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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38화 (38/175)

#38화

얼마 전 내린 폭설이 한겨울에도 죽지 않는 햇살에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한지도 며칠.

두껍게 쌓인 설원의 표면은 자연이 연마한 매끈함으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그것은 결국 새빨간 붉은 피를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역할을 끝내고야 말았다.

얼어붙은 핏자국과 시체가 끊어진 철로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다. 격렬한 전투였을까? 직접 보지 못했지만 멈춰 버린 마교주 전용 시베리아 특급열차에서 내리는 강자존주의자들은 그러진 않았을 거라 내심 짐작한다.

그 참혹함과 별개로 하나같이 목이 잘려 죽은 선발대, 교주의 앞길을 밝히는 첨병들은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그야 감히 지엄한 천마의 앞길을 끊은 것도 모자라 피가 묻은 검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건방진 종자가 있기 때문이지.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상태로, 시베리아 평원의 추위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소비에트-마교의 고수들을 눈앞에 두고도 암살자의 얼굴 어디에도 두려움은 찾을 수 없다.

“…네가 홍혈천마인가?”

남자의 러시아어는 거칠고 투박했다. 그것은 붉은 호법원의 고수들을 격살한 깔끔한 솜씨와 대비되는 말투.

사람을 분노하게 만드는 분위기란 게 홀로 서 있는 남자에겐 존재한다.

“감히 건방지게 제 이름도 밝히지 않는 강호의 무뢰배가 천마를 눈앞에 두고도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구나!”

교주를 수행하던 마교의 고수로 하여금 참지 못하고 요청하게 만든다.

“교주께 삼가 아뢰오! 저 건방진 놈의 목을 베어 본교를 능멸한 죄를 갚게 할 터이니, 부디 허락을!”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포개는 만인도(萬人屠) 북궁평, 마교 여섯 지파 중 극살도문(極殺刀門)의 문주가 외치는 우렁찬 고함에 지루한 표정의 홍혈천마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여진다.

하여 멋들어진 공중제비와 함께 설원을 가르며 마주 보는 바.

지루한 표정의 암살자는 다만 심드렁할 뿐이다.

“조무래기는 꺼졌으면 좋겠는데. 내가 오늘 천마의 목을 따고, 이 빌어먹을 강호를 떠날 생각이어서 말이야.”

“이놈!”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은 아시아인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베어 버린 자가 만 명이 넘어간 이후로 세지 않았다는 폭급한 살인마 북궁평은 이미 살기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버렸다.

마공의 부작용인지, 타고난 성정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할 지경. 도갑을 던져 버리고 곧바로 치고 들어가 남자의 전신요혈을 동시에 노린다.

이윽고 극살도문의 추혼탈백도(追魂奪魄刀)가 금방이라도 목숨 줄을 끊을 것만 같던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난다.

“어, 어떻게…….”

추혼탈백도의 난폭한 기세에 비하면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던 검이 어느새 북궁평의 목을 꿰뚫은 게 그것.

“급하기만 하고 길을 모르는 칼이야. 조야하고, 무식해. 배움의 길이 끊긴 채 결과만을 탐하는 칼이 갈 곳은 꼭 너와 같을 것이다.”

북궁평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폭언이었지만, 항변은 나오지 않는다, 죽은 자는 언제나 말이 없기에.

그리고 마교의 고수들은 오소소 돋는 소름이 생경하고, 낯설어 불안했다.

그들 중 누구도 남자의 검이 북궁평의 목을 뚫는 걸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의 마지막 저력이라는 마교의 고수들조차 저 이름 모를, 젊기까지 한 남자의 검을 알아볼 수 없던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단한 솜씨군.”

천마의 웃음기 어린 말투가 주변의 마교도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수백 년 전 정마대전에서 패한 후,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길고 긴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천마신교를 재건한 일세의 거인.

레닌의 요청으로 적백내전에 개입, 소비에트의 개국공신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스탈린이 벌인 대숙청에서도 살아남아 지금껏 영광을 누리는 명실상부 역대 최고의 천마.

그 무공이 하늘까지 닿아 죽음조차 피해 갔다는, 지상 위 가장 막강한 고수로 손꼽히는 홍혈천마(紅血天魔)는 지난 수십 년 간 웃어 본 적이 없었다.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그 검의 이름은 무엇인가? 누구의 가르침이지? 누가 만든 건가? 무공은 어떻게 익혔지?”

하지만 지금 그는 웃고 있다. 격동의 1989년이었다.

