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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22화 (22/175)

#22화

진기도인을 전문적으로 맡을 조직을 만들겠다던 연화존자의 선언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신생 국가무공원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흑응은 공항으로 나와 간만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중이다.

휴가를 낸 건 아니다. 이 또한 업무의 연장선인데, 그래도 곧 입국할 누군가들을 마중 나온 오늘이 지난 악전고투에 비하면 마음이 편한 것은 사실이다.

조직의 최고수라 불러야 할 이들이 한꺼번에 폐관에 들면서, 일이 많았다. 좋은 일보단 처리해야 할 일들이.

덕분에 국가무공원의 조직 정비는 요즘 지지부진하다. 최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오더라고.

하나 그럼에도 국가무공원에 귀속될 새로운 무공의 창안은 꼭 필요하다. 이것은 국가무공원의 근본적인 힘이자, 대한민국을 바꿀 기틀이 될 테니까.

연화존자, 운하신권, 청해마도는 칠익회가 그간 모은 무공서를 들고 현천문 소유 양평의 한 저택에 비밀리에 모여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할 세 고수가 힘을 모으는 일종의 합동 폐관.

같이 먹고 자며 새로운 무공‘들’의 창안과 완성에 들어갔다. 단순히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혹시 모를 문제점을 상호토의하고 확인하고 있으니, 단시간 내에 끝날 일은 아닐 터.

그래도 완전히 맨바닥에서부터 해야 할 작업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미 연화존자가 이십 여 년에 걸쳐 기틀을 마련해 놓았다. 본인도 언제 올지 몰랐던, 언젠가 조국에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겠냐는 희미한 예상이 있던 덕분이다.

긴 세월 이어진 무공의 수집, 파훼, 좀 더 나은 것으로의 보완.

그렇기에 국가무공원에서는 6개월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무공을 만드는 거라면 말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지난 세월 쌓여 있던 것이 있기에 가능한 예상치.

세 고수 모두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고수들이었고, 이때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말인즉슨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수준임을 뜻하는 바.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레 그들로 흘러가는 흑응이었다.

운하신권만 하더라도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덜하지, 젊은 시절엔 괄괄하다 못해 폭급한 성미와 그에 걸맞는 실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한국인들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범죄를 저지르던 주한 미군 여럿이 실종됐다가 정신이 나간 채 발견되는 바람에, 역대 주한 미군 사령관 여럿이 옷을 벗게 된 게 다 그의 솜씨라는 소문이 돌 정도.

대한민국 정부를 무시한 일본 외교관이 뜬금없이 현해탄 한복판에서 발견된 건 역사적 사실이나 다름없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증거는 없다지만, 그런 일을 벌였다는 의심을 받고도 무사한 것만 보아도 운하신권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으리라.

청해마도 같은 경우에는 몇 안 되는 비무에서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경우다.

칩거 중 증산방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고수들을 상대해 주었던 것인데, 중원 본토의 무공공부 대다수를 온존한 것으로 평가받는 대만인 고수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그들은 목젖 앞에서 멈춘 청해마도의 목도가 보이지도 않았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것은 마도(魔刀)였다는 감탄과 함께.

연화존자는, 감히 말할 것도 없지.

거기에 만드는 사람만 대단하던가? 밑바탕이 될 내공심법들 역시 보통을 넘는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대체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어려운 수준 높은 무공들.

칠익회는 그것들을 목숨 걸고 손에 넣었다. 이 수집의 선두에 서 있던 흑응은 그걸 잘 알고 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비급과 무공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단 말인가?

대저 연화존자의 칠익회(七翼會)라 함은 미국, 영국, 유럽, 남미, 일본, 중앙아시아 그리고 회주인 김철민을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일곱 개의 조직을 일컫는 바.

다들 불비불명(不飛不鳴) 하는 연화존자가 부동(不動)의 시절을 끝내고 날아오르기만을 기다리며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녔음이라.

잊힌 무공을 찾고, 범죄 조직이 보유한 무공을 빼앗고, 그 과정에서 무엄하게도 연화존자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들을 응징하는 등등.

그 결실을 이제야 보게 되어 흑응은 바쁘고 힘든 요즘이 기쁘기 그지없다.

“형님!”

