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둠과 긴장만이 가득했던 비무장지대를 떨쳐 울리는 휘파람. 그 안에 담긴 거대한 경력이 천지사방을 울려 오니, 혈염마와 현현검 사이의 긴장감은 늦봄에 내린 싸리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
코앞에서 서로의 목을 노리던 악우보다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 휘파람을 불어 오는 정체불명의 고수가 더 훨씬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성이 아닌 무림인의 감이 그렇다고 소리친다. 죽는다고, 정말 죽어 버릴 거라고.
살기를 접고 급하게 내력의 방향을 틀어야 될 정도였던 것이니, 전율스러운 내력으로 충만한 휘파람은 무공을 익힌 모든 이들의 피부를 저릿하게 만들어 아예 속을 뒤집어 버린다.
버틸 능력 없는 자들에겐 악몽 같은 고통이었다.
“크허억…….”
“켁, 켁켁.”
내리찍는 휘파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 실패한 자들이 나뒹굴며 연신 구토를 해댄다. 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에 선발됐을 만큼 내로라하는 마교의 고수들조차 생전 처음 겪는 상황.
똑바로 버티는 자는 몇 없다. 혈염마와 현현검 정도 되는 고수들 정도나 가능했을까? 하나 그들조차 전력으로 내공을 돌려도 몸이 굳어 굼뜬 게 전부.
이것이 어찌 휘파람만으로 가능한 일인지 자문해 보지만, 답은 구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혈염마는 끊이지 않는, 오로지 점점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오는 휘파람에 기를 쓰고 대항하며 아연해진다. 거력패부에 입문한 이후로 한시도 잊어 본 적 없는 마공의 후유증과 끝도 없이 들이켠 술과 약물로 인한 광기를 순간 잊을 정도로.
하지만 곤혹스러운, 미처 씻어 내지 못한 살심에 어지러운 머리로도 누가 왔는지 짐작하는 것만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화존자! 그자가 틀림없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리 없다고 예상했건만…….’
본래의 계획에서 이와 같은 빠른 곤란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만전술로 남조선의 잘못된 반응을 유도한 뒤 비무장지대의 GP를 기습 점거 하는 것. 이것은 최근 국가무공원이란 조직을 신설하며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공화국의 자금줄을 끊은 남조선에 대한 보복으로 꽤나 효율적이고 적절해 보이기만 했다.
오늘의 무력 도발을 통해 남쪽에서 얻어 낼 건 오직 하나.
남조선 정치권에 대한 강한 충격. 그로 인한 국가무공원의 축소 혹은 폐지, 그에 준하는 압력을 공화국 측은 원했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로 보였고, 거의 성공하기까지 했지.
연화존자, 저자가 이렇게 다가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현현검, 저 작자만 죽이고 이곳을 폭파시킨 뒤 빠져나가기만 하면 끝날 일인데!’
그러고 무사히 복귀해 공화국 영웅의 칭호만 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랬다면 남조선은 여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언제나 그랬다. 책임 소재로 싸우는 꼴이 제법 볼 만했다. 한 대 얻어맞아 놓고는 내부의 서로를 찌르느라 바쁜 그 꼬락서니란.
제 이익에 눈이 먼 이들에게 공화국에 책임을 물을 능력이 있을 리 없다. 투표로 선출되는 남조선 정치인들은 이와 같은 도발에 진저리를 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이지 않던가?
그에 곁들여 대남성명을 발표해 국가무공원을 비난하면 도발의 주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정찰총국 내부에선 자신하기까지 했지.
남쪽 군인 중 일부를 죽이고, 운 좋은 일부를 돌려보낸다면 남조선 사회는 극한의 분열과 혼란을 맞이할 것이었다.
선례는 무수히 많다. 흐지부지된 결론만 남아 어영부영 넘어간 일들은 한둘이 아니다.
참으로 자본주의적 반동답게 언제나 느리고, 겁쟁이 같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게 전부여서 보복은커녕 빠른 대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확전을 경계하는 미국의 만류가 늘 있기도 한 것이다.
거력패부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친 판문점 도끼 사건 때조차 그랬고, 최근 몇 년 전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 때조차 그랬다.
장기간 미국에 억류되었다가 혼수상태로 돌아간 지 엿새 만에 죽은 미국 대학생 때도,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공화국의 목줄을 죄는 저 가증스러운 대북 제제, 그 이상의 것은 없더라.
