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50화 (50/175)

#50화

무극검마는 하얗게 센 짧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짧게 자른 하얀 수염이 거친, 긴 시간 떨쳐 온 위명이 어울리지 않는 지친 인상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움직임을 생각해 개량하긴 했지만 현대적이기보다는 고전적으로 보이는 검은 장포 차림의 마교 고수는 생각보다 깔끔한 모양새가 아니기까지 했다. 북한-마교가 가히 핵무기에 비견할 만하다며 세계에 자랑하는 초고수답지 않게 복장 곳곳, 여기저기 흙먼지가 묻었다.

방금 전의 격돌로 그리된 것 같지는 않았다. 흔적은 그보다 오래되었다. 마치 전력을 다해 뛰어 도착한 것과 같은 모양새.

연화존자는 그 숨겨진 사정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백두혈통의 지시에 공사가 다망해서, 애써 키운 제자가 죽을 자리로 가는 것도 모르던가? 저런, 모두가 같이 일해서, 같이 먹고산다는 빨갱이 소굴조차 능력 있는 사람은 쉴 틈이 없군그래? 북쪽 국경에서 여기까지 뛰어와야 했으니 말이야.”

연화존자의 기쁨 가득한 조롱의 말에도 무극검마는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이 침묵이, 연화존자를 보는 무극검마의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고 침묵하며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토록 행방이 궁금하던 천마 시해자를 비로소 만났는데.

삼십 년 만에 만난 천마격살의 주인공이다. 얼굴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가늠할 수 없는 경지 또한 그렇다.

기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손을 섞어 보니 확실하기까지 하다. 방금 전의 공방에서 느껴진 약간의 틀어짐이 있긴 했지만, 그조차 뚫고 들어갈 만한 틈이 아니더라.

저자는, 연화존자는 여전히 극강의 고수다.

“오랜만이군.”

“맞아. 우린 오랜만이야, 무극검마. 상처는 잘 아물었네.”

칼을 겨누며 하는 아무렇지 않은 말에 얼굴의 상처가 욱신거려 오지만, 쉽게 말을 하기엔 무극검마의 가슴에 남은 지난 세월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천마가 죽고 몸을 피해야 했던 도주의 날들, 천마내전 속 누구도 받아 주는 이가 없어 공격만 받다가, 결국 극동의 작은 독재자에게 몸을 맡긴 후 겪은 수난까지.

지난 세월의 모든 것이 여러 가지 감정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친다.

“긴 시간 동안 너를 찾아 헤맸다.”

천마의 죽음을 보고 있어야 했던 마교의 고수는 교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다스려야만 한다.

이 만남을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소비에트-마교의 고수는 그래야만 한다.

“어쩌면.”

비로소 열리는 입이 많이 힘겨워 보이는 이유다.

“연화존자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그대가 아닌가 싶었지. 얼굴을 보고도 긴가민가했지만, 내 짐작이 옳았던 모양이군.”

무극검마는 이죽대는 모습에 속지 않는다. 저자가 누군지 잘 안다.

홀연히 나타나 무지개 가득한 내력으로 천마의 목을 베고 마찬가지로 홀홀 떠나 버린 신비의 고수.

그가 다시 앞에 있음에, 검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짐작만 하지 말고 한번 내려오지 그랬나? 그랬으면 반갑게 맞이해 줬을 텐데.”

연화존자는 그러한 무극검마의 긴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 사이가 칼로 피를 씻을 사이이긴 하지만, 세월이 이리 지났는데 저승길 노자 정도는 챙겨 줄 수 있어. 나도 자네에게 미안한 게 있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북한으로 갔다는 소식에는 마음이 찔리더라고. 그때 내 칼에 맞지 않았다면 천마내전의 승자는 자네였단 걸 아네.”

피로 물든 설원을 회상한다. 주제를 모르고 덤벼들어 가장 먼저 죽은 만인도(萬人屠), 생애 첫 패배에도 미련 없이 웃으며 죽은 홍혈천마(紅血天魔)와 달리, 당시의 무극검마에게는 생의 의지가 있었다.

천마가 쓰러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어 그 시신을 가져가려 했던 걸 보면 말이다. 어쩔 줄 몰라 망설이다 겨우 도망이나 치는 게 전부였던 다른 마교도들과 달리, 무극검마에게는 충정과 자존심이란 게 있었지.

고작 두 수 만에 제압당해 이마와 옆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사라지는 일 없던 빛나는 무언가가 그때의 무극검마에겐 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하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천마의 시신을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연화존자의 위용에 놀라 겁에 질린 돼지들처럼 도망가던 다른 이들을 뒤로 한 채, 무극검마는 그렇게 빌었다.