그리고 이 기쁨이 흑응 혼자만 누리는 즐거움은 아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모델처럼 키가 크고 다부진 정장 차림의 사내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출국장에서 수행원들과 걸어 나온다.

잘생긴 사내였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금흘금 쳐다볼 만큼 매력 있는 사내는 온몸으로 성공의 기운을 흘리며 걷는다.

“잘 지냈나?”

“저야 뭐 늘 하던 데로죠. 형님이야말로 바쁘시다고요.”

“우리 일이 언제는 편했냐마는, 안 하던 일 하려니까 죽겠다, 아주. 그놈의 정치인들하고 공무원들 진짜.”

진절머리를 치는 흑응을 보며 사내는 씩 웃어 보인다. 칠익회의 일원으로 조직의 미국 방면을 맡은 사내 또한 저 짜증에 십분 공감하는 까닭이다.

로비가 합법인 나라에서조차 그 지경인데, 한국 같은 나라에서라면 얼마나 짜증이 날까? 가뜩이나 대한민국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양반인데.

“회주께서는 잘 계십니까?”

“물론이지. 너는 뵌 지 오래됐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내 한인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유명인, 다니엘 김이 미국 내 인맥을 쌓고 여러 사업을 하느라 연화존자를 직접 만난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었다.

그것이 존경과 애정의 마음이 옅어졌음을 말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내서 들어왔잖습니까? 뭐, 이번 입국에선 뵐 기회가 없을 것 같긴 해도, 오랜만에 한국을 들어와 일을 하려니 두근두근하기도 하네요.”

이에 흑응이 답하려던 그 순간,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으로 돌아간다.

기분 나쁠 정도로 날카롭고 뜨거운 존재감이 일순간 느껴졌던 것이니, 두 사람 다 이것이 누구의 기운인지 잘 알고 있다.

“…형님.”

“아이고, 형님들. 오랜만, 에 뵙습니다.”

다가온 두 명에게는 여러 종류의 대비가 존재한다.

우선 계절에 맞지 않는 차림새가 있다. 흑응과 다니엘의 곁에 다가선 두 남자는 옷차림부터 뒤죽박죽으로 키가 큰 한 명은 반바지에 솜털 패딩을 입은 채 두꺼운 양말을 무릎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려 부츠를 신었다.

작은 한 명은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점퍼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온몸을 꽁꽁 싸매 살이 드러난 부분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 다 굉장히 수상한 모양새.

키가 작은 쪽은 과묵하고, 큰 쪽은 가볍다.

“오랜만에 뵙게, 되니 이거 참,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유무선, 으로나마 자주 찾아뵙고, 인사도 올리고 해야 했는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있던 곳이 그런 호사를 누리를 처지가 영 되지 못했습니다요.”

주로 입을 여는 건 멀대처럼 말을 더듬는 키 큰 사내였다. 그는 두껍기 그지없는 패딩에 파묻히다시피 하였으며, 종알종알 말이 많고 경박한 말투여서 참 가벼워 보였다. 다리와 어깨를 간간이 움찔거리기도 하고, 눈을 깜빡거리고 한다. 말은 빠르지만 뚝뚝 끊기기 일쑤.

멀쩡한 인상은 결코 아니라 하겠다.

그렇다고 하여 키가 작은 쪽이 보기 좋은 인상이냐면, 그건 또 아니라 할 수 있다.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음침함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랫동안 고여 있어 검게 물든 웅덩이 같은 그림자가 사내에게선 느껴진다.

하지만 흑응과 다니엘은 개의치 않는다.

다가가 있는 힘껏 껴안는다, 진심을 가득 담아 하는 포옹.

“무소식이 희소식이랬다. 둘 다 무사하니 됐어. 괜찮아 보이는구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 했는데, 연락이 없어 차라리 안심이다.”

그들은 형제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 들로 형님들 번거롭게 해 드릴 수 없습죠. 네, 그러믄요.”

“…할 만했습니다.”

흑응도, 다니엘 김도, 키 큰 사내 준호와 키 작은 남자 진호까지.

이들은 모두 연화존자의 구원을 받은 사이다. 아이가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다면, 이들은 연화존자의 긍휼에서 비롯되었다 말할 수 있을 터.

이 또한 선대의 유산이리라.