그러니 남조선 반동분자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동시에 체제 안정을 꾀하고자 하는 건, 거력패부와 최고 지도자의 이해에 꼭 들어맞기도 한 일.
소비에트의 멸망과 함께 죽어 이제는 뼈조차 남지 않았을 홍혈천마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주제 모르게 설쳐 대는 무극검마의 수족을 끊고, 남조선과의 충돌 과정으로 돌리는 건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 아니었는지?
여기에 최근 신설된 남조선의 무림 전력, 가령 연화존자 같은 이들이 빠르게 움직인다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공화국이 남측 GP를 점령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남조선 정치인들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 리 없는데.’
교활한 살인마답게 혈염마는 영활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린다. 상황이 어찌 이리되었는가?
연화존자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다. 그래. 그가 수십 년 전, 보복 공격에 나서 평양 인근까지 침투했다는 믿기 힘든 사실마저 이번 작전 전에 들었다.
그럼에도 연화존자의 출현은 이해할 수 없이 빠른 결론이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기민했다고?
하나 마교도의 몰이해는 소용도 없고, 상관도 없다. 이제 귀청이 떨어지도록 가까이서 들리는 휘파람의 주인공, 연화존자가 청와대의 높으신 분들이 내릴 결단을 기다리지 못해 다 무시하고 진입했다는 걸, 북한의 마교도들이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단지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는 후폭풍이 두렵다며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연화존자를 막으려는 시도가 있긴 있었다. 윗선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며 주로 철책선을 지키던 군 관계자들이 그랬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돌아온 대한민국 최고수는 자신을 막는 모든 자들을 밀치고, 따돌리고, 무시하고, 꾸짖은 뒤 경공을 펼쳐 철책선을 넘었다.
대한민국의 군인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던 중 마교도의 손에 잡혔다. 어찌 그 꼴을 가만 두고 볼 것인가?
그런 무력함을 맛보자고 돌아온 천하제일인이 아니다.
-쾅! 쾅! 쾅!
부수고 돌입하는 거침없는 태도에서부터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모를 수 없다. 철조망을 손으로 뜯고, 벽을 발로 차며 흙먼지와 함께 나타난 연화존자의 영과 육이 살기와 노여움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허리춤에는 얼마 전 되찾은 칼을 차고 왔지만 꺼내지 않고 맨손, 맨발로 그는 왔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이란 순수한 분노, 그 자체.
사나운 무지개를 흩뿌리며 천마 살해자는 걸어온다. 느리지만 압도적인 사형선고가 그곳에 있다.
“…….”
입을 열진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말없이 오연하게 내려다본다. 실제의 눈높이는 비슷할지 몰라도 장내의 마교도들은 연화존자의 높음을 실감한다.
느낄 수밖에 없다. 연화존자는 그들보다 위에 있다. 부인할 수 없고,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 연화존자의 빠르게 훑는 눈길이 잠시 멈춘 곳은, 오직 한 곳. 대한민국 군복을 입고 죽은 젊은이의 시체. 억울함과 공포에 질린 눈동자. 혈염마의 볼에 튀어 굳어 가는 붉은 피.
역한 토사물 냄새 사이로 희미한 피 냄새를 맡으며 연화존자는 덤덤히 말한다.
“네놈들은 오늘 다 죽는다.”
그의 덤덤한 한마디에 마교도들은 몸이 굳는다.
“약속한다. 오늘의 역사에서 너희의 생존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바로 이 내가. 빌어먹을 빨갱이 새끼들아.”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선고하는 연화존자의 선언에 대항하는 건, 장내 마교도 중 최고수.
“개소리 말라, 간나 새끼야!”
혈염마의 몸에서 내공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얼마 전 비슷한 처지였던 누군가가 했던 것처럼 연혼마공이다.
그것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연화존자를 보고 다시금 확신했다. 선천진기, 그 일부를 희생하지 않고는 연화존자가 쳐 놓은 내력의 그물을 비껴 낼 수 없으리라는 건 차라리 예지에 가까운 감각이었던 바.
수명을 태워 가며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순식간에 나온다.
망설일 시간조차 없다는 사실 역시도.
“크아아악!”
다만 연화신공, 오행무극도의 압박에서 벗어나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혈염마가 이전의 누군가, 리인순 대좌와 달랐던 건 그의 무위가 보다 높고 고강하다는 사실이다.
몸이 커지고, 핏줄이 툭툭 올라오고, 손톱과 발톱이 길어졌음에도 한 줄기 이성을 유지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다들 덤벼들라!”
