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천마를 죽인 집안의 보검을 대한민국 최고의 도검 장인을 아버지로 둔 친구에게 보낸 건 일종의 결심이었다.
그 마른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붉은 피를 한가득 쏟고 죽어 버린 천마를 보며, 김철민은 책임감을 벗어 던지고자 했다.
나는 조국에 해야 할 일을 다했노라는, 더는 내 나라에 빚진 게 없다는, 그런.
천마를 죽이고, 덤벼들던 마교의 고수들 여럿을 덤으로 격살하기까지 했으니, 더는 얽메이는 것 없이 자유로이 살아 보겠노라. 그때의 김철민은 마음 먹었었다.
다시는 무림과 연을 맺지 않고 은거하리라고 설원의 삭풍을 맞으며 맹세하기까지 했었지. 광복 이후 부던히도 대한민국을 괴롭혔던 북한 괴뢰 정권의 가장 큰 조력자, 마교의 수장을 죽였으니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아니겠어?
그러니 이제부턴 나를 위해 살겠다며 김철민은 굳게 결심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뜻하지 않은 미래를 가져오는 법이어서 김철민, 이제는 연화존자라는 별호로 불리는 일이 잦은 한 남자는 떠났던 조국에 돌아와 앉았다.
제대로 떠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우스운 운명이었다. 그토록 진절머리를 치며 떠나갔건만,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육신마저 젊어져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다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천마를 죽이고 세계를 떠돌며 어려운 형편의 한인들과 교류를 시작했을 때부터, IMF로 인해 나라가 휘청일 때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 손을 보탰을 때부터, 이후로도 한 번씩 한국에 들어와 연화신공과 무공을 전수했을 때부터 이런 식의 귀결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검사 윤아영을 만나 마음이 바뀐 건 그런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다면 외면했겠지, 지치고 야윈 마음으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킬 생각도 없다.
‘물러설 곳이 없다.’
발걸음을 뗐으니 끝까지 가야 한다.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 흘린 피가 몇이며, 으깨 버린 곰팡이 같은 작자들이 몇이란 말인가?
이 나라는 위기에 빠져 있다. 설명이 불필요할만큼 뭔가 망가져 있다.
알량한 자부심 같은 걸로 극복할 수준이 아니다. 그런 걸로 바꿀 수 있었다면, 바뀌어도 진작 바뀌어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되돌리자면 칼이 필요하다. 나라의 썩은 부분을 도려 내고 회복의 순간을 만들 날카로운 칼.
이것이 돌아온 연화존자가 내린 결론이다.
그 칼이 손에 쥔 것이든, 마음에 품은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이 왔고, 강호의 무뢰배들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필요하다.’
문민통제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존중한 결과가, 선량한 피해자들은 결론에 납득하지 못하고 뻔뻔한 가해자들이 되레 목소리를 높이는, 몰염치한 세태의 양산이란 말인가?
이기적인 자들이 선량한 자들의 눈물을 먹고 사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연화존자는 하는 것이다.
더는 두고 보기도 힘들다. 이런 꼴을 보려고 젊음과 재능을 바쳤던 게 아니다.
이러려고 천마를 죽인 게 아니었다.
‘국가무공원은 이제 시작이다.’
이렇게 될 줄 무의식적으로 알았는지 꽤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새로운 무공 체계를 얼추 완성했다.
그 혼자서 마무리 지은 건 아니다. 아무리 연화존자라지만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쓸지도 모르고 늘 최전선에서 무공을 수집하던 칠익회. 아울러 한결 같은 도움을 주던 운하신권과 오랫동안 떨어졌지만 다시 만나 묵묵히 돕는 청해마도까지.
도움을 베푼 그들이 아니었다면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못했을 거란 걸 김철민은 안다.
준비가 되었으니 누구도 성공 못한 전무후무한 시도를 하려 한다. 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생활과 밀착되는 내공심법을 보급하는 일이 그것.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성공해야만 한다는 결의가 더 크다.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 대한민국을 위협하던 바깥의 적과 싸웠던 젊은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연화존자는 대한민국의 질서와 싸우려 한다. 그 대상은 대한민국의 기득권이 될 수도 있고, 실체를 가진 조직이나 단체가 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사람들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될 수도 있으리라.
