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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53화 (53/175)

#53화

연화존자가 잠시 수면을 취하고 윤아영이 사무실에 두고 온 일과 다른 여러 생각에 잠긴 사이, 부드럽게 나아가던 차는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공사다망한 두 사람이 조금 늦었건만, 먼저 온 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홀로 바위 위에 앉아 어두운 밤바다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작 중이다. 맞이하는 이라곤 어두워 밤과 구별되지 않는 바다와 얼마나 오래 썼는지 이가 나간 낡은 술잔이 전부.

안주도 없는 술자리에, 강철로 된 목발만이 가지런하다.

차에서 내린 연화존자는 등을 돌린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공손함이지만, 그럴 법도 한 밤이다.

“잔결방주, 삼지일절(三肢一絶) 어르신.”

김철민조차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일세의 기인이었다.

김철민의 아버지나 운하신권, 어쩌면 그 위의 배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올 정도로 베일에 쌓인 고수.

잔결방주라는 직위보다 삼지일절이라는 별호로 알려진 그는 진정 미지에 쌓인 고수였던 것이다. 그가 어디서 무공을 익혔는지, 무슨 배경을 가졌는지, 심지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전해지는 일화들은 제대로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만큼 중구난방이었다.

누군가는 삼지일절이 무림의 고수들을 모조리 패퇴시킨 절대고수지만 불구에게 졌다는 부끄러움으로 온 무림이 입을 다물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서울역 앞 노숙하는 무리의 대장 따위가 헛소문을 타고 허황되게 알려진 것이라고도 했다.

혹자는 삼지일절이야말로 거지와 인신매매자들의 왕초라고 했다. 지하경제에 막대한 지분을 가진 악독한 죄인이라는 비난이 있었는데, 이에 어떤 이들은 앞의 소문은 모두 모함이며, 그분은 빈자들을 위해 사는 성자 같은 분이라며, 악인들을 징치하는 대협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는 불구자들의 방파를 수십 년 이상 이끌며 잡음도, 눈에 띄는 대외 활동도 없이 오직 별호만을 홀연히 남겼었다.

그랬던 미지의 고수를 지금 만난다.

윤아영이 함께 온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무공원 측에서 잔결방도로 추정되는 이들과 접촉하여 아무리 만남을 요청해도 답이 없다가, 그녀가 함께 오면 만나 주겠다는 전언을 간신히 받아 낸 게 얼마 전 일.

만남을 피하던 것치고는 맞이하는 목소리가 제법 따뜻하며, 왠지 모르게 초탈하여 힘이 없다.

“만나서 반갑네, 연화존자. 일어서지 못하는 걸 용서하게, 내 몸이 이래서.”

하지만 윤아영은 목격자로서 알고 있다. 저 노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태생적으로 오른쪽 발목이 짧다는, 무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목발을 휘두르고 던져 암살자들을 때려잡던 신위를 몇 달 전에 보지 않았나?

비록 사라져 가는 옛 관습일지라도 별호 하나만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무림일절이라 불러야 마땅했으니까.

두 사람은 삼지일절 옆에 털썩 앉는다. 준비된 술잔은 윤아영에게 하나.

“드시겠나?”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삼지일절은 본인이 마시던 술잔을 비우고 거기에 술을 따라 건네준다. 연화존자는 호쾌하게 들이켰다.

윤아영 또한 따라 준 술을 넘긴다.

가슴에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검사님께는 고맙네.”

먼저 나오는 건 예전에 미처 다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

“방도 중 사라진 녀석들은 죽었다고 생각했네. 그런 일이 많았거든.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픈 놈들이라 사람 취급 못 받고 사라지기 일쑤여서 이번에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었어. 설마 하니 잡혀가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을 줄은, 내 미처 몰랐네.”

“검사로서 월급 받으며 당연히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돌아보는 삼지일절의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다. 허투루 빗겨 가지 않은 세월이 거기에 있다.

그에 더해 허허로운 표정까지. 연화존자와는 다른 의미로 무림인 같지 않은 인상이다.

“그 당연한 일이 우리 같은 놈들에겐 당연한 일이 아닐세.”

