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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49화 (49/175)

#49화

혈염마를 비롯한 거력패부의 제자들이 연화존자의 손길에 속절없이 쓰러지는 걸 보며, 현현검은 고민했다.

한 손 보태 싸울 것인가? 아니면 희생을 발판 삼아 암습을 노릴 것인가?

도주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자존주의자로서의 정정당당함은 둘째치고 저만한 고수를 상대로 도망갈 수 있으리란 기대는 망상에 가깝다.

그렇다고 거력패부를 돕자니,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뭐가 되었든 결론은 나야 한다.

오래 망설일 수는 없다. 그 또한 그럴 시간이 없다. 연화존자는 순식간에 거력패부를 정리했고, 남은 건 다치긴 했지만 싸울 수 있는 하나.

“크흐으… 가만두지 않겠다!”

팔이 잘린 고통을 이겨 내고 혈염마는 덤벼든다. 그것은 놀라운 투지, 흉폭한 거력패부다운 호전적 태도라 방금 전까지 그를 죽이고 싶어 하던 현현검조차 이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피를 줄줄 흘리며 하나 남은 손에 도끼를 쥐고 덤벼드는 저자를, 검을 뽑아 지원할 만큼 말이다.

연화존자와 홀로 싸운다는 선택지는 차마 고를 수 없었음이다.

“사이 좋은 마교도 친구들이었군.”

연화존자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마교의 고수는 힘을 합친다. 그것밖엔 이 사태를 벗어날 방법이 없기에 각자의 사정은 접어 둔다.

이어 혈염마의 도끼에 맺힌 붉은 강기는 그의 상처를 상징하듯 불안정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위험한 기운을 풍긴다. 연혼마공으로 뽑아 낸 내력은 폭주하며 타올라 연화존자와 부딪쳐 주변을 부순다.

그에 화답하듯 현현검의 검푸른 강기가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혈염마의 것과는 다른, 무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쏘아지듯 연화존자의 요혈을 노리며 호심탐탐 기회를 엿본다.

양쪽에서 협공한다. 북한-마교의 역사 속 늘 앙숙이던 두 지파의 보기 드문 합공이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연화존자는 여전히 적수공권. 허리춤의 검을 뽑지 않는다.

뽑을 생각이 없다, 필요가 없기에.

-쿵!

“내가 보고 듣기론 분명 아니었는데 말이야.”

도끼와 검이 맨손과 부딪쳤음에도 쇠끼리 부딪친 묵직한 소음이 일어난다. 연화존자의 양손에 맺힌 수강이 거력패부와 무극검문을 능히 견뎌 건재함을 과시하니, 다시금 퍼지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암담함.

혈염마의 붉음과는 다른, 어딘지 맑은 빛깔의 붉은 줄기가 가장 바깥을 이루는 오색빛깔. 그것은 무지갯빛을 닮은 유형화된 내공이다.

내력의 성질이 각기 다름을 의미하는 모습에, 현현검은 의문마저 든다. 사람이 어찌 저런 것을 익힐 수 있는가?

무림의 기사라 불러도 마땅한 일이지만, 고통과 분노로 눈이 돌아가 버린 혈염마는 기이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캬하아악!”

분노로 눈이 돌아가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른다. 분명 긴 세월 수련했을 테지만 그 또한 현대의 무림인. 초식보단 내력을 중시하는 경향성 속에서 살아가는 수련자였고, 심지어 마교도였다.

지금처럼 극한에 달한 상태에선 힘만 넘치는 파괴적인 몸짓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그리하여 예고된 파탄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혈염마의 이성이 무너져 내린다. 생사를 도외시하고 본능만으로 덤벼든다. 연화존자의 손에 허벅지가 터지고, 갈비뼈가 부러진다. 다만 점점 크기를 불려 가는 연혼마공의 마기에 의지하며 쉽게 쓰러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먹히지 않는데. 튕겨 나오거나, 연신 허공을 가르기만 하는데.

결국 두 고수의 협공에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여유로운 연화존자는 혈염마를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형형색색의 수강이 맺힌 두 손과 두 발이 현현검을 무시한 채 연신 혈염마를 두드리는 걸 보면 의도를 알 수 있는 일.

혈염마의 팔을 감아 부러뜨리고, 종아리를 차 뼈를 부러뜨리는 데 열중하는 모습에, 현현검은 거둘 수 없는 치욕감을 느낀다.

자신의 공격은 흘려 내며 밀어내는 게 전부여서 저쪽에서 공세를 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무시.

