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28화 (28/175)

#28화

동방요선은 도주하는 자신을 막아선 이가 누구인지 잘 안다.

“운하신권……!”

알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여러 고수 중에서도 유독 성정이 괄괄하고 바른 말 잘하는 운하신권은 동방요선에게 있어 가장 큰 적수이자, 실존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한차례 충돌한 적이 있다. 동방요선의 뇌리에 남아 있는 강렬한 패배의 기억으로서.

수십 년 전에 한 번 부딪친 사이라 하겠다.

“쥐새끼처럼 도망가서 참 오래도 살았군. 오늘은 기를 쓰고 보호해 주던 정치인들께서 옆에 있지 않은가 보이.”

“네놈……!”

아마 그때가 IMF 때였던가? 전무후무한 사태로 나라가 혼란하여 어지럽던 그때, 양지로 나가 더 큰 사업을 하겠다는 욕심으로 불타던 새 세상의 야심찬 행보가 운하신권의 손에 저지된 적이 있다.

늘 자신감에 차 있던 이 전설적인 사이비 종교는 현천문과의 정면충돌 이후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

아마 돈을 아주 많이 먹은, 차기 선거에서 전폭적인 도움을 약속받은 정치권의 적극적인 비호가 아니었다면, 동방요선은 그때의 패배로 목숨마저 잃었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내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교훈을 잊은 겐가? 내 닥치고 살라 하지 않았나? 한 번만 더 보이면 그땐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겠다 했을 텐데.”

당시 그들은 무림인다운 방법을 택했다. 비무로 승자와 패자를 가려 승자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바로 그것.

당연히 동방요선의 입장에선 자신이 이길 줄 알고 받아들인 제안이었다. 일제 시대부터 살아와 대한민국 사이비 종교의 산증인이자 역사나 다름없게 오래 산 그가 아니었던가? 이미 그때 소요신공을 익힌 세월이 몇 년이었는지.

지금이야 작심하고 준비한 국가무공원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도망가는 처지라지만, 동방요선이 그렇게까지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기독교의 교리와 도가의 가르침을 교설로 엮어 키운 사이비 종교가 이토록 무사하게 크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가족이나 지인이 동방요선의 요설에 감화된 것에 분노한 여러 무림인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그를 죽이고자 했던 시도가 몇 번 있긴 했지만, 모조리 패퇴 당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참 교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수련에 매진하던 시절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무에 대한 사이비 교주의 자신감이 영 근거가 없던 것은 아니라 하겠다.

그러니까 상대가 명옥신공을 익힌 시대 최강의 권사 중 하나가 아니었다면.

“…흥, 찾아온 건 네놈이면서 감히 본 재림 예수에게… 큭.”

“이런, 미안하군. 잡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발이 나갔네.”

심지어 나이를 먹고 솜씨가 완숙해진 것도 모자라 능글맞아지기까지 한 고수가 운하신권이었으니, 지금도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발끝의 돌맹이를 매섭게 차올리는 것을 보라.

어깨의 부상이 아니더라도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나이가 들으니, 점점 개소리를 참기 힘들어지는군. 이해하게나, 본래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 하지 않나?”

이에 동방요선의 머리가 위기를 맞이하여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근 십여 년 넘게 위기가 없던 사이비 교주 무림인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여 잃어버린 줄 알았던 젊은 시절의 교활함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인정해야 한다. 온전한 상태였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자야. 하물며 뒤에 추격까지 달고서는…….’

동방요선은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파악한다.

죽일 듯이 달려들던 젊은 놈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일부러 이쪽으로 자신을 몬 것일 테지. 대체 어떻게 새 세상 본단 근방 지형을 손바닥 보듯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부의 간자가 있거나 다른 도움을 받았던 모양.

그리고 여기로 사냥감 몰 듯 몰아넣은 건 약간 높은 지대 위에 서서 잔잔한, 동방요선에게는 재수 없게 느껴지는 미소로 내려다보는 운하신권을 믿고 있기 때문일 터였고.

‘그렇다면 속전속결이다.’

이대로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다간 그 악귀 같은 놈들이 따라붙을 것이 뻔하고, 그리되면 일은 틀어진 거나 진배없으리라. 하니 지금 이 순간 운하신권을 패퇴시키거나, 하다 못해 최소한 쫓아올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어깨에 총탄이 박힌 현재의 몸 상태로 동방요선이 운하신권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하나뿐.