그렇지만 저 말을 듣자, 돌연 한 사람이 떠오른다. 본 적도 없이 서류에서만 아는, 그녀가 담당하지 못했던 예전 염전노예 사건에서 처벌불원서를 써 줬다는 피해자가 갑자기 생각났다.

지능 지수 45, 사회 성숙 지수 43의 보육원 출신. 본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염전 노예 피해자는 지금 사회복지시설에 있다.

당시 말 같지도 않던 처벌불원서를 법원이 인정해 준 덕분에 풀려 나온 가해자는 염전을 접고 자기 소유의 배를 타며 지낸다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끓어 눈길을 떼지 못했던 밤, 늦은 날의 글자들이 떠오르니 잔결방주가 왜 거듭 고맙다고 하는지 알 것도 같다.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놈들을 세상이 어디 사람 취급이나 하던가?”

빈 술잔에 술을 다시 따라 준 뒤, 삼지일절이 남은 걸 병째로 들이켜며 치운다.

“이 나이껏 본 적이 없네. 겉으로는 아니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며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말하지만, 흥. 그 눈을 보면 알 일이야. 깔보고, 멀리하거나 이용하고, 그 와중에 우습게 본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오래되었을 분노는 연화존자와 윤아영을 볼 때에나 잠시 누그러든다.

“두 사람에겐 그래서 고맙네. 여기 검사님은 이번 일에 엄격히 대처해 줘서 고맙고, 연화존자 그대는… 좋은 일 많이 했더군. 이 바닥에서 쉽지 않은 일인데.”

“부모님께서 하시던 일을 물려받아 유지하던 게 전부입니다. 그나마도 외국에 나가 있어 자주 들여다보지 못했으니, 삼지일절 어르신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무림의 후배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명성과 다른 겸손한 대답엔 미소마저 지었다.

“그런가?”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동안 말없이 먼 바다만 보다 끝내 입을 열어 잔결방의 역사를 설명한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긴 이야기를 하는 건 어느 정도 의도가 있다 해야 할 것이다.

“본방의 초대 시조께선 말씀하셨네. 없는 자들끼리 도와라. 팔 없는 이가 발 없는 이의 다리가 되어 주고, 발 없는 이가 팔 없는 이의 손이 되어 주라. 본방의 역대 조사님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와 같은 유훈을 지키고자 노력하셨지.”

새로이 술병을 따며 씹어 먹듯 내뱉는다.

“하나 노부는 조사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실패했네.”

스스로에 대한 평가이자,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를.

고수의 내공은 이 정도 알코올이 육신에 침범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건만, 불어오는 바람에 취해 버린 것일까?

회한을 토해 내는 말들에선 울분의 취기가 느껴진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노부의 스승님께서 간악한 일제의 손에 옥사하시어 젊은 나이에 방을 물려받았지. 다행히 천지신명이 보우하사, 두 발의 핵이 일제의 머리에 떨어진 뒤 천황 히로히토가 항복하며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 어디에서도 본방의 자리는 찾을 수 없었네.”

무림의 비사는 당사자의 입에서 올올이 풀려 나온다.

“미 군정 아래 혼란기에 본방과 다른 불구자들이 안전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지.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어. 좌우할 것 없이 해방 후 권력 다툼으로 다들 눈이 벌겠거든. 당시 어렸던 노부가 스승님께서 사사하신 음풍파천무(陰風破天武)를 대성하지 못하기도 했으니, 별다른 이용 가치도 없었을 거고.”

삼지일절이 뚜껑을 딴 술을 쓰게 마신다.

“그러다 6.25가 일어났고, 그곳에서 지옥을 보았다네.”

두 사람은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민족상잔의 참상이 옛이야기인 윤아영은 물론이고, 그녀보다 비극에 가까운 김철민조차 그랬다.

이런 이야기는 오직 듣는 것만이 가능하다.

독백은 계속된다.

“전쟁을 겪고, 전후의 비참함을 견디며, 나라의 혼란을 지금껏 보아 왔네.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가 정권을 잡았고, 그래. 그럼에도 한국은 눈부시게 발전해서 여기까지 왔지. 너무도 많은 것이 좋아지고, 부유해졌어. 하지만.”

삼지일절이 김철민과 윤아영을 바라본다.