무극검문의 검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지금도 보라. 현현검의 검이 연화존자의 목을 매섭게 노리건만, 막기는커녕 고개만 까딱하여 피하는걸. 검푸른 검강의 끝이 겨우 닿지만 불꽃을 튀며 미끄러지기까지 한다. 극에 달한 호신강기가 육신을 든든히 보호한다.

부딪쳐 흩날리는 불꽃이 조소하는 것도 같다. 그것이 보일 수 있는 전부냐고. 너희가 자랑하는 강자존의 법칙이냐고.

치밀어 오르는 무력감에 현현검은 이를 악물고 내기를 모아 덤벼들지만, 그런 그의 코앞에 다가오는 건 혈염마의 등.

혈염마의 몸통을 돌린 연화존자의 손이 그의 남은 팔뚝을 잡았다. 덥썩 잡았고, 그대로 손가락에 힘을 줘 파고든다.

육신을 파괴하는 강력한 한 수였다. 비명부터 벌써 다르지 않나?

“아아악!”

버티지 못한 혈염마가 몸을 뒤틀며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이성이 날아갔음에도 어쩌지 못한 고통의 표현.

본능적으로 보법을 밟아 뒤로 빠지려고 했지만, 어림없다. 어느새 연화존자의 발이 혈염마의 발등을 꽉 밟아 부러뜨리고는 고정시켜 발을 묶는다.

이에 다급한 마음의 현현검이 옆으로 돌며 연화존자를 노리지만, 아까도 먹히지 않은 공격이 이번이라고 박힐 것인가?

전혀 소용이 없다. 혈염마를 밟은 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리는 바람에 오히려 혈염마의 어깨에 길고 깊은 상처만 남긴다.

다른 때라면 오히려 성공했음을 반겼을 공격이었겠다만은…….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그러기 힘들다.

“컥!”

결국 연화존자의 손에 잡힌 혈염마의 남은 팔이 찢어지며 비틀, 정신을 잃는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와 엉클어진 진기의 흐름을 폭력적이기로 유명한 마교의 살인마조차 버티기 힘들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진정 하나.

“혹시 남길 말 있나, 무극검문의 제자?”

손과 몸에 묻은 피를 삼매진화로 태워 버린 연화존자가 묘한 시선으로 현현검을 본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기묘함을 느낀다. 마치 옛일을 상기하는 듯한 얼굴, 과거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는 듯한 그 얼굴에 현현검은 긴장되는 순간 속에서도 몇 마디 질문이 입가를 맴돈다.

그러나 침묵한다.

오직 검으로 말하라는 가르침에, 무극검마의 제자는 이번에도 충실한다.

“…좋은 스승에게 배웠군.”

다만 피식 웃는 연화존자를 보며 다짐한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저 오만한 자가 검을 뽑지 않고는 베길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그것 하나만은 반드시 이루겠노라, 현현검은 결심한다.

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강의 초식을 준비한다. 비록 사 성밖에 이루지 못해 제대로 쓰지 못하는 초식이지만, 이거라면 연화존자의 저 거만한 표정에 당황이란 걸 새길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무극심검(無極心劍) 파천(破天)’

일곱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무극검문 유일의 검결이자 성명절기인 무극심검, 그 다섯 번째 초식을 현현검은 준비했다.

연화존자의 어디 해볼 테면 해 보라는 얼굴에 분통이 터지기도 하지만, 잠시 후 일그러질 것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마저 뛴다. 결국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강자존주의자.

강함을 동경하는 미친 자 중 하나는 죽음과 절망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 순간에서조차 희열을 찾는다.

그로써 뻗는다.

“흡……!”

완벽하지 않은 성취로 인해 잠시의 시간과 그리 선명하지 않은 선을 그리긴 했지만, 현현검이 펼친 초식은 적어도 이름에 걸맞는 위력을 보인다.

고작 한 번의 칼질이었음에도 주변을 일직선으로 나눈다. 연화존자의 난입과 이후의 격돌로 너덜너덜해진 건물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만큼, 크고 강력하게.

하나 거기까지.

“다했나?”

아무렇지 않은 연화존자의 모습이 현현검에겐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그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보라, 그 와중에 검집째 휘둘러 쓰러진 남조선 군인의 생존자를 챙기는 저 모습을.

이번 침묵은 의도되지 않았다.

“제법 괜찮았어. 제대로 배웠네.”

격전으로 약해졌던 벽이 모조리 날아갈 정도였건만, 연화존자는 너무도 무사한 모습으로 서 있다.

“좀 더 크면 어떤 검객으로 자랄지 기대가 되지만… 애석하군, 여기서 죽어야 하는 처지라니.”