공산국가들이 무너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부서졌고, 철의 장막은 실시간으로 붕괴. 발트 3국에선 사라진 줄 알았던 민족주의가 부활하며 소비에트의 지도에 대놓고 반기를 들고 있다.

중원에선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웠던 민주화에 대한 인민의 열망은 총과 탱크로 붉게 물들었다. 인민해방군이 인민의 요청에 보낸 대답은 그토록 잔인하여 침묵만이 오롯하다.

자유의 희망을 꿈꾸는 자들에겐 견디기 힘들게 매서운, 마치 강철로 만든 무지개처럼 날카로운 시대.

시베리아 특급열차가 소비에트 전역을 도는 건, 그런 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소비에트의 강자존주의자들은 아직 건재한다는 의사 표현. 수십 년 전, 소비에트의 지도에 저항하던 프라하가 어떻게 짓밟혔는지 기억의 환기를 시도하는, 무너지려 하는 것들과 무너뜨리려 하는 자들에 대한 마교의 대답. 망설임의 회복과 회유의 협박.

홍혈천마에게는 모두 지겨운 어린애 놀음인 것들.

“이름은 딱히 없어. 검은, 그냥 검이지.”

“그런가? 하긴, 그렇군.”

홍혈천마는 지겨웠다. 진심으로 지루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하늘 아래 더는 그와 싸울 자가 없었다.

작은 섬에 갇혀 반공복고(反共復古)를 외치는 대만의 고수들은 호기롭게 덤빈 검황이 목만 남은 시체로 돌아가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스탈린이 죽자 기세등등할 뻔했던 마오쩌둥의 사파 고수들은 세 명 정도 짓눌러 뭉개 버렸더니 살살 기며 웃음이나 팔았다.

그 외에… 거기 말고 무림이 있긴 한가?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그는 천마이기에 전혀 광오하지 않다.

무너졌던 천마신교의 부활을 이룩한, 그것도 중원을 넘어 세계적인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전무후무한 위업을 이룬 영도자.

물론 그런 홍혈천마조차 교의 재건을 위해 몇 가지 타협을 해야 했다. 예를 들면 소비에트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과 학살에 손을 보태거나, 지리한 헤게모니 다툼에 발을 담그는 등의 일 같은 것들.

이 짓도 수십 년이 되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무공도 모르는 버러지들과 싸우는 건 필요에 의해 종종 하는 짓이지만 그럼에도 마교도 대다수가 경멸하는 짓.

강자존주의자라는 건 강자에 대한 갈망의 반대급부로 약자에 대한 경멸이 있다는 말 아니었던가?

마교도에게 있어 약자와 손을 섞는 것만큼 수치는 없다. 진정한 마교도라면 강함을 증명하고, 강함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적을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홍혈천마에게 있어 당금의 세상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와 손을 섞을 고수가 더 이상 세상에 없었기에.

없는 줄 알았기에.

그런 의미에서 방금 죽은 북궁평에 대한 남자의 촌평은 옳았으며, 그 존재는 기껍다.

“좋군, 좋아. 정말 좋아. 하하. 하하하. 이 내가 얼마 만에 웃음이 나오는 건지. 자네, 이름이 뭔가?”

“마교도 따위한테 알려 줄 이름 따윈 없고.”

얼마나 기꺼운지 저 건방진 태도마저 마음에 쏙 들 정도다.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얼어붙은 천마의 마음은 바로 오늘 같은 싸움을, 오랜 시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한 빨갱이다운 말로 해 보자면, 이와 같은 투쟁을 진심으로 바라왔는데.

심장이 식으며 싸늘하게 뛰는 이 감각이 어찌나 그리웠던지.

“피차 끝장 볼 사이에 통성명할 필요 있나? 무림인이 싸우기 전에 미련 따위 남기는 거 아니지.”

천마에겐 적이 필요했다, 죽음과도 같은 적이.

그리고 후일 연화존자라고 불릴 김철민에게는 천마의 목이 필요했다.

“그러니 어서 끝내자고. 난 당신을 죽이고 웬만하면 뒤에 놈들까지 죽이고 싶거든?”

대선이 끝난 뒤 실망을 참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떠난 김철민이 마교주 전용 시베리아 특급열차를 막은 건 다른 게 아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교에 유감이 많다.

“정사마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웠던 옛날이야기 할 것도 없이, 난 직장 생활 할 때부터 너희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어. 개같은 놈의 새끼들. 너희 때문에 내 조국이 반으로 나뉘고 세상이 반으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운 걸 생각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져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이불 차고 일어난다고.”