천마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승자의 아량, 강자의 관용을 부디 베풀어 달라며 목을 겨눈 연화존자의 칼에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호소했다.

연화존자는 거기에 응했다. 이타적이거나, 관대해서 내린 승낙은 아니었다.

마교를 상대로 그런 말랑함을 발휘할 리 없다.

“천마의 시신을 두고 쟁탈전이 일어날 거라고 짐작했건만, 시간을 들여 조사해 보아도 그런 일은 없었더군. 내 수하들에게 잡혀 온 마교도 중에 꽤 고위급도 있었는데, 아예 행방조차 몰랐단 말이야?”

눈살을 찌푸린 채 묻는 것이다. 마교의 내분을 조장하고자 홍혈천마의 시신을 내어 주는 것도 모자라 무극검마마저 고이 보내 줬음에도,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음이 궁금해서.

그만큼 연화존자는 마교의 완전한 몰락을 원했었다. 대한민국을 떠나며 이루고자 했던 일이었었다.

그러기 위해 천마의 시신을 최대한 온존했다. 힘에 미친 마교도들이 홍혈천마의 시신에 남은 내력을 뽑아 내겠다며 싸우는 꼴을 보기 위해.

무극검마를 살려 보낸 것 역시 이러한 계획의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무릇 싸움판은 참여자가 많을수록 혼란한 법 아니겠나?

천마내전의 과정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새로운 천마가 탄생하는 불상사가 없게 하기 위해 흠집마저 곱게 내줬었는데 마교가 아직도 남았으니, 세상 참.

무극검마는 천마의 시신을 숨기고, 이를 내놓으라는 다른 지파들의 요구를 피해 북한으로 몸을 숨겼다. 망해 버린 천마의 자리보다 무극검문이 들고 올 현금성 자산과 무공, 아울러 소비에트-마교의 대표적인 고수를 영입한다는 대외적 위신에 관심이 많던 독재자는 이를 승낙했지.

하니 오래된 궁금증이라 하겠다.

대답 들을 길이 요원해서 그렇지.

“우리가 잡담으로 시간을 보낼 사이는 아닌 것 같네.”

무극검마는 답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 채 검을 세운다.

“그게 대답이란 말이지.”

연화존자는 픽 웃는다. 떠나간 미련을 붙잡지 않는다.

그래, 어차피 지난 일이다. 오늘의 김철민이 예전의 김철민이 아니듯, 천마를 잃고 몰락한 마교 역시 예전의 마교가 아니다.

이제 와서 천마의 시신이 어디 갔는지 알아 무얼 하겠는가? 손에 넣으면 쓸 일이 있기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다.

당장 이룰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문답무용. 나도 그거 좋아해.”

천마의 목을 베고 오랜만에 돌아온 검을 힘 있게 쥔다.

멀리서의 소란이 두 고수의 귀에 들어온다. 남쪽은 물론이고 북쪽 철책선에서도 무언가 분주하여 시끄럽다. 고함 소리, 엔진 소리에 섞여 오는 희미한 화약과 긴장의 냄새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삼십여 년 만에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눈 이 순간.

끝내지 못한 승부를 낼 순간이 왔다. 선공은, 무극검마의 몫이었다.

무극검마는 상체를 움직이지 않고 지면을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필시 부자연스러워야 할 움직임이 뜻밖에 묘하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검을 찌르는 동작조차 그랬다. 예비 동작도, 살기도 없는 무심한 찌르기란.

“무극심검이 경지에 이르렀구나! 하하하!”

연화존자는 무극검마가 무공의 대성을 앞두었음을 깨닫고 즐거워 호탕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손을 섞어도 심심하지 않으리라는 기쁨이었다. 가장 가치 있는 적은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적이란 걸 김철민은 잘 안다.

최선을 다해도 될 상대가 나타났으니, 무림인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이 감정에 화답하듯 무지갯빛 내력이 연화존자의 전신에서 폭발한다.

미간까지 다가온 무극검을 쳐 낸다. 단순히 걷어 내는 것을 넘어 아예 부숴 버릴 기세의 강하고, 빠른 검격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무극검마가 크게 휘청이며 뒤로 빠진다. 자칫 무너질 뻔하기까지 했다. 찰나의 순간, 검과 함께 온몸을 옭아매려던 연화신공의 내력에서 겨우 몸을 빼며 진땀을 흘린다.

무극심검이 흔들렸다. 이제 추적은 연화존자의 몫이 된다.