그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선천진기를 폭발시킨다. 급박한 와중에도 아주 조금은, 아까웠다.

‘내가 이걸 어떻게 모았는데!’

가뭄에 새벽이슬 모으듯 모은 선천진기였다. 배신한 연쇄 자수마들이 일괄적으로 증언했던 동방요선, 그가 보인 여성 편력의 이유.

근래 다른 무공 수련을 등한시하게 한 원인이었으니, 동방요선은 귀식대법 따위로 얻은 재림 예수의 명성이 아닌, 별호만 신선이 아닌 진짜 우화등선을 근래 바라고 있었다.

유서 깊은 음양 조화의 수법을 통해.

‘내 반드시… 반드시 이에 대해 복수하리라!’

운하신권을 향해 뛰어들며 동방요선은 다시금 이를 간다.

소요신공에 기록된 옥방방중술(玉房房中術)의 비방에 따라 산을 깎고, 호수를 파며, 차가운 곳의 흙과 뜨거운 곳의 나무를 심는 고생을 사전 준비로 해야 했다. 그걸 만들기 위해 교도들을 어찌나 쥐어짜야 했던지.

그것도 모자라 교 내에서 스무 살 초중반의 여자들을 모아 겨우겨우 모은, 그럼에도 고작 병아리 눈물만큼 늘어난 선천진기였는데……. 십 년이 넘게 모았음에도 삽시간에 태우는 게 전부이니, 아깝지 않기도 어렵다.

“죽어라!”

하니 동방요선의 분노는 대단했고, 선천진기를 격발시킨 위세 역시 대단했다.

저것이 정말로 선천진기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힘인지 모르지만 보이는 모습이 그랬다. 운하신권의 당당하기 그지없는 모습조차 순간 색이 바래도록, 하얀 아지랑이가 감싼 동방요선의 모습은 단어 그대로의 위풍당당.

날려 버린 십 년의 세월에 대한 아까움과 내력이 충만함에서 오는 자신감으로 동방요선은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모은다.

운하신권의 가슴팍을 찍기 위해.

“감히 본 재림 예수를… 크아아악!”

아마 어디선가 날아와 두 다리를 날려 버린 총알이 없었다면, 제법 볼 만한 싸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아악! 캬아아악!”

그러나 건곤일척의 승부수는 차마 닿지도 못해 동방요선은 터져 나간 두 다리를 붙잡고 비명과 뒹구는 게 전부.

불시의 기습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곤죽이 되어 버린 육신의 고통 때문인 걸까? 어느 쪽이든 재림 예수로 추앙받던, 일세를 풍미한 사이비 교주의 몰골치고는 제법 볼 만한 꼬락서니였다 하겠다.

미동도 없이 여전히 내려다보는 중이던 운하신권은 저 모습이야말로 거짓 예수, 동방요선에게 어울린다 생각한다.

사이비 종교쟁이 놈들이 교도들로부터 착취한 재산으로 비싼 변호사를 써서 말도 안 되는 형량을 받아 놓고 진심 하나 없는 사과를 하는 걸 분통이 터진 채로 보고 있느니, 차라리 대물 저격총에 다리 두 짝이 날아간 걸 보는 게 훨씬 기분 좋은 일이지. 암, 그렇고 말고.

이러한 감상은 곧 도착한 저격수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고생하셨습니다.”

운하신권은 육중한 크기의 대물 저격총을 등에 메고 산속을 뛰어온 흑응, 지윤호를 경탄을 담아 맞이한다.

“대단한 솜씨군. 왜 자네가 강호에서 검은 매라 불리는지 알게 하는 솜씨였네.”

“과찬이십니다, 어르신.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흑응이라는 별호는 그의 매서운 눈과 맵시 있는 솜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건 연화존자의 무공을 이어받아 이룬 개인적 성취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일품인 건 재능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초장거리 저격.

연화존자가 특별히 전수한 무공을 통해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은 흑응은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무수한 악인들을 사냥해 왔다.

바로 오늘과 같이.

“우선 응급처치를 하겠습니다.”

“거들도록 하지.”

