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47화 (47/175)

#47화

마교지파 무극검문의 수장, 무극검마의 다섯 번째 제자인 현현검(顯現劍) 강준일은 대남 무력 도발이라는 어려운 일을 끝냈음에도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누르기 힘들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투입된 것도 그랬지만, GP 점거 이후 펼쳐지는 광경들이란 이 정통 강자존주의자의 마음에 통 들지 않는 것이다.

벌어지는 추태를 보고 있자니, 온몸에서 살심이 들끓어 참기 어렵다.

평소 점잖은 마공 수련자로 유명한 그를 이토록 폭력적인 충동으로 몰아가는 광경이란 바로 다음과 같다.

“어이, 남조선 동무. 말잃기증이라도 왔니? 뭐라도 말해 보라.”

“동무, 이거 우리가 북조선에서 왔다고 업신여기는 거 아닌가?”

거력패부의 하급 제자 두 명이 사로잡힌 남쪽 군인들을 겁박하며 희롱한다.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갈아 온 손도끼를 케이블 타이에 묶인 젊은 군인들 얼굴에 들이댔다 뺐다 하며 자기들끼리 낄낄대고 있는 걸 보며, 현현검은 뭐라 형언키 어려운 분노를 느낀다.

그것은 무극검마의 엄한 가르침 아래 마교도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란 그에게 있어 보기 힘든 참상.

남조선에 대한 무력 도발이 이제 막 성공한 차였다. 철저하게 준비한 기만전술로 남조선 군인들을 속인 뒤, 일거에 짓쳐 들어가 이룬 쾌거.

들불이 난 척 위장하여 인력 이동을 가린 뒤, 소등 시간을 기다려서는 순식간에 내력을 퍼트려 지뢰의 위치를 파악하고 곧장 GP로 직행, 점거 후 포로 획득까지.

이 작전에서 현현검은 내력을 퍼트리는 작업을 담당했다. 퍼트린 내력의 반향으로 지뢰 매설 여부를 구분하는 건, 거력패부의 광혼공으로는 무리가 있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작전 시작과 동시에 거력패부 측에서 지뢰를 모두 터트렸을 때, 절제를 잃을 뻔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내공의 양이 필요한 덕에 사질들의 격체전력까지 받아서 작업을 해냈으나, 그것을 무로 돌려 버리는 짓거리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지.

저것들이 꼴보기 싫은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일차원적 욕망에 몸을 맡긴 짐승 같은 것들.

어쩌면 짐승만도 못할지도.

“그만하라.”

현현검의 제지에 거력패부 제자들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기껏 재미 좀 보겠다는데 아까부터 사사건건 왜 시비냐는 불만이 얼굴에 가득해, 그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든다.

감히 약자들 주제에 누구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인지. 위아래라고는 전혀 없는 무도한 것들.

이게 다 천마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갱충머리없이 굴지 말고 나가 있으라.”

아무리 지파가 다르다지만 엄연한 교의 상급자에게 항명을 시도하는 저것들의 목을 칠까, 현현검은 고민한다. 마교의 율법에 의하면 즉참을 해도 모자란 일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천마신교가 몰락한, 정확히는 무극검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약해진 요즘 시대엔 실현되기 어려운 상상. 검 자루에 손을 올려 은근한 위협을 하는 게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국 버티던 거력패부의 제자들이 기세에서 밀렸고, 분에 찬 몸짓으로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린다.

현현검이 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 점거하자마자 바로 목을 그어 버린 남한 군인의 시체 한 구를 남겨 둔 채로.

그렇게 어둡고 답답한 GP 지하에서 갈 곳을 잃은 마교도는 피 냄새를 맡으며 고민한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감내해야 하는가?

‘…못 해 먹을 짓이군.’

이게 다 천마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한다.

천마신교의 영광은 홍혈천마의 죽음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수백 년에 가까운 봉문을 끝내고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하며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냉전과 함께 축적했던 마교의 힘은 천마격살 이후 완전히 흩어졌다.

이른바 ‘천마내전’이라 불리는 재난을 겪었기 때문으로, 무극검문도 이 사태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천마내전의 여파와 냉전 해체의 결과로 세력 기반을 모두 잃은 무극검문은 생존을 위해 북한에 의탁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더 이상 예전의 방식인 목숨 걸고 무공에만 매진하는 방식을 유지할 수 없었음을 시사하는 바.