연화존자의 검이 다섯 줄기로 갈라지며 무극검마의 팔다리를 노린다. 찬란한 강기의 다발이 순식간에 뻗어 나와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그러니 무극검마는 오직 감각만으로 알았던 것이다. 예전, 천마의 목을 딴 저 공격을 다 막을 수는 없다는 걸.

무엇을 막고, 무엇을 맞을 것인가? 판단은 생각보다 빠르다.

늙은 육신의 왼쪽 어깨와 손목에서 피가 솟구친다. 그것은 공격자의 감탄을 부르는, 기민한 최대한의 대처.

하나 감탄의 말이 오고 갈 틈은 이번에도 없다. 서로 치고, 받고, 흘리는 공방은 이제야 시작이니.

타오르는 두 개의 검강이 치열하게 부딪친다. 숨을 쉬듯 자연스레 타올라 으르렁 울어 댄다. 대기를 울리고, 서로의 목줄을 노린다.

그 안에서 무너진 GP의 잔재는 이제 부스러기 비슷한 무엇으로 바뀐다. 타오르는 내력의 불꽃, 장갑차마저 갈라 버린다는 내력의 정화(精華)가 충돌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주로 연화존자의 내공이 그랬다. 뻗어 가는 오색 빛깔이 어둠이 내려앉은 민통선을 밝힐 만큼 번쩍이며 땅을 가르고, 하늘을 양단한다.

이에 대응하는 무극검마의 움직임은 최소화된다.

무극심검의 가르침 자체가 그랬다. 지극한 것은 곧 통하는 법이라. 최고의 움직임은 움직이지 아니한 것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상승의 공부는 그 난해함에도 그것이 어찌하여 마교 최고의 검으로 불렸는지를 지금 증명한다.

저 공포스러운 연화존자의 위용에 맞섬으로써 말이다.

쉽지는 않았다.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 하여 무명검(無名劍)이라 불리는 연화존자의 검법은 얽매이는 일 없이 자유롭게 누볐다.

사방팔방, 가고자 하면 갔다. 이는 설령 무극검마의 영역이라 할 지라도 마찬가지.

무극심검조차 무명검을 막지 못해 둘 중 하나가 다였다. 겨우 피하거나, 어쩔 수 없는 손해를 보거나.

승부의 추가 어디로 기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라 하겠다. 초반의 팽팽함은 삽시간에 기운다. 무극검마의 검은 연화존자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고, 천마도검을 버티지도 못했다.

결국 다시 흐르고야 마는 두 줄기의 선혈과 이가 나가기 시작한 검날.

나머지 팔과 오른쪽 다리에 피를 흘리며 무극검마가 끝내 쓰러진다.

검을 바닥에 꽂고 버텨 보지만 소용없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모습의 연화존자는 무릎 꿇은 그를 무덤덤하게 내려다본다.

“남길 말은?”

이마에 맺힌 땀이 연화존자에게도 쉽지 않은 싸움이었음을 알려 준다. 누가 있어 또 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소용없는 자부심이다.

“…죽여라.”

무극검마는 패배를 인정한다.

밀린 숙제를 하는 느낌이다. 진작 했어야 할 인정을 이제야 하는 기분이다.

천마가 죽었던 그날, 마교가 절단 났음을 인정했어야 했다.

하나 무극검마는 이번에도 그럴 수 없었다.

“북해!”

눈이 번쩍 뜨인다. 용케 살아 있던 제자, 현현검이 다급하게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준일이, 네 이놈!”

“그곳에 천마의 시신이 있소!”

대경한 무극검마가 일어나려다 쓰러진다. 불민한 제자는 그런 스승을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천마의 시신은 스승님의 내력을 주입한 천으로 감싸 호수에 던졌소! 그러니 부디 제발…….”

스승을 살리기 위해 스승이 목숨 걸고 지켜온 비밀을 털어 놓는다.

무극검마에겐 옛 생각을 나게 하는 모습이었고, 연화존자의 계산으론 조금 부족한 대가였다.

“여기 있는 마교도들을 전부 죽일 거라 하지 않았나? 널 살려 보내면 내 말을 어겨야 하는 건데.”

이에 현현검은 부족함을 채운다.

손날을 세워 단전에 꽂고, 여력을 모아 오른팔을 잘라 내기까지 한다.

입가에 피를 주르륵 흘리며 간절한 눈동자로 연화존자를 본다.

연화존자는 미소 지었다.

“제자를 잘 뒀군, 무극검마. 가라, 다시 좋은 날이 오겠지.”

분한 눈으로 망설이던 마교의 노고수는 결국 혼절한 제자를 안고 몸을 날린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보며 연화존자는 한숨을 내쉰다.

대한민국 육군의 조명탄이 민통선을 밝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