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처음 연화존자가 국정원과 검찰에 발목 잡혔던 사건을 기억하는가?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국정원의 요청에 나섰다가 뜻하지 않게 마교도와 조우해야 했던, 윤아영 검사를 만난 김철민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한밤의 소동을?
기이하게도 당시 러시아에서 온 사업가로 위장한 마교의 끄나풀은 연화존자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부질없이 맞서느니 망설임 없는 죽음을 선택한 걸 보면 확실한 일이었고, 이는 망해 버린 소비에트의 마교도가 결코 어설픈 자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바.
마교도는 김철민의 얼굴을, 혹은 그 무공을 알아보고 망설임 없이 제 손으로 심장을 찔렀다.
그것이 지난 세월, 국정원 블랙요원들과 부딪치며 연화신공의 기운을 체득한 것인지 아니면 긴 세월 거의 밝혀지지 않은 연화존자의 비밀을 아는 것인지. 죽은 자는 말이 없었지만, 어쨌든 죽은 마교도를 꼬리 삼아 암약하는 마교 조직을 추적해 나가는 일은 지금껏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죽은 자가 한반도 내 마교도 중 매우 높은 위치이리라는 건 확실했으니, 조사의 필요성은 확실했다 하겠다.
까놓고 말해 상대가 마교라면 구구절절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법.
처음에는 칠익회의 이름으로, 이후에는 국가무공원이 맡아 정식으로 진행된 추적이 최근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
“헉, 헉, 헉!”
우선 김철민과 윤아영이 처음 만나게 된 그날 밤, 구진성과 부정한 거래를 시도하다 김철민을 보자마자 자살해 버린 마교도의 이름은 세르게이.
국적은 러시아였지만, 증언과 행적을 종합해 보면 대한민국에 머무는 시간이 일 년 중 절반 이상.
그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선량한 한국인들에게 명예 대한민국인이라는 칭찬 아닌 칭찬마저 들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 능숙하며, 주변에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실상은 매우 달랐지만.
주변에선 그가 대한민국의 중고차를 러시아로 수출하고 대게 등의 해산물을 수입해 온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은 이 거래를 통해 한국으로 들여 오는 마약이야말로 죽은 세르게이의 주된 수입 창출 수단이었다.
빈 자리는 티가 난다는 말처럼 음지에서 벌인 막대한 규모의 사업 흔적은 세르게이가 죽은 후에야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세르게이의 거주지와 임대한 창고 등 부동산 여러 곳을 수색한 칠익회는 그가 숨겨 놓은 상당량의 필로폰을 발견했고,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비밀 장소는 공을 들인 흔적과 함께 세월이 역력했다.
이를 바탕으로 건실한 사업가 행세를 해 온 그가 실은 한국으로 입국하고 처음부터 마약상으로 활동해 온 게 아닌가 추정했지만, 단 한 번도 경찰이나 검찰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는 점이 처음엔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조사를 거듭할수록 그 이유는 분명해졌다.
세르게이는 한국에서 조직 없이 홀로 움직였고, 그 덕분에 보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진정 베일에 쌓인 범죄자였던 것이다. 거래자들을 제외하고, 위장 신분으로 관계를 맺어 온 지인들은 세르게이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예 없을 정도였으니까.
거래 자체도 철저하게 은폐된 채로 이루어졌는데, 이 말인즉슨 그 많은 양을 사고 팔면서도 눈에 띄는 아무런 사건, 사고가 없었다는 이야기.
그건 정말이지 약쟁이들의 생리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남조선 놈들이 여기까지!”
중독이 심해질수록 통제 불능이 되는 고객들도 그렇지만, 이러한 종류의 불법적인 사업에서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건 사실 경찰보다 경쟁자들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세르게이의 소유지에서 발견된 남은 약의 양으로 추정해 보건대, 이 정도면 불법적인 면세 사업에 빨대 꽂은 다른 범죄 조직들이 모를 수 없는 규모였다.
시장이 교란될 정도의 막대한 양, 그것도 순도 높은 마약을 생전의 위장 중고차 판매상은 다뤘을 걸로 보인다.
과연 어디서 오는지도 모를 막대한 분량의 약을 경쟁자들보다 싼 값에 팔았던 러시아 보따리 마약상을 지역 약쟁이들이 정말 몰랐을까? 진짜?
그렇게 믿기는 어렵다. 돈 냄새처럼 구리고, 강렬한 냄새를 어찌 모를라고.