무극검문은 소련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며 살아남았다. 목숨 같은 무공을 남파 간첩 파견 등에 제공한 것은 물론이요, 마교지파 중에서도 손꼽히는 정순한 내공심법으로 백두혈통 일가의 건강관리를 전폭적으로 전담하는 등.

검의 끝을 보고자 한다는 문파치고는 별로 만족스러운 처지는 아니었다 하겠다.

하여 강자존주의자로서의 취향에 반하는 일에 동원되곤 하는 무극검문의 제자들은 상상하곤 한다.

천마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와 같은 문도들의 궁금증에도 천마격살의 그날에 대해 스승, 무극검마가 좀처럼 입을 여는 일은 없다.

다만 현현검이 태어나기도 전의 사건을 떠올리며, 볼과 귀를 가로지르는 깊게 패인 상처를 쓰다듬는 게 보이는 행동의 전부.

그 침묵이야말로 무극검문의 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스승의 이번 외유만 해도 그렇다.

‘그깟 약이나 파는 것들을 달래는 일이 스승님께서 직접 가실 일인가?’

현현검의 스승인 무극검마는 얼마 전 국경을 넘어 로시야를 친히 방문해야 했다. 정찰총국에서 직접 관리하던 남쪽 조직이 무너지며 생긴 살령지문과의 분쟁을 중재하라는, 수령의 지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제자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분통이 터질 일이다.

전당, 전군, 전민이 약에 빠진 판국이라지만,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가 체제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된다고 하지만. 감히 무극검마에게, 현대사의 중요한 무대마다 홍혈천마의 왼편에 서 있던 초고수에게 어떻게 그따위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한때 같은 마교에 속했다고는 하나 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문주조차 어디 있는지 모를, 찌끄래기나 다름없는 버러지들이 아닌가?

역시 현현검은 그 더러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그만 그런 것도 아니고, 무극검문 전체가 늘 그래 왔다. 당의 다른 간부들처럼 적극적으로 약을 탐닉하는 거력패부와 유용하게 사용하는 환희락락궁과는 다르다.

그래서 더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거력패부의 제자라는 정찰총국 대좌는 결국.

약팔이였다.

그런 놈을 핑계로 남쪽과의 군사적 충돌마저 불사치 않다니, 미친 게지.

평소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북한의 지도부는 미쳤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나라와 불화하는 이 비정상 국가의 색이 좀 이상한 빨갱이들은 자신들만의 작은 성을, 별 가치도 없이 가진 게 이것뿐이라 필사적으로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무모한 짓이든 불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먹히는 것만 봐도 약해 빠진 세상과 상종할 수 없다는 마교도다운 생각이 들지만서도…….

반동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무극검문의 영락한 신세, 제자와 돈줄을 잃었다는 핑계로 지파와 군부의 결집을 유도하려는 현 거력패부의 문주 개산대부(開山大斧)의 흉포함과 음험함, 이를 은근히 부추겨 편승하며 체제 수호에 나서는 젊은 수령.

거기에 살령지문과 협상을 하러 떠난 스승과 위기에 처한 운명에 대한 고민까지.

하지만 생각으로 엮인 그물이 결말이라는 대어를 낚는 일은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답이 없는 문제들은 늘 하던 대로 중간에 끝이 난다.

“동무, 좀 가 보셔야겠소.”

아까 나간 놈들이 제 놈들 사형에게 적의를 불어넣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숨기고 있는 다른 의도 때문인지, 말을 전하는 본새가 영 탐탁치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변화하는 세상 속에 더 이상 강자가 아닌 강자존주의자는 순응해야 한다. 올지, 안 올지 모를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저치들이나 치료해 놓으라.”

“…곧 죽을 놈들을 무슨.”

여전히 피를 흘리며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남쪽 군인들을 치료해 주라 하지만 이죽거리는 모양새가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하긴, 어디 남 챙길 처지이던가?

멀리 가지 않는다.

“강 동무, 거 사람이 왜 이리 까다롭습니까?”

커다란 도끼를 책상에 기댄 이번 일의 총책임자, 조선인민군 중좌 혈염마(血炎魔) 성현구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현현검을 맞이한다.

얼굴에 잔뜩 튄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다. 옆에는 토막 난 채 쓰러진 군인의 시신이 몇 누워 있다.