그를 혈염마라고 불리게 한 거력패부의 성명절기 중 하나인 혈화만개(血花滿開)의 초식을 펴쳐 다른 이들에게 뻗어 있는 내기의 압박을 걷어 내며, 그는 다급하게 외친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혼자서는 감당 못할 괴물 같은 작자가 그들 앞에 있다는 거야, 장내의 모두가 알고 있으니.
마교도들이 비틀대며 겨우 일어나 억눌렸던 내공을 끌어올린다. 싸움을 준비한다.
-쩡!
그사이 혈염마는 연혼마공의 기운을 잔뜩 실은 자신의 대부(大斧)를 연화존자의 이마를 향해 찍어 내렸다.
그 한 수로 죽거나, 다칠 거라곤 기대도 않았다. 그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다른 이들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나름 최선의 공격을 감행한 것이 전부.
“흥.”
이에 연화존자는 한 손으로 도끼날을 잡는 믿기 힘든 신위를 보인다.
그러니 따져 보자면, 역시 덤벼들라는 혈염마의 외침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었다.
어차피 아무 소용없었을 테니까.
“고작 이 정도로 세상을 우습게 봤나?”
여전히 사나웠던 무지개가 찬란하다.
심판은 어둠을 쫓아내는 홍예와 온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 세상 무서운 줄 몰랐나, 마교도? 이건 너무 하찮아서…화도 나질 않는군.”
“크흐으으윽.”
북한-마교 7위 고수인 혈염마는 연화존자의 한 손을 감당하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만이 찾아온다. 술과 여자, 마약의 쾌락에 몸을 맡기지 말걸. 타고난 재능에 기대기만 하지 말걸. 좀 더 수련에 힘쓰고, 이와 같은 날을 대비할걸.
허망하고 많이 늦은 자책 속에서 혈염마는 도끼를 빼내기 위해 부들부들 힘을 쓰지만 도끼날을 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내 연화존자는 용을 쓰는 혈염마를 향해 조용히 속삭인다.
“난 마교도 놈들이 싫어. 그놈의 강자존, 천마, 별로 강하지도 않은 것들이 매일 강자존을 이야기하는 게 같잖고 우습다고. 그래서 정말 싫은데… 그래도 이렇게 손을 섞을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낀다. 왜인지 아나?”
눈가의 웃음이 전혀 웃음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저것 따질 게 많은 세상에서, 네놈들만큼은 뒷일 생각 안 하고 패 죽여도 상관없더라고.”
이마와 눈썹 위의 땀이 혈염마의 눈동자로 흐른다. 평소의 광기와 살인에 대한 갈망이 아닌, 두려움과 공포로 물든 가득한 눈 위로.
“쉽게 죽을 생각은 말아라.”
잡고 있던 도끼날을 당겨 혈염마의 몸을 가까이 한 연화존자는 다른 손을 움직여 어깨를 친다. 두툼하고 두꺼운 팔뚝이 그 한 수에 거짓말처럼, 보고도 믿기 힘들게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피가 분수처럼 솟고, 연혼마공으로도 막지 못하는 고통이 비명으로 높아진다.
정신을 차린 다른 마교도들은 비명을 배경 삼아 달려든다.
하나같이 연혼마공을 끌어올린 채였다. 순순한 항복 따위는 없다. 저열할지언정 그들 또한 마교의 후예.
투항 따위 생각조차 않는다.
물론 연화존자 또한 그랬다. 받아 줄 생각 같은 건 없었지.
“와라, 벌레 같은 놈들아.”
그 말처럼 마교도들은, 거력패부의 제자들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손도끼를 저돌적으로 휘두르며 몸을 낮추고, 뛰어올랐다. 눈동자가 사라진 붉은 눈이 방금 전의 공포를 잊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연화존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끼도 놓아 버린 채 입으로 물려고 드는 놈을 발로 차 버린 뒤, 위에서 덮쳐 오는 놈을 거꾸로 바닥에 꽂아 버린다. 그러곤 양손을 교차하여 좌우로 흔드니, 마교도들이 서로 엉켜 부딪치며 머리가 깨지고, 피를 토한다.
한 합이었다. 거력패부의 제자들은 연화존자의 시험을 견뎌 내지 못했다.
“너, 무극검문이군.”
이제 멀쩡한 마교도는 하나, 현현검.
홀로 무사한 그의 손이 하얗게 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