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45화 (45/175)

#45화

“거, 사람 말본새하곤 참!”

조선전통무예보존회의 회장이 또다시 분노를 토해 낸다.

“존중을 보이시오, 존중을! 우리가 그렇게 한가하고, 우스운 사람들이 아니야!”

그는 연화존자의 말에 느낀 큰 모욕감으로 얼굴이 붉어져 있다.

아니면 평소에도 저런 성격이어서 쉽게 흥분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방금 전 연화존자의 전음으로 들은, 조선전통무예보존회 일부가 각 지역 폭력 조직과 연계되어 활동하지 않냐는 물음에 강하게 대처하는 것일 수도.

“우리가 무슨 그깟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여기 모인 줄 알아? 다 우리 문화와 국민적 자존심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이 말이라고!”

뭐가 되었든 저 거친 태도 덕분에 협회장이 된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협상장에서 목소리가 크다는 건, 그것도 뻔뻔하게 내뱉을 수 있다는 건 꽤나 큰 장점이거든.

일단 시끄러워야 관심이라도 갖기 마련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사실 두 번째 문제고, 어찌 보면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우리 단체가 잊혀져 가는 대한민국 무림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어? 외세가 밀고 들어오는 이 작은 나라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노력을 당신이 알기나 하냐고!”

그는 자신이 선하며 정당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걸까? 아니면 돈 때문에 보이는 태도일까? 알 수 없다.

“어디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게 반말이나 찍찍 뱉고! 어? 이렇게 교육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 국가무공원같이 근본 없는 조직에 있으니, 이 모양 아니야?”

뭐가 되었든 그의 선 넘는 발언에 국가무공원 요원들의 눈에 살기가 감돈다.

속속들이 귀국 중인 칠익회 인원 중에서도 연화존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요원들은 뒷일을 잠깐 잊은 채 순간 저 자를 죽여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칠익회 구성원들에게 인생이란 걸 돌려준 연화존자 아닌가? 무공도, 인품도, 능력도 모두 별거 없이 감투 하나만 믿고 설치는 인간에게 살심 어린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연화존자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미루는 성품이 아니다.

“야.”

“야? 이 사람이 그래도…….”

“너 몇 살이야?”

“…뭐?”

우습기 그지 없다는 모양새로 연화존자는 묻는다.

“내가 올해로 육십이 넘었거든, 젊어 보이는 건 반로환동해서 그런 거고.”

“반로환동? 그게 무슨 무협지에나 나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게!”

“믿는 건 네 자유이긴 한데,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건 맞을 걸? 민증 까면 답 나오는 걸 왜 거짓말 하겠어? 그리고 다 떠나서.”

물으며 생각한다.

역시, 역시나. 무림인 놈들과 말로 좋게 해결해 보려던 내가 어리석었다고.

굳이 입 아플 게 떠들 일이 아니었다고.

“내가 배분으로 따지면 운하신권 어르신 바로 아래 정도란 말이야? 혹시 강호의 배분, 뭐 이런 걸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못 알아듣는 건가? 인생 학연, 지연이라는 건 잘 아는 것 같아 보이는데.”

강호의 모리배 놈들은 힘으로 찍어 눌러야 된다.

찍 소리도 못하게, 아예 콱.

세상엔 좋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무공은 그런 이들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김철민은 그걸 가지고 있다.

“넌 어디 문파, 누구 제자니?”

“그, 그…….”

“대답 못 하겠어? 이 바닥에도 학력 위조가 횡행하는구나, 진짜. 그래, 뭐. 답하기 곤란하면 질문을 바꿔 볼까? 누가 보내서 왔어? 내가 무섭다고 등 떠밀어 보낸 너네 선생님이 누구시니?”

조선전통무예보존회 회장의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하지만 무정한 연화존자의 입은 멈출 줄을 모른다

“대답 못 하겠으면 말고. 그거야 내가 알아보면 되지. 읏차.”

행동마저도 그렇다.

“준비한 말이 많긴 했는데, 그런 건 다들 별로 안 궁금하시죠? 어차피 여기 대화하려고 온 게 아닌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대화 없는 오직 투쟁, 듣기만 해도 가슴이 끓어오르네요, 저도.”

그는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손가락으로 툭, 책상을 건드린다.