동방요선의 날아간 두 무릎 아래는 흑응이, 한여름 얼음처럼 녹아내리는 선천진기의 후유증으로 폭주하려는 내력은 운하신권이 맡았다.

그들은 이자를 살려 가기로 계획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결판은 지금쯤 남은 교도 중 고수들을 사냥 중일 준호와 진호 형제에게서 났으리라.

사이비 종교인을 사냥하는 데 특화된 두 형제였다. 아프리카에서 두 사람의 손에 죽은 사람 잡아먹는 주술사만 몇이었던가? 본래대로라면 놓칠 일도 없었을 터.

제압보다 살해에 특화된 패월삼락공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꼬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운하신권이 하던 폐관마저 멈추고 나온 것은 동방요선의 목숨 줄을 붙여 놓기 위함이라 하겠다. 그건 국가무공원에 대한 공격을 좌시할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자에게서 얻어 낼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바.

소요신공이라는 쓸 만한 무공은 한낱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당장 흔들리는 진기를 다스리고 제압하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이처럼 정순한 무공이 세상에 얼마나 남았는지.

이깟 인물에겐 너무 아까운 무공이다, 그간 쌓은 업보도 많고.

동방요선은 남은 평생에 걸쳐 사회에 끼친 해악을 갚게 될 것이다.

‘다리를 부수겠다는 말을 본의 아니게 지키게 됐군.’

지혈을 끝낸 흑응이 동방요선의 몸을 짐짝처럼 들고 가는 걸 보며, 운하신권은 무림인 전용 교도소의 건립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국정원 소속 요원으로 활동하다 최근 국가무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정연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심호흡을 하며 내력을 운용했다.

그가 국정원에 입사한 뒤, 우수한 성적으로 선발되어 조금 특별한 내공심법에 입문한 지도 벌써 칠 년이 지났다.

그는 연화존자의 진기도인을 받은 엘리트 중 하나다.

이후 많은 임무를 수행하며 죽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 사실에 큰 불만은 없다. 국정원 내부에서도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 익힐 수 있는 연화존자의 연화신공, 그 처음을 익혔다는 건 애초에 그런 의미니까.

나의 월급이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것임을 변명 없이 받아들일 것.

그런 다짐으로 일해 온 지난 칠 년이고 마음가짐 측면에서 바뀐 건 하나 없지만,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렵다.

그건 그와 그의 전 국정원 동료들이 요즘 직장 생활에 있어 어떤 전기를 맞이한 측면이 크다.

국가무공원의 출범은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연화존자의 요구는 강압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지만, 도리 없이 인정한다.

저 위대하기까지 한 인물이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걸.

그들은 선택했다. 그리고 실행한다.

“준비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선배의 지시에 따라 준비해 온 것들을 소리 나지 않게 들어 올린다. 교육을 받긴 했지만 아직 어색하다.

국정원에서 내공심법을 익혔던 요원들이 전원 한자리에 모인 밤이다. 본래대로라면 이렇게까지 모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오늘의 목표가 국정원 시절, 치욕을 남긴 범죄자라 해도 이만한 인원을 모두 동원해서 잡는 것은 전 직장에서라면 분명 허락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이들은 이제 국정원 소속이 아니다.

확실히 무림인을 상대함에 있어 국가무공원이 한 수 위다. 애초에 예전에 처리하지 못한 이유가 그렇지 않나?

‘어설픈 힘으로 어설프게 건드렸다 놓친 거지, 마치 싸구려 낚시대가 부러져 대물을 놓친 낚시꾼처럼.’

오늘은 그렇지 않다. 국가무공원은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이는 이정연에게 묘한 감흥을 준다.

분명 연화존자는 약속을 지켜 전 국정원 직원들에게 새로운 무공을 알려 주었고, 다들 무위가 상승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게 이와 같은 작전을 수행할 거란 걸 미리 알았다는 소리는 아니거든.

‘뭐… 나쁘지 않지, 이런 것도.’

왠지 전과 같은 종류의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할 일이 적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대의 변화가 이런 건가?

어쩌면 21세기 강호의, 아니 군대의 트렌드를 좀 이르게 맛보는 걸지도.

“…쏴!”

구령과 함께 60mm 박격포가 전직 국정원 직원, 현직 국가무공원 요원들에 의해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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