김철민은 마교가 싫다. 빨갛게 물든 강자존주의자들이 평소부터 싫었다.

6‧25전쟁이라는 민족 상잔의 비극을 겪게 하고 갈라지는 데 큰 지분이 있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북한을 지원한 저들을 용서하기 어려웠다.

이북에 자리 잡은 마교 지파들과 싸우며 청춘을 보낸 그에게는 이러한 감정들이 남았다.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 내 마지막 할 일이다.’

비록 떠나 왔지만 김철민의 애국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추태에 실망하지도 않았을 일이며, 마교는 어찌 되었든 새 시대를 맞이할 대한민국의 앞날에 방해만 될 뿐.

사실 그렇기도 하다.

북한의 협력자들과 싸우는데 무슨 핑계가 필요한가?

‘북한 놈들 입 다물게 하려면 천마 모가지 정도는 썰어 가야지.’

이 정도 생각만 하고 온 길이었을 따름이다. 큰 계획은 없다, 얼마 전 완성한 신공이 있었고, 절망 속에 얻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

모든 것을 버리니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더라.

세상 전부였던 조국을 버리니 그보다 큰 세상이 기연처럼 다가왔다. 천고의 재능을 타고 태어나 죽음과 춤추며, 절망을 벗 삼아 청춘을 보낸 젊은 강호인에게, 겨울을 몰아내는 봄비처럼 그렇게 내렸다.

그는 그것 하나만 믿고 여기 섰다.

“흐흐. 입담이 매섭구나. 하나 좋다.”

깡 말라 왜소해 보이던 홍혈천마가 어깨를 피고 발걸음을 옮기니, 가공할 기세가 주변을 장악한다.

어두워지는 것도 같다. 하얀 설원은 더 이상 햇살을 반사할 수 없었다. 질려 버린 바람은 이곳을 떠나겠다 비명을 지르며 흐느낀다.

“본좌가 바로 소비에트의 천마이니. 오라, 이름 모를 낯선 이여. 내 오늘 너의 검을 시험하겠다.”

마교의 다른 자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난다. 천마의 행차에 감히 의문을 붙일 수 없다.

홍혈천마가 내뿜는 천마신공의 내력에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 거리를 벌린다.

천마였다. 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시험은 무슨.”

하나 이에 김철민은 가볍게 피식 웃고 걸어간다.

천천히 걸어간다. 검을 휘휘 젓는 그 몸짓에 어둠이 움찔하더니 으르렁대며 뒷걸음질친다.

천마신공이 물러선다.

“살 만큼 살아서 세상을 반으로 나누는 데 기여한 게 전부인 늙은이 주제에 폼은.”

김철민의 주변으로 은은한 빛무리가 희미하게 요동친다. 도대체 저것이 어떤 무공인지,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던 마교도들조차 감히 알아보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신공절학, 연화신공은 오롯한 김철민의 것.

대한민국의 것.

“넌 오늘 죽는다, 천마.”

그 당당함엔 이유가 있음이라.

천마와 김철민은 마주 선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어느새.

“그거야말로 본좌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난 나보다 큰 하늘을 늘 원했다.”

천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철민의 검이 벼락처럼 솟구친다.

그의 검이 천마의 턱 끝을 노린다. 하지만 백여 년 가까이 무공을 수련한 노괴물이 그 정도 한 수를 간파하지 못할 리 없다.

맨손으로 쳐 낸다. 천마신공의 내력으로 뭉친 수강이 검을 내리찍는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지개가, 그 어디서도 들어도 보지도 못했던 일곱 줄기 무지개가 튕겨진 검에서 뻗어져 나온다.

뜻밖의 기사에 홍혈천마가 다급하게 발을 구른다. 천마군림보였다. 뿌리부터 흔들어 일발 역전을 노리는 노련한 솜씨였고, 중후한 내력이 설원에 요동치며 모든 것을 뒤흔든다.

그렇지만 천마는 인연의 무지개가 하늘과 땅이 아닌 사람에게서 비롯됨을 몰랐음이라.

“무공… 이름이……?”

“연화신공.”

“좋은… 무공이군. 그대가 보다 일찍… 왔더… 라…….”

어느새 심장에 검이 박힌 채 홍혈천마는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덤덤한 김철민과 달리 죽어 가는 그 얼굴은 후련하여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천마의 피가 그 별호처럼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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