여전히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는 그 깔끔함이, 현현검에겐 암담할 뿐이다.

“그래도 잘 싸웠으니, 죽기 전에 한 가지만 알려 주지.”

“…무슨?”

모든 걸 쏟아붓고 수분마저 말라 버린 입이 힘겹게 반문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더는 입을 다물기 힘들다.

그래도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치 못했다.

“네 스승이 펼친 그 초식도 날 어쩌지 못했다. 그러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네 스승도 받지 못한 인정을 너는 받았으니.”

“그, 그게 무슨 소리… 커헉.”

영문 모를 말에 전후 사정을 물으려던 현현검은 다음 순간, 땅으로 꺼진 듯 모습을 감췄다가 코앞에 나타난 연화존자의 손에 목이 잡힌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마교도. 네놈의 솜씨가 쓸 만하고 과거의 인연이 있어 시간을 연장했을 뿐.”

목숨 같던 검마저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저항해 보지만, 현현검 또한 안다. 결국 언젠가 와야 했던 죽음이 이 순간, 어제만 해도 몰랐던 오늘로써 도래했다는걸.

“죽어라.”

억울함이 치솟는다.

생각했던 스스로의 최후와 이 죽음은 다르다. 보다 미련 없이, 훨씬 수수하며 담담한 죽음을 현현검은 예상했었다.

다른 마교지파들의 우둔함과는 다른 품위를 갖고 자신이 죽을 줄 알았다. 이렇게 비루먹은 개처럼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켁켁거리며 숨이 끊기는 게 아니라.

그래서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 살아남아 더 숨 쉬고, 먹고, 수련하고 싶다.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한 것이며 인내하라던 그 말씀이.

그렇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 오직 어둠만이 찾아와 의식마저 흐려지던 그때, 거짓말처럼 들려오는 한 줄기 휘파람이 있었다.

-휘리리리.

어둠을 꿰뚫는 또 다른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앞서 연화존자가 보여 준 중후하고 압도적인 것과는 다른, 침묵하는 밤하늘을 찢으며 퍼져 오는 뾰족함이.

이에 목을 조여 오던 손이 멈춘다. 간신히 눈을 뜨니 귀를 기울인 연화존자의 표정이 새삼 선명하다.

남자답게 생긴 외모였다. 눈썹이 짙고 선이 굵다. 거기에 방금 전까지의 소동이 모두 거짓인 것처럼 깔끔하기까지 하여, 혼미한 정신 속에서 이게 꿈이 아닌가 했다.

죽기 직전의 마교도가 찾을 수 있는 건, 그러니까 이번에도 눈동자가 전부였다는 소리.

현현검은 연화존자의 눈에서 기대감과 강자의 광기를 찾았다.

“이런… 오, 이런.”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과 팔이 무겁고 힘겨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끝내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핫핫하하!”

다시금 천하를 울리는 웃음소리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든 순간, 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검이 연화존자의 얼굴에 내리꽂힌다.

천마도검은 그제서야 뽑힌다.

연화존자는 손에 쥐고 있던 마교도를 한쪽으로 집어던진 뒤, 허리춤의 천마도검을 뽑아 들어온 공격을 쳐 낸다. 검을 되찾은 뒤 처음 뽑은 것이다. 외형만큼이나 기억과 다른 가벼운 무게가 조금은 낯설고, 당황스럽다.

그렇지만 벼락처럼 날아온 무극검(無極劍)을 쳐 내는 건, 그 정도 감각으로도 충분했다.

튕겨져 나간 검이 빨려 들어가듯 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 다시 찔러 들어왔음에도 그랬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검강 속에서 연화존자는 웃었던 것이다. 좋아서, 아직 그가 긴장할 수 있는 무림이라서.

다만 입을 열 틈은 없다. 그의 양어깨를 노리는 무자비한 솜씨에 맞춰 오랜만에 잡은 검을 미친 듯이 뻗어야 했으니.

대화는 조금 미룬다.

고작 네 호흡 만에 수십 합이 오고 갔다.

오행무극도가 오랜만에 검강으로 위력을 뽐내고, 짙푸른 강기 또한 그에 맞춰 불을 뿜는다. 진정한 고수들의 대결, 세상 그 어떤 관측 장비로도 잡아낼 수 없는 싸움.

잠시 후 소강상태가 찾아왔을 때, 그제야 연화존자는 물을 수 있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갔다 왔길래, 제자 목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나?”

그 웃음기 어린 질문에 상대가 무쇠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무극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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