그러자 열이 맞춰져 있던 책상들이 촥하고 펴지며 사방으로 퍼진다. 연화존자 앞에 있던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어쨌든 여기 모이신 분들, 다들 무림인이라고 나름 자부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럼 무림의 방식으로 해결을 봐야지. 그게 맞지, 그쵸?”

몸을 날려 그 위에 선다. 황망한 얼굴, 당황스러운 얼굴, 열받은 얼굴을 한 모인 이들을 내려다본다.

“여기 있는 여러분이 날 이 탁상에서 떨어뜨리면 앞서 말한 개편안은 내가 책임지고 취소하겠습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대로 가는 거고. 어때요? 듣기만 해도 두근두근하지 않습니까?”

“…뭐요?”

“사실 우리가 그냥 밀어붙인다고 당신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한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무림의 일이니까, 무림의 방식으로 푸는 게 모양새가 괜찮을 것 같네요. 안 그래요?”

연화존자의 뜻밖의 선언에 세 개 단체의 회원들이 웅성대며 자기들끼리 바쁘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상상 못 한 것 같다.

하긴 보통 정부와 이익단체의 협상이라고 하면 이쪽에서 고함을 지르고 저쪽에서 끌려다니거나, 뒤에서 만나 대화를 하거나, 중재인을 두고 협의안을 도출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이건 민주주의, 관료주의에 절여진 자들에게 너무 낯선 방식이다.

“거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꼭 관짝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는 말 같은 거요. 그런데 내가 가만 보니, 여기 여러분은 관뚜껑 못 박히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눈물 찔끔 흘리실 것 같네요.”

손바닥을 까딱 댄다.

“그러니까 다들 오세요. 눈물 쫙 빼게 해 드릴 테니까. 시간은 그리 많이 못 드립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 공인 문파 제도의 2급, 3급 자격증을 소유한 단체 회원들은 연화존자를 실망시킨다.

누구도, 그 누구도 먼저 덤벼드는 사람이 없다. 서로의 눈치만 보며 느슨하게 주먹을 쥔 채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게 전부.

혹시나 했던 그는 혀를 찰 수밖에 없다.

“기개들이 영 없으시네, 자격증반 모임이라 그런가?”

빈정대는 연화존자의 말에도 노여워할지언정 나서는 이가 없다. 이래서야 올라온 사람만 우스운 모양새.

“할 수 없지, 안 오면 불러야지.”

“으, 으아아악!”

그가 손을 뻗자, 놀라는 비명이 회의장을 채운다.

조선전통무예보존회의 회장이 연화존자의 손길에 둥실 떠오른다. 극에 달한 허공섭물이지만, 모인 사람 중 이 사태를 덤덤하게 이해할 이는 많지 않다.

하여 소란이 일어난다. 뒤로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 공포에 질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만약 국가무공원 측 사람들이, 방금 전 발언으로 화가 많이 난 이들이 막고 있지 않았다면, 그 꼴불견이 외부로 노출될 뻔했다.

그런 소동의 와중에 한민족의 무예를 지켜왔다는 협회를 이끄는 남자와 연화존자가 책상 위에서 마주 선다.

“준비됐어요?”

연화존자는 실실 웃지만, 협회장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안 됐나? 그럼 어쩔 수 없고.”

연화존자의 손바닥이 협회장의 가슴을 후려친다. 기세 좋게 목소리를 높이던 아까와 달리 그는 무력했다.

완전히.

변변한 방어 동작조차 취하지 못하고 팔을 휘휘 저으며 날아가 나뒹구는 모습이 그랬고, 연화존자는 팔뚝을 타고 오는 미약한 저항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력과 육체의 단련이 형편없는 수준이다. 이런 자가 누군가에게 자격을 부여한다는 게 난센스로 여겨질 만큼 나약하다.

“으, 으헉!”

상투는 풀어져 머리가 귀신 꼴이다. 잘 여몄던 옷자락은 흐트러지고, 당당하던 풍채마저 쪼그라든 풍선 모양새.

바닥에 쓰러진 채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니, 영 흥이 오르지 않는다.

