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청해마도는 그의 애도이자 증산방주의 신물인 청랑도(靑浪刀)를 갖고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화존자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지난 삼십 년 간의 앙금은 지난밤, 작은 배 위에서의 한 합으로 떨쳐 냈다. 두 절대고수가 보낸 침잠의 시간은 분명 길고도 무거웠지만, 새 아침이 밝아 옴에 흘려보내야 할 것은 보내야 하는 법이었다.
시대에 실망해 떠나갔던 연화존자가 돌아왔다. 혼탁한 세상을 외면하며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췄던 해가 다시 떠오르는데, 어찌 침묵에 다시 몸을 맡길 소냐?
그럴 수 있을 리 없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란 옛 사람의 지혜는 옳았다. 속내를 털어놓는 달빛 아래, 지난 세월의 멀어졌음은 색을 잃는다.
남은 술은 잠시 떨어짐을 기념하는 이별주로 마시고 헤어진다. 이번엔 이별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
이혼한 부인이 위자료 대신 가져간 칼을 찾아 가리라.
세상을 원망하며 술독에 빠진 당신을 보는 게 괴로워 울던 부인이 돈이니 재산이니 그딴 건 다 필요 없다고, 칼 한 자루에 몸을 맡긴 채 사해가 좁다며 달리던 위풍당당한 추억만 가져가겠다고 위자료라며 집어 갔던 그 칼.
무림인이라면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칼을 청해마도는 이제야 찾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아무 준비 없이 갈 수야 없는 노릇.
섬에 있던 짐들을 정리한 청해마도는 배를 타고 나와 아들의 집으로 먼저 갔다. 그곳에서 수염을 밀고 머리를 정돈하며 깨끗이 몸을 씻었고, 그 사이 증산방의 소방주는 아버지가 대충이나마 입을 옷을 밖에 나가 사 왔다.
그러곤 함께 나가 옷을 맞췄다. 정장이었다. 어울리는 신발과 시계 역시 같이 골랐다.
묵묵히 자신을 따라다니는 아들이 청해마도는 새삼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아직 가르쳐 줄 것이 많다. 혼자서도 잘 큰 속이 깊은 아이였지만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 노릇을 뒤늦게라도 해야 된다 자각한다.
아, 어찌나 어리석은 세월이었던가? 인력으론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붙잡고 쓰러져 있는 게 전부였던 지난날이란.
다짐한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리라, 소중한 시간을 그리 보내지 않으리라.
아내에게 가는 길에는 꽃을 사기도 했다. 이건 충동적이었다.
아들, 철우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아내의 빌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부산 최고의 기업이자 대한민국 내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재벌가 계열사 세 곳을 운영하는 그룹 창업주 막내딸을 자식과 함께 오지 않고서는 사전 약속도 없이 만날 수 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연락도 없이 찾아온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 아내는 청해마도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법적으론 오래전에 헤어졌던 두 사람이건만, 한시도 서로를 잊어 본 적 없다.
‘다시 시작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청랑도를 집어 바로 서울로 올라간다. 아들도 함께 데려간다. 김철민, 이제는 본명보다 연화존자라 더 자주 불리는 의형님이 아들에 대한 칭찬이 많았다.
꼭 함께 오라 했다, 큰 역할을 맡길 거라면서.
크게 키우려면 더 큰 곳으로 가는 것이 맞기도 할 테지.
비행기에서 내린 증산방의 방주와 소방주는 운하신권이 맞이한다.
“마도, 이 사람… 오랜만이군. 옛 모습 그대로인 것이 참으로 헌앙해. 잘 지냈나?”
“격조했습니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권 어르신.”
“소방주도 함께 왔군. 그래, 두 사람 다 결심이 선 게야?”
청해마도의 눈빛이 번뜩인다, 굳건한 바위같이.
“형님께서 다시 불러 주시고 신권께서 함께 하시는데, 이 못난 막내가 어찌 빠지겠습니까? 그간 허송세월한 나태함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 사람, 막내라니. 하하하.”
청해마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감싼 운하신권이 걷는다. 주변을 감싼 경호원들이 뒤따르고, 옆에 선 청해마도에게 운하신권이 속삭였다.