천마를 죽인 검이 형태를 바꾸어 다시 돌아왔듯, 전과 다른 시대이기에 싸우는 일조차 달라져야 함을 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안다. 소수의 협력자들과 함께 나라 전체를 개조하다시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천마격살의 주인공이자,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일 연화존자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올해로 스물네 살이 된 하사 이준형은 오랜 망설임 끝에 얼마 전 뜬 국방부 내부 공고에 응모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위험한 소문이 있는 길이었지만 선택지가 별로 남지 않은 이준형의 입장에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달콤한 조건의 모집 공고였던 바.
이 하사는 얼마 전 있었던 장기 복무 심사에서 떨어진 참이다.
‘지금 당장 전역할 수는 없어.’
요즘 세태와 다르게, 한편으론 젊은 군인답게 또래보다 일찍 결혼한 그는 동갑인 아내와 이제 막 돌이 지난 딸이 있는 몸이었다. 전역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럼에도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가장이라는 소리.
나름 군대에 꿈이 있던 거야 군 생활 동안 거의 사그라들어 재만 남았다지만,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장기 복무 심사에 떨어진 게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전역하면 당장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장기 복무 심사에서 떨어진 뒤 술을 들이붓고 일어난 이후로 쭉 그랬지만, 진로에 대해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다.
허무하기까지 했다. 대체 난 왜 군대에 왔을까? 그것도 아무 쓸데없는 간부로.
지난 사 년을 되돌아보면 남는 것이 없다. 군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무언가 해냈다는 기쁨도, 먹고살 길도, 아무것도.
하여 두려운 것이다, 홀몸도 아니고 가족이 있는 판국에 알량한 간부 전역자인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곰곰이 미래를 생각하자면 어둠컴컴한 마음을 떨쳐 내기 힘들다.
나라에선 그런 자신에게 챙겨 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전역한다고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해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들어왔어, 지금 생각해 보면.’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 군인이 멋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입대하는 게 아니었다. 들어올 땐 국가의 아들, 나갈 땐 남의 아들이라는 말은 병사뿐 아니라 간부에게도 통용되거든.
그렇지 않나? 전역자 혜택이 대체 뭐가 있나?
있긴 있나?
알량한 제대군인취업센터의 알선? 그곳에서 하는 일자리 알선 정도는 아르바이트하다가 실업 급여 받으면서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서비스에 불과하다. 일하던 국민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
애초에 전역자는 고용 보험 대상자가 아니라며 내 의지 아닌 전역을 해도 실업 급여조차 받을 수 없는 것도 어이가 없는 판국이구만.
이 나라는 대체 군인을 뭐로 보는 건지, 사람으로 보긴 하는 건지.
먼저 나간 선배들과 가끔 연락을 하거나 만나면 들려오는 답답한 현실이다. 제대군인에 대한 처우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
당장 중앙 공무원의 꽃이라는 기재부에선 군 경력이 포함되는 호봉을 승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남녀 고용 평등을 어기는, 합리적 이유 없이 과도하고 중복적인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니 정비하라며 공문마저 내려보내지 않았나?
내 참.
그 외에 사회에서 전역자를 찾는 곳은 전부 인맥빨이 중요한 일부 영업직에서나 있는 일.
‘안 되면 정말 취업 이민이라도 고려해야 하나?’
그것도 뭐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얕은 기반일지언정 한국에 있는 모든 걸 버리고 낯선 나라로 가족 모두가 가는 게 생각처럼 쉽게 될 일도 아닐뿐더러, 잘된다는 보장도 없으며. 가서는, 가서는 행복할까?
외국인 노동자로 자리 잡기 위해 고생을 하는 거야, 본인은 그렇다 쳐도 아내는? 이제 막 커가는 딸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하는 와이프와 웃는 모습이 예쁜 딸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준다지만, 사랑의 기분만으로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는 법.