역겨움이 치솟는다.

‘다 죽였구나, 짐승 같은 놈.’

그렇지만 혐오의 속내와 달리 현현검의 입은 아무 말도 토해 내지 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혈염마가 비록 인민군 중좌에 불과하나 그건 단순히 많은 사고, 그러니까 타고난 살인광이 마공을 익혔을 때의 결과를 여실히 보여 주는 무차별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일 뿐이었다.

마공에 반쯤 먹혀 아무나 죽이고 다니지 않았다면, 무려 개산대부의 둘째 가는 직전제자인 그가 고작 인민군 중좌 따위에 머물 리 없었다. 즉, 사회적 서열이란 측면에서 혈염마가 더 높다.

두 번째 이유는 이와 연동된다.

“내 하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식으로 생사비무 하면 되지 않습니까?”

혈염마가 그보다 강하다.

최후의 강자존주의 문파라는 무극검문 소속답게 현현검은 이를 여지없이 인정한다.

“…….”

하여 억지로 끌려온 검객에겐 오직 어쩔 수 없는 침묵만이 가능했다.

“하하하. 그러지 말고 기분 푸시오. 저 미제 앞잡이 남조선 반동들을 제압했는데, 기뻐야지요. 우리끼리 싸워 뭐 하겠습니까?”

혈염마는 아예 제 도끼를 한 손으로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다가와 친근한 척 현현검의 어깨를 두드린다.

진심이라곤 하나 없이.

“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들을 보시오, 동무. 이게 다 자본주의 악성종양에 물든 결과 아니오? 위대한 수령 동무의 영도 아래 일치단결하여 강성대국을 이룩한 우리 공화국 용사들하고는 사뭇 다른 약한 모습 아니냐, 이 말이오.”

붉게 물든 눈동자가 현현검을 직시한다.

혈염마는 늘 저런 눈으로 그를 보곤 했다. 살심 가득한 눈으로 웃으며 보았지.

손이 근질거린다. 언제나 자각하는 안 좋은 버릇이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긴장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칼을 확인하는 건.

아무리 무위가 올라도 고쳐지지 않는 이 버릇이 고난의 행군 때 부모를 아사로 잃은 부채감일 것이라 짐작한다.

“…….”

현현검은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이 함정임을 알고 있다.

갑작스러운 명령서를 봤을 때 익히 짐작했다. 거력패부와 정찰총국이 하필 지금 일을 벌인 것도 모자라 자신을 콕 찝어 지목한 건, 이번 사태를 이용, 무극검문의 세를 꺾어 버리겠다는 의지 표명이란 걸.

스승인 무극검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총애를 받던 제자 하나를 남조선의 총구 앞으로 끌고 간 것엔, 그런 음모가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거력패부는 그리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영도자는 언제나 불패의 초고수, 무극검마를 거슬려 했다.

북한-마교의 최고수는 누가 뭐래도 무극검마였지만, 세력 면에서 보자면 정찰총국을 쥐고 있는 거력패부와 보위국을 중심으로 하는 환희락락궁과는 비교 자체가 무안할 지경.

그럼에도 무너진 마교의 늙은 고수는 언제나 최소한으로만 협조했다. 그것도 모자라 입 바른 말을 잘했다.

인민을 생각해야 한다. 인민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어야 한다. 이건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형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젊은 수령에게, 다른 마교지파들의 눈에 북한-마교가 아닌 소비에트-마교의 고수가 얼마나 보기 싫었을 것인가?

“동무, 무슨 할 말 없소?”

“…….”

없다. 무인은 언제나 무공으로 말하는 법이며, 삶의 고통은 오직 그로써만 극복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만 떠올린다.

이 검이 아니었다면 천마격살 이후의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없었을 거라던 노검객의 말을 상기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혈염마의 눈이 광기로 물든다. 같잖은 연극을 때려친다. 굼벵이 같은 남조선이 움직이기 전, 여기 온 목적 중 하나를 실현하려 한다.

이에 대항하는 현현검의 손이 하얗게 질린다. 주변에 즐비한 거력패부 제자들의 눈빛이 흉흉하다.

하나 이 대결은 장소부터 잘못되었다.

아주 시작부터 말이다.

-휘이이이이.

길고 우렁찬 휘파람 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민통선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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