“막내 노릇은 미루세, 중심을 잡는 게 먼저일세.”
이 말을 하는 운하신권의 눈이 젊은이의 그것처럼 반짝여 청해마도는 궁금해진다.
형님께선 무슨 일을 준비하신 것인가?
많았던 이야기 속에 구체적인 그림은 없었다, 오직 대한민국을 바꿀 거라는 굳건한 다짐만 있었을 뿐.
운하신권이 이 정도로 격동하는 걸 독재의 그늘이 짙던 예전에도 청해마도는 미처 보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라 하심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자네 의형에게 직접 듣게.”
운하신권은 미소와 수수께끼만을 남긴 채 함께 차에 탔다.
그런 그들을 연화존자는 광화문의 정부 청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봤을 때처럼, 환한 웃음과 함께였다.
“어서 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청해마도를 반갑게 맞이한 뒤, 자리를 안내해 준다. 바로 옆자리다. 떨어져 있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국가무림원 본청이 지어질 때까지 임시로 쓰는 공간이었지만, 회의실은 크고 넓다.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어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고 청해마도는 생각한다.
소수의 칠익회 일원들이 자리했고, 대다수는 현천문의 인원들이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하나같이 조직과 문파 내에서 미래가 창창하다는 평가를 받는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
그 외의 인원이 있다면, 윤아영 검사 정도?
‘형님께 계획이 있겠지.’
모두 필요에 의해 모인 사람들이란 그의 짐작은 정확하다.
“올 사람은 다 왔으니, 시작하겠습니다.”
“이 늙은이야 다 아는 이야기니 옆에서 듣고 있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다들 들었지? 본론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자리를 주도하는 건 연화존자 김철민. 손수 기막을 펼쳐 바깥과 차단한다.
기계적 도청에 대한 대비는 청해마도가 도착하기도 전에 진작 해 놓았다. 아무리 정부 청사라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보안에 대한 철저함은 권장된다.
신생 국가무공원은 정부 조직을 믿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국가의 기밀이 정부 관계자들에 의해 유출되곤 하던가?
칠익회 산하 건설사들이 하루라도 빨리 국가무공원 건물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짓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나름 고르고 골랐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막중한 임무가 주어질 예정이고, 감당할 만할 거라는 판단하에 배석시켰어. 결정은 너희의 몫이지만, 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보도록 하지. 윤환아.”
자리한 사람 중 연화존자가 무슨 말을 할 건지 미리 들은 사람은 미약한 피곤의 기색이 보이는 흑응 지윤환과 수염을 쓰다듬는 운하신권뿐.
나머지는 뭔가 엄청난 일을 할 것이며, 자신들이 거기에 선택받았다는 사실만 알고 여기에 있다.
물론 그 기대는 보상 받을 것이었다. 곧 목격한 광경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연화존자의 턱짓에, 흑응이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 내용물을 펼친다.
잘 정리되어 들어 있던 건 정성스레 보존 처리된 여러 권의 고서와 뻣뻣한 새 책의 뒤섞임. 그건 아마도 비급일 것이다.
얘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비급부터 보여 주는 상황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며 눈치를 보던 중 누군가 겉에 쓰인 제목을 알아보고 크게 소리친다.
경악과 놀라움은 거기 담겨 있다.
“송풍검법과 낙안검법? 저건 전부 지금은 멸문한 송안문과 낙안문의 검법 아닙니까?”
“누가 검법덕후 아니랄까 봐, 저런 걸 알아보고……. 근데 저 옆에 저거 설마 자하신공입니까? 망해 버린 화산파의 그?”
“소림의 역근세수경까지… 세상에, 제가 보고 있는 게 뭡니까, 이게 다.”
“저것들이 정말로 실존하는 거였다고? 위서 아닙니까?”
자리에 앉아 있던 자들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그럴 수밖에. 지금 보이는 비급들이란 하나같이 전설적이지 않은 것이 없지 않은가?
“다들 알겠지만, 난 한국을 떠난 후 전 세계를 떠돌았어.”
그렇기에 이어진 연화존자의 설명에 집중력을 발휘한다.