뭐, 그래. 장기가 된다면 한숨 돌릴 수야 있겠지. 사회에 나가서 뭘 할지 고민도 좀 하고, 중장비 기사 자격증이라도 취득할 시도라도 할 테지만(어디까지나 시도다), 솔직히 한번 떨어지고 나니 아무래도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제 고작 스물넷인 하사 이준형에게 군대 내에서 남은 선택지라곤 이름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국가무공원 시범 부대로의 파견 지원밖에 없는 거지.
‘소문은 정말이지 심상치 않지만…….’
전역을 앞둔 일개 부사관조차 알 만큼, 국가무공원을 둘러싼 군 안팎의 소문은 흉흉했다.
국방부 높으신 분들과 국가무공원이 격돌했다는 소문은 거의 사실에 가까웠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홍보가 안 될 리 없다는 누군가의 추측은 이준형이 보기에도 확실히 근거가 있다.
줄줄이 모가지 날아간 별들은 차치하더라도, 이 부실한 홍보야말로 국가무공원에 대한 높으신 분들의 감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한다.
각 사단은 물론이고 국방부에서도 국가무공원 파견 부대원 모집에 대해 공고문 하나 달랑 보낸 게 전부고 자세한 안내는 없던 것이니, 국가무공원 파견 부대원 모집의 열기는 생각보다 저조했다.
그러나 이준형에게는 기회다. 아마 그와 비슷한 입장인 사람들이라면 다 비슷할걸?
어차피 물러날 곳도 없는 것이다. 이게 아니면 전역해서 뭘 하게 될지 모를 판국에 뭘 더 가리겠나?
그는 부대 상사들의 온갖 눈치를 꿋꿋이 버텨 내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나름 믿고 있는 구석도 있지만 다 떠나서 공고문이 제시한 월급이, 처우가 너무나도 좋아 외면할 수 없었다.
‘기본급이 오백에 가족 숫자에 따라 월세나 관사를 따로 지원한다고?’
맨몸으로 사회에 던져져 제대군인취업센터에서 육 개월 한정으로 주는 25만원 받고 그 어디든 월급 주는 곳이라도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치다 실패하고 우울해지는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나은 선택이지, 그럼.
딱히 비빌 데도 없어 가족이 굶게 될 판국에 주변의 눈치, 압박 같은 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물론 저 공고를 백 프로 사실이라고 순진하게 믿기에는 이 하사도 군대의 참상을 볼 만큼 봤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돌아갈 곳이 없지 않나?
국가는 전역하는 그에게 씹다 버린 개껌만큼의 관심도 없다. 이 가벼운 국가에 대한 의무 같으니라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고, 그리하여 이동한 면접장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결연함이 가득한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준형 하사는 묵직한 침묵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들 나랑 비슷한 신세인 거겠지.’
면접 대기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계급은 다양했다. 부사관, 장교, 병사… 심지어 영관급에 극소수 여군까지.
소속도 여럿이었고, 나이대도 제각각이었지만 하나같이 기대감보다는 심각한 얼굴이 많았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상황을 짐작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군 상부에서 원치 않는 면접에 지원한 처지들이었고, 그에 더해 들어오면서 보았던 바깥의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을 터.
총을 든 사내들이 바깥에서 주변을 경계 중이었다. 군인은 아닌 듯한 그들은 하나같이 냉막한 표정이다. 어디 소속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하사는 위축되는 자신을 느낀다.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 작은 소음 하나 없이 조용한 복도는 그로 하여금 생각이 많게 만들었다.
이게 옳은 걸까? 맞는 걸까?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전역할 걸 그랬나? 상사들이 눈치 줄 때 그냥 눈 딱 감을 걸 그랬나?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아내와 딸의 얼굴을 떠올리니 이겨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묵직해진다.
이 복잡한 기분은 면접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랬다.
“이준형 씨, 들어오시죠.”
이 하사는 벌떡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