깊은 허무가 고인 시선으로.

“그 어디에도 본방의 자리는 없었어. 아니, 아픈 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네. 해방 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우린 소외되어 있네. 치워 버리려고 안달이지.”

그로써 알 수 있다. 삼지일절이 왜 강호 출도를 거부했는지, 세상에 몸을 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그래, 저 눈빛.

저 강대한 무공에 어울리지 않는 공허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또한 바뀌지 않는 세상에 실망한 사람 중 하나다.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신체를 잃은 상이군인들은 그들이 지킨 나라에서 폐지를 줍는다.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은 집 근처에 학교가 없어 두 시간도 예사로 등‧하교 한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고자 하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집회가 열리고, 아픈 아이를 둔 죄로 부모는 집값을 지키겠다는 시위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 다리와 손가락이 없는 아이가 수영장에 가면 사람들이 환불을 요구하며 욕을 했고, 그런 아이를 입양한 어머니는 아들을 수영장에 보내기 위해 밤마다 여섯 시간씩 수영장 청소를 했다.”

줄줄이 읊고도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삼지일절은 이야기한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나라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음에도 말이야. 문맹이 사라지고, 기아가 사라지고, 대학 진학률이 이렇게 높아진 시대에도 장애를 가진 자들은 삶을 견뎌 내야 하네. 오, 그래. 삶은 견디는 것이지. 모두가 그렇지. 그러니 몸이 불편하고, 정신이 불편한 이들이 특권을 가져야 한다거나, 특별히 선량하다는 눈 먼 말은 아니네. 노부만 하더라도 성격이 꽤나 더럽지 않겠나? 오늘도 장애인들을 착취하고 신분을 바꾼 채 살아가던 늙은이 하나를 만나고 오는 길일세.”

검사 앞에서 죄를 고백한 삼지일절이 오늘 처음으로 킥킥 웃지만, 그것은 차라리 자조에 가깝다.

“그래도 바뀌는 건 하나 없다, 이 말일세. 무수히 많은 밤을 보냈음에도 말이야. 그러니 어쩌겠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낱 불구자인 나는 그저 발 닿는 곳 아무데서나 먹고, 자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연화존자는 바로 여기쯤에서 입을 연다.

“저희가 왜 뵙고자 하는지, 잔결방주께서는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국가무공원에 합류하라는 거 아니었나? 그런 줄 알고 이 긴 이야기를 했던 것일세. 노부에겐 그럴 열정이 없다네.”

풍찬노숙할지언정 늙은 무림인다운 통찰력이다. 사실 대한민국 무림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자면 모를 일이 아니기도 했고.

현천문과 증산방이 국가무공원으로의 귀속을 선택했다. 거기에 저항하던 세 개 단체는 구속 수사 후 집행부의 수사가 진행 중.

당연히 잔결방에도 그 비슷한 걸 요구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고맙긴 해도 연화존자와의 만남에 별 관심 없던 그였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나? 음풍천월무가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고수라곤 다 늙은 본인 하나밖에 없는 쪼그라든 잔결방이었고 심지어 제자조차 없다.

그리하여 거절의 말을 고르던 삼지일절이지만, 연화존자의 다음 말은 예상을 깬다.

“아니오. 저는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삼지일절의 얼굴에 미약한 의문이 감돈다.

“그럼 노부는 왜 보자고 한 건가?”

“저는 잔결방이 비영리법인으로 전환해 주셨으면 하는 요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뭐라고?”

연화존자에게 다른 계획이 있음을 알았다.

“저는 삼지일절 어르신께서 무림과 시민사회를 아우르는 단체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청사진은 거침없다.

“저는 잔결방이 국가무공원의 바깥에 존재하여 무림과 시민사회의 전반을 아우르는 강력하고 올바른 단체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연화존자의 말을 멍하니 듣던 삼지일절은 무슨 생각인가를 하더니 곧 살기를 내뿜었다.

“본방을 이용하고, 노부의 무공을 노리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그러면서도 윤아영에게 기세가 닿지 않게 조절하는 걸 보며 연화존자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전 남의 것을 탐하기엔 손에 쥔 게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선량하신 분 같으니라고.

이런 분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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