연화존자가 가짜 비급을 내놓을 리 없다는 생각과 함께, 믿기 힘든 무공의 실물이 어울리며 좌중은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라를 떠나 놀기도 많이 놀고 쉬기도 많이 쉬었지만, 돈도 많이 벌었어.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세계적인 부호, 거대 기업, 왕족과 귀족들을 만나 무공을 팔게 됐지.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반로환동한 걸 감안해도 나 혼자 써서는 다 쓰고 죽지도 못할 만큼 돈이 쌓였더라고. 그래서 생각했다. 이 돈을 다 어쩔까?”
턱을 괸 채 이야기하는 연화존자의 말에는 지난 세월의 고민이 담겨 있다.
“내 멋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인데, 그러려고 할 때마다 부모님의 말씀이 생각나더라.”
원래부터도 친가 쪽이 한반도의 무맥을 이은 조선 무림 최고의 명문가였고 외가는 일찍이 중국의 명문거파에 딸을 유학 보냈을 정도로, 부잣집 도련님인 그에게도 연화신공의 1단계를 진기도인하여 번 액수는 천문학적이었다.
아마 그가 돈 욕심을 냈다면 돈으로 못 할 것이 없었으리라. 중국의 ‘순천’이나 대만의 ‘정천’처럼 조직을 갖추고 팔아 젖히기 시작했다면, 정말 그러고도 남았을 테지.
다 버리고 떠나 왔음에도 자꾸 다른 생각이 나던 게 문제였을 뿐이다.
“현천공은 나 혼자 만든 게 아니야. 그건 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처음 시작하셨어. 여기 계신 운하신권 어르신께서 많이 도와주신 일이지.”
수염을 쓰다듬는 운하신권에게 연화존자가 돌아보며 감사를 표시한다. 선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진심 어린 도움과 조언엔 언제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네 아버지는… 진정 대협이었다.”
운하신권은 먼저 간 친우를 이렇게 평가했다.
아들인 김철민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현천공을 바닥부터 다진 건 내 부모님이셨다. 가문의 무공 중 일부를 보완, 발전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힘을 합치셨어. 난 거기에 마지막 마무리를 지은 정도인데… 부모님께선 우리 집안의 무공이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할 것이라고 하셨어.”
부모를 회상하는 두 눈에 무지개빛 정광이 어린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극심한 혼란을 지나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이 나라에 있는 건 사람뿐이라고. 자원도, 기술도 아무것도 없이 불안하기만 이 나라에는 사람을 지킬 무공이 필요하시다며, 돌아가시기 전 현천공을 완성할 것을 내게 부탁하셨어.”
잠시 말을 멈춘 연화존자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유언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떠났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거든. 한데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이제와 돌아보고, 들여다보며 내린 결론은 이래.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조차 다룰 능력도, 지킬 힘도, 의지도 없다.”
주변을 돌아본 그는 쇄신이 필요함을 선언한다.
“그간 나는 무림인은 무림에 머무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 땅에 내 자리가 더는 없을 거라 믿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의 비겁한 회피를 하지 않겠어. 직접 나설 거야. 조직을 새로 만들었으니 새로운 무공과 새로운 사람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겠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발휘한다.
“새 무공을 만들 거야. 아니,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 체계를 세울 거다. 여기 있는 무공 비급을 이용할 거고, 그것들을 대한민국 모두에게 나눠 준다.
“모두라 하심은……?”
“군대, 경찰, 소방. 우선은 이 세 곳이 먼저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기초적인 토납법을 익힐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목표야. 건강보험에 포함되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어.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솔직히 못할 것 같지는 않아.”
히죽 웃는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걸린다.
“최우선적인 목표는 당연히 군대지만. 옛날부터 한번은 뒤집어 엎어 버리고 싶었어.”
마지막 질문은 조심스레 나왔다.
“그렇다면 여기 모인 저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는 여기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질 무공을 가장 먼저 익혔으면 좋겠어. 음, 조직을 만들 생각이거든.”
“조직이라 하시면?”
“진기도인단. 무공 보급을 위한 최고수로 너희를 양성할 거야, 내 미래 계획에 핵심이 되는 조직의 구성원으로.”
준비했던 계획은 시원하게 흘러나온다.
“대한민국 무공 보급이 여기 모인 너희들의 손에서 시작될 예정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모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