그럼에도 세르게이가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모범적인 양심 사업가 행세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수사하는 입장에서 해야 할 가정의 선택지를 좁혀 줬다.
“흐억, 허억. 헉.”
첫 번째 가정은 세르게이에게 독점적 거래선이 있었다는 가정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뚫을 수 없는, 굉장히 돈독하여 신뢰가 깊은 생산자 쪽 선이 있어 외부로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 추측은 제법 합리적이다.
두 번째 가정은 앞의 것보다 비교적 단순한데, 세르게이에게 모든 협박과 위협을 이겨 낼 실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상해 보자면 보통의 범죄 조직 따위는 감당할 수 없는 배경과 무공 같은 것들. 알아도 감히 침묵하게 되는, 가령 마공 같은 것들이 말이다.
종합해 보자면 마약이란 물건을 생산하고 들여옴에 있어 외부로 노출되지 않은 거래처가 있고, 혹 밖으로 정체가 알려진다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비밀을 감출 만한 용의주도함과 힘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모두 쉽지 않은 조건이고 이미 알던 사실들과 조금은 상충되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앞서 밝혀진 사실과 결부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해진다.
마교의 잔존 세력이라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할 테지.
“허억, 크아악.”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꼭 한 분야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백여 년 전, 적백내전 승리의 확실한 공로자로 자리매김한 이후 소비에트의 핵심 권력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던 마교 아닌가?
비록 ‘천마격살’ 이후 다음 천마를 가리는 내전 끝에 갈기갈기 찢겨 한 줌을 제외하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옛 소련의 유산 속에서 살아남은 마교도 조직이 없을 리 없다.
당장 소비에트 붕괴 후, 무극검문을 이끌고 평양으로 남하한 무극검마(無極劍魔) 같은 옛 고수만 봐도 그렇다.
비록 오갈 데라곤 없어 백두혈통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훌륭한 생존이다. 마교 지파 여섯 중 셋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간 데를 모르는데, 살았으면 성공이라 해도 무방하지.
이렇듯 운 좋은 소수 케이스를 제외한 마교 지파들은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모조리 몰락했고, 남은 떨거지 중 마약 조직으로의 변신을 꾀한 자들이 있으리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
그리고 악연일지언정 마교의 잔존 세력 사이에 남아 있는 인연이 있으리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또한 쉽다.
참고로 북한은 세계 최고 기술로 필로폰을 제조하는 걸로 유명하다.
‘국가무공원이 어떻게 여길……! 세르게이와의 연결점은 모두 끊어졌는데 무슨 수로……?’
하지만 사력을 다해 두 다리를 놀리던 도주자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한다.
“흐억!”
“오랜만에 보는 북한산 마교도네. 반가워?”
어디선가 날아온 돌맹이에 무릎 아래의 감각을 잃어 버린 도주자가 쓰레기 더미에 처박히며 나뒹굴 때, 한가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쓰러진 마교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한에 잠입한 이는 격통 속에 몸부림치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이 고통이 육신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니 그것은 암담하게 덮어 오는 좌절.
“친구들도 다 잡혔는데, 너 하나 더 잡힌다고 크게 달라질 거 없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갑시다. 민간인 많은 곳에 숨어 있는 바람에 우리 애들 총도 못 가지고 왔어. 덕분에 내가 직접 왔잖아? 누구 하나 죽을까 봐. 크, 북한의 돼지에 비하면 이 정도면 솔선수범 아닌가?”
“연화존자… 이 간나 새끼!”
“격한 환영 고맙기도 해라. 나쁜 놈들한테 욕 먹으면 잘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도망자는 가로등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단박에 알아보았다. 하긴, 저 가증스러운 자가 아니고서야 자랑스러운 마교 지파 거력패부의 무공을 익힌 자신을, 국가무공원의 출현을 알자마자 도망쳐 온 그를 누가 감히 추적해 올 수 있었을 거란 말인가?
“북한에서도 내 인기가 좀 되네? 알아봐 줘서 반갑다, 이 빌어먹을 간첩 자식아.”
반면 김철민은 틀어진 두 다리를 부여잡고도 적의를 숨기지 않는 남파 간첩, 마공을 익힌 게 분명한 북한의 마교도를 보며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럴 법하다. 지난 몇 달의 추적이 속시원한 검거로 귀결되니, 기분이 어찌 아니 좋을까?
