크지만, 느낄 수 있다.

“그랬었다.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지. 그렇지만 오늘 밤, 널 보니 확실히 느끼는구나, 내가 너무 늦되게 돌아왔다는 걸.”

어두운 밤, 유독 커 보이는 등 뒤에 얹어진 고독의 긴 시간을.

“비록 엇갈림 속에 서로를 서로의 길에서 밀어냈지만. 철우야, 만나야 될 사람은 언제고 만나는 법이어서 이곳에 다시 함께 있구나.”

자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연화존자의 말에 송철우는 순간 몸이 굳었다.

목소리 안의 애달픔이 가슴 어딘가를 건드리지만 더는 묻지 못한다.

이제 질문은 그의 몫이 아니다. 물음은 긴 세월, 만나지 못했던 다른 누군가의 것.

-휘이이이이이.

아직 닿지 않은 배 위로 바닷바람을 탄 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송철우는 저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알았고, 김도석 역시 마찬가지.

섬의 주인이 그들이 왔음을 알았다.

그러니 연화존자 김철민이라고 모를 것인가? 인생엔 긴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도 길고 긴 휘파람이 마주 흘러나온다.

섬에서 들려오는 휘파람은 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 부서지는 거품처럼 들끓으며 듣는 이의 가슴을 진탕시키며 오르고 내린다.

먼 곳에서 들려왔음에도 바로 귓전에서 속삭이듯 가까이 들렸고, 이 하나만 보더라도 휘파람 소리의 주인이 얼마나 웅혼한 내공과 수준 높은 무공 공부를 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

그러나 사실 거기엔 그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눌러 온 가슴속의 울분이었다. 명확히 느낄 수 있다. 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의 마음에도 멈추지 않고 끝없이 부딫쳐 오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보며 우짖는 황조에도 마음이 실리는 법인데, 하물며 온 바다를 떨쳐 울리는 고수의 내공 기예임에야.

호응하는 김철민 또한 그랬다. 긴 세월, 억눌렀던 억울함이 연화존자에게도 있어 저 멀리 하늘 높이 질주한다.

그렇지만 섬 주인의 휘파람 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섬 주인의 소리가 울부짖는 바다의 호소라면 연화존자의 입에서 길고 높게 뻗어 나온 휘파람 소리는 거대한 산맥을 내달리며 포효하는 광풍에 비유해야 할 터.

높은 산을 질주하는 바람이 아래를 굽어다 보는 것만 같다. 저 높은 곳에서 지상의 것들을 내려다보는 위대한 존재의 눈길처럼, 연화존자의 휘파람은 천지 사방을 짓누르며 감싸고 두드린다.

세상 만물 모두를 무릎 꿇리는 것만 같다. 해수면조차 고요하여 그 안에 움직이는 거라고는 격렬히 맞서는 섬 주인의 휘파람, 하나.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던 송철우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건, 이건 내가 감히, 감히 닿을 수도 없는…….’

증산방의 소방주로 부산 지역의 분쟁을 조절하곤 하던 송철우조차 듣도 보도 못한 대결이었다. 지금이 21세기가 맞긴 한 것인가? 작은 배 하나만 떠 있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휘파람 소리로 싸우는 무림의 기사(奇事)라니.

멀고 먼 옛 사람들의 비무가 이랬을까 상상해 본다.

이런 것에 비하면 주먹과 칼을 들고 싸우는 건 무공도 아니다…….

“정신 차리라!”

그런 그를 깨우는 건 동래철권 김도석의 작지만 짧고 굵은 일갈.

“정신을 집중해! 잡아먹히지 말고, 내공을 운용해!”

김도석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송철우의 등에 장심을 얹고 아낌없이 내공을 쏟아부으며 최선을 다한다.

그는 진실로 송철우를 아꼈던 것이다. 본인 또한 섬의 주인과 연화존자의 대결로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음에도 조카 같은 아이를 위해, 아울러 방의 미래를 위해 고통을 감내한다.

오직 소방주에게 집중한다.

‘다시없는 기연이다. 하지만…….”

드높은 수준의 무공 공부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 이를 체득한다면 송철우는 더 고강한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으리라.

버틸 수만 있다면.

하여 김도석은 인내한다. 맞서 싸우는 두 사람을 잘 아는 그는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내공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마음의 문제.

과연 그랬다.

두 휘파람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밀어내고 물러서기를 반복했지만 우열은 머지않아 갈린다.

휘몰아치던 파도는 내리찍는 폭풍을 이겨 내지 못했다. 섬 주인의 휘파람 소리가 연화존자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뚝뚝 끊기며 소리가 작아진다.

끝내 멈추어 더는 들리지 않지만 동시에 솟구치는 그림자가 하나 있으니.

저 멀리 바다를 밟고 뛰어오는 한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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