“다음은 누가 올라오시려나?”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어설프게 시간 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끝이면 앞으로도 끝이니까. 국가무공원이 여러분과 갖는 간담회는 오늘이 마지막이란 겁니다. 실력을 보이세요.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나 하나도 어쩌지 못하면서 국가 공인 문파 제도를 유지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력이 부족하면 최소한의 태도라도 보여야 한다. 노력하려는 자세, 지키려는 의지 같은 것들을 보여 줘야 한다. 연화존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국가 공인 문파 제도를 손보려는 건, 현 제도가 이익 단체의 생계 말고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공의 발전에도, 국가의 경쟁력에도, 시민들의 생활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 달에 얼마, 육 개월에 얼마하는 자격증이 국가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향상시킬 수는 있겠는가?

절대 아니었다. 취업이 절박한 사람들의 돈만 빼먹는 짓거리지, 이게 무슨.

그깟 자격증 가지고도 범인조차 제대로 제압 못 하는 경찰이 한둘이 아니고, 변변치 않은 효용에 화재 진압 중 순직한 소방관이 몇인지.

오죽하면 군에서조차 이런 무공은 쓸 수 없다며 현천공만 찾을까?

그럼에도 국가 공인 문파 제도를 손보지 못했던 건, 이들이 규모 있는 이익 단체, 즉 잘못 건드렸다간 피곤해질 투표에서의 표심이기 때문이다.

규모 있는 단체의 완장질에 정치권이, 공권력이 질질 끌려다니는 건 그래서였다. 괜히 바른 말 했다가 모난 돌 정 맞는다는 말처럼 깎여 나갈까 봐, 손해 볼까 봐 침묵하는 다수가 되는 거겠지.

투표로 선출되는 권력은 언제나 눈치 빠름을 미덕으로 삼는다.

김철민은 그렇지 않다.

“두 사람, 올라와요.”

양손을 뻗는다. 내력으로 끌어당기는 목적은 분명하다.

대한무림회와 전국무공인협회의 장들이 무력하게 책상 위로 끌려온다.

순식간에 기막을 친 연화존자가 미소로 묻는다. 어떠냐고.

“이 광경 어때요? 마음에들 드십니까?”

“당신 미친 거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이번엔 젊은 쪽이 기세가 있다. 1세대 MMA 프로 선수로 활약 후 무림에 투신, 전국무공인협회의 젊은 수장 자리를 꿰찬 이가 이를 악물고 비난한다.

대한무림회의 장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아무 말도 못 하지만.

“내가 미쳤으면 좀 더 화끈하게 미쳤겠지. 가령 당신네 단체 회원들이 동원되어 조직폭력배를 회장님으로 만든 주주총회라든가…….”

“닥쳐!”

그 좁은 책상 위에서 아웃사이드 태클마저 걸어오는 것이다.

자신을 밀어내면 계획을 재검토하겠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시도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황망한 이야기에 놀라 몸에 익은 동작이 나왔다고 봄이 옳다.

‘이놈 입을 막아야 한다!’

세상에 밝히기 어려운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떠드는 연화존자의 입을 그는 막고 싶었다. 어떻게 올라와 쟁취한 자리란 말인가? 치부를 이렇게 들킬 수는 없다.

문제는 연화존자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거지만.

“힘 좀 쓰시네?”

천근추의 수법을 응용하기라도 한 건지, 절묘하게 들어간 테클에도 연하존자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싱글렉으로 다리를 뽑아 중심을 무너뜨리려 들지만, 이 역시 실패.

되레 훤히 드러난 뒤통수를 잡혀 앞선 누군가와 같이 날아가며 기절한 게 전국무공인협회장이 했던 전부.

남은 건 이제 하나다.

“당신은 뭐 할 말 없나? 이 자리의 주도자로서 말이야.”

대한무림회 회장은 몸이 굳은 채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한다.

“할 말 없으면 말고, 어차피 댁들은 다 끝났으니까.”

하지만 연화존자는 시간을 주지 않아 그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안 무사할 게 있나?”

“당연하지. 내 뒤에 있는 분들이 누군지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대한무림회 회장의 말에 연화존자가 입을 모으며 웃는다. 그 꼴이 밉살스러웠던지, 회장은 이를 갈며 협박한다.

“오늘 일을 공론화시켜 평생 괴롭혀 주마. 내 뒤에 있는 분들과…….”

참으로 무력하게도.

“어디 한번 해 봐,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그는 연화존자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힘을, 그 난폭함과 사나움을.

“근데 그게 네가 처음 한 소리는 아니란 건 알고 있지?”

협회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연화존자가 회의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일어서지 못했다.

공청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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