“드디어 회주, 께서 뜻을 세우셨는데, 그 끝도, 보지 못하고 죽을 수야 없습죠.”

김철민의 아버지는 나라가 가난하고 무지하다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많은 대한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되는 현실에 자주 괴로워하곤 했다.

그 안에 얽힌 복잡한 사정이야 둘째치더라도, 어찌되었건 아이들을 책임지지 못하는 현실, 심지어 고아로 만들다시피 하여 외국으로 보내기까지 하는. 그리고 그렇게 받아 온 달러가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된다는 변명을 김철민의 아버지는 경멸했다.

당당한 사내였던 김철민의 아버지는 자식을 버린 아비는 가장도 아니라 여겼으니, 재단까지 세워 가며 아이를 수출하는 나라의 행태에 비분강개를 느꼈다.

이건 국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세상 어느 나라도 자국의 아이를 부유한 외국으로 수출하지 않는다며 여러 밤을 슬퍼했다.

김철민 역시 이 생각은 마찬가지였기에, 아버지가 세운 복지재단을 잊지 않고 지원했다.

더는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지 않을 수 있게 훌륭한 단체로 만들었다. 이에 시비를 거는 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연화존자의 힘과 영향력을 이길 자가 없었다.

비용은 김철민과 그의 지인들이 각출했는데, 앞서 도움을 얻은 바 있는 청해마도 처가댁의 도움이 가장 컸다.

그룹을 통째로 독재자에게 강탈당할 뻔했다가 김철민의 개입으로 살아남은 청해마도의 장인은 이 일에 팔을 걷어 붙였다. 구조 조정을 조건으로 기사회생한 재벌가 회장의 기부는 과연 통이 컸던 바.

해외에서는 이미 입양된 한국계 아이들을 추적하고 돌보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일은 앞의 것보다 힘들었다. 서류도 없이 무작정 내보낸 경우도 부지기수여서 찾는 것부터 난관이었고, 그 이후의 관심과 연결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으니, 여기 다니엘과 진호, 준호 형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다니엘 김은 한국인 친모와 미군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인 이유는 그의 입양을 주관한 복지 단체에서 제대로 된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친모와 친부에 대한 궁금증을 접은 지 오래.

다만 연화존자를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비슷한 처지의 칠익회, 다른 사람들처럼 회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속내가 그렇다.

만약 김철민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양부모의 학대로 12살이 되기 전에 죽어 버렸을 일 아닌가?

자신을 살린 것도 모자라 후원자가 되어 기회를 열어 준 연화존자를 진심으로 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룬 성공의 과실은 오롯이 칠익회와 연화존자를 위함이다.

준호, 진호 형제 역시 사정은 복잡하다. 이들은 선천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키가 큰 준호는 틱 장애와 과잉 행동 장애, 키가 작은 진호는 척추와 왼팔에 장애가 있고 사시가 있다.

어린 시절엔 드러나지 않던 질병이 성장하며 표출됨에, 양부모는 두 사람을 파양했다. 파양 후 일 년이 지나 연화존자가 그들을 만났을 때, 두 아이는 서로에게 꼭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니엘, 준호, 진호 순으로 나이가 많다.

세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연화존자에게서 무공을 배웠다.

이들은 각기 칠익회의 미국과 아프리카 방면을 맡을 만큼 유능하다. 칠익회의 이익을 침범하려던 무수한 개인과 단체가 그들의 손에 사라졌다.

“다른 형제들은 아직입니까?”

“남미 쪽은 거진 대부분 들어왔어. 나머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고, 벌려 놓은 사업이 많아서.”

이들의 맏형이나 다름없는 흑응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미소를 지은 건 그렇기에 우연이 아니며, 가식이 아니다.

“회주님의 곁은 저희가 가장 먼저군요.”

“그건 마음에 듭니다. 그러믄요.”

“…좋습니다.”

그러니 이 의욕 과다 분비 상태인 세 사람이 윤아영 검사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을 때, 그녀의 심정이 얼마나 황당했는지는 직접 목격하지 않고도 알 수 있으리라.

“…동방요선과 다도선객을 잡자고요?”

그들은 대한민국 최악의 무림인 범죄자를 잡고자 한국에 들어왔다.

오직 돌아온 연화존자의 앞길에 영광만을 깔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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