흥겨운 말 몇 마디가 끊길 리 없다.
“간첩이라고 부르는 게 싫으면 약쟁이라고 불러 줄까? 요새 대한민국에 돌아다니는 마약 중 삼 분의 일이 북한산이라며? 지들 좋을 땐 우리 민족, 우리 민족거리더니, 염병. 공화국이라고 깝쭉대는 것들이 마약이나 팔아 대? 알량한 민족의식이 달러만 못 한가 봐?”
그의 기감에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난폭하고도 무거운 기운. 느껴지는 마기가 거친 것으로 보아 무극검문이나, 환희락락궁 소속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남은 건 거력패부뿐.
저 정도 성취라면 아는 것도 많을 테니, 캐낼 것도 많으리라.
“보통 보위성 쪽 애들은 무극검문 아니면 환희락락궁 쪽 무공을 익히기 마련인데. 한 대 맞았다고 눈 돌아가는 너는 보아하니 거력패부 쪽…….”
무슨 대화를 나눌지 두근거려 눈웃음마저 지어진다.
“정찰총국 소속이지? 어디 겁도 없이 주체사상 따위를 익힌 가짜 빨갱이가 마공마저 익힌 채로 대한민국을 활보하고… 세상 진짜 좋아. 요새 간첩이 어딨냐는 사람들한테 널 꼭 산 채로 잡아다가 보여 줘야 되는데.”
하나 조선인민공화국 정찰총국 대좌 리인순은 연화존자의 조롱에도 오히려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다.
어차피 남조선으로 파견될 때부터 각오했던 바였다. 살아서 영광을 누리기에는 남한 한복판에서 잔존 마교 조직과의 연결점이 되어 약을 넘기고, 인원을 포섭하는 건 너무도 위험한 임무 아니었던가?
그래도 인민의 적에게 순순히 잡혀 줄 수 없는 노릇이다.
‘말 한마디 섞을 수 없지.’
하여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린다,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며.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급하게 탈출하느라 자료들을 파기하지 못한 것, 다른 동지들이 생포당하는 걸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르게이의 죽음으로 알게 된 중요한 정보가 있음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아니 되건만……. 그 정보를 은폐하면 이득이 무궁무진할 텐데.
아쉬워하는 와중에 염혼마공(炎魂魔功)이 그의 뇌리를 턱 치니 생각이 끊긴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다.
“크아아아!”
눈동자가 돌아가고, 눈의 모세혈관이 터지며 붉게 물들고, 손톱과 이빨이 비죽 드러난다.
마치 짐승의 것처럼 흉측한 야성, 그 자체인 모습.
어디 그뿐인가? 팔과 어깨,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며 혈관이 돌출되고 근육이 버티지 못하여 터져 나가는 바람에 싸우기도 전에 피가 흥건하기까지.
그 와중에도 품 안의 작은 손도끼를 꺼내기까지 했으니, 실로 마교의 당당한 지파, 거력패부의 일원이다.
그 모습을 보며 김철민이 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아무래도 정말 조만간 칼을 하나 준비해야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보법을 밟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가 가볍게 마공에 먹혀 버린 간첩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리고.
-꽝!
벼락이 우는 소리가 이어지니.
“크흐어엉!”
마교도는 울부짖는다.
자비 없는 손길은 그럼에도 이어진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연화존자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동정일 수도.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손 안의 도끼를 마구잡이로 흔드는 정찰총국 소속 간첩을 연화존자는 마디마디 끊어 냈다. 처음엔 손가락과 발가락을, 그다음에는 마공의 힘으로 일어선 발목과 무릎, 손목과 팔꿈치, 마지막엔 어깨까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결코 멈출 수 없는 마공, 혼을 태워 힘을 얻는다는 연혼마공을 멈출 수 있는 건 오직 이 방법뿐.
피조차 흐르지 않는 사특한 마공으로 종국에 남는 건 비참한 몰골로 쓰러지는 한 남자.
연화존자의 입가에 쓴웃음이 진다.
“…마음에 안 들어.”
깔끔하지 못한 녀석들. 다음에는 꼭 날붙이로 한 번에 처리해야지.
쓰러진 마교도를 싣고 가는 앰뷸런스와 수하들을 보며, 김철민은 텁텁한 입맛을 느낀다.
그에게 마교는 언제나 이런 뒷감상을 남긴다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