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54화 (54/175)

#54화

‘잔결방이 NGO로 탈바꿈하여 국가무공원과 대립 또는 협조하며 공적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힘써 달라.’

이것은 국가무공원의 아닌 연화존자 개인의 제안이다. 국가무공원에서도 이 만남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거기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직 김철민의 의지만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역할을 맡아 줄 이로 처음엔 청해마도의 증산방을 고려하던 연화존자는 사이비 교도의 암살 테러로부터 윤아영을 구해 낸 잔결방의 존재를 목격하며 생각을 바꿨다.

그가 생각하는 계획 속의 명분과 구성원은 잔결방 쪽이 더 적합하다.

“무릇 고여 있는 것은 썩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바깥에 존재하며 잘하면 돕고, 못하면 꾸짖을 분이 국가무공원엔 필요합니다. 저는 삼지일절 어르신이 그런 분이라 믿습니다. 이를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국가무공원의 간섭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전부 제 개인의 의지니까요.”

애초에 잔결방이 무림방파의 틀에서 벗어나 시민단체가 되고, 국가무공원을 감시하는 역할과 장애인 복지를 증진하는 일을 함께 맡아 주십사, 부탁하는 것에 국가조직이 나설 일은 아니기도 했다.

그래서야 어디 중립성이 존재하겠는가? 공무원 눈치나 보는 어용 기관이나 되겠지.

김철민이 개인 자격으로 관여하는 건 그럼 문제가 아니냐, 하고 누군가는 따지겠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선 확실한 의지가 있다.

연화존자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이 있다. 고작 이만한 일로 망칠 수 없는 크고 높은 뜻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적을 위해서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다. 과감하면서도 세심하게.

시민단체가 되면 당연히 정부 교부금을 받게 되긴 하겠지만, 연화존자는 개인 재산을 투입할 걸 약속했다. 이를 통한 복지시설의 확충과 인력 확충 역시 약조했으며, 제대로 활동하는 한 운영 및 활동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할 것을 문서로 보증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너무도 후하고 이해하기 힘든 조건에 삼지일절은 반문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이런 말하기 그렇네만 자네의 능력이라면 본방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사람과 집단을 구성할 수도 있을 텐데? 대체 그것으로 자네가 뭘 얻을 수 있나? 현재의 잔결방은 사람도, 고수도 그리 많지 않네.”

진심 어린 의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제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 잔결방입니다.”

“조건이라?”

“무림과 복지, 양 분야에 참여할 명분과 동기를 전부 가진 집단. 그에 더해 설령 국가무공원이 변질되더라도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고수를, 무공을, 무엇보다 선함에 대한 의지를 보유하고 있을 것. 이렇게 보니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이 대한민국에 잔결방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연화존자는 독재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권력이 집중, 독점되는 방식은 위험하다고 보았으니,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

연화존자 김철민이야말로 무림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던가? 만약 그가 원한다면 21세기 현대 강호라 한들 무림 일통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홀로 온 세상을 감당할 만한 능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모든 걸 제멋대로 다루는 걸 싫어한다는 건 일견 모순적이라 할 테지만, 그건 아마도 지난날 독재정권 아래에서 보아야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은 방식, 국가무공원에 힘과 권한이 집중되도록 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절실한 필요성을 우선시했기에 그런 거고.

지금 이 나라에 국가무공원같이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조직이 필요하다는 걸,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뿐 아니라 국가구성원 전체가 이익과 생각에 따라 이리저리 찢겨져 있는 상황에서 일치단결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발목만 잡혀 허송세월할 판국이라는 게 냉혹한 현실이기에, 연화존자는 강력한 국가조직을 만드는 선택을 했다. 최대한 절차와 규범을 지켜 가며.

그렇지만 견제 없는 독주는 파국을 부르기 마련이기에 고심이 깊었고, 잔결방의 출현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 일이었다.

“독재가 끝났음에도 어떤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 흉으로 남게 된다는 걸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잘 알 겁니다. 전 훗날에라도 국가무공원이 그런 상처로 남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여 연화존자는 잔결방이 견제와 감시의 역할을 해 주길 원한다. 삼지일절과 같은, 무공뿐 아니라 인생에 깊은 깨달음을 가진 고수가 시민사회에 힘을 실어 준다면 일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자야 지금부터라도 키우면 될 일인 것이다. 거기에 대한 파격적인 방안이 두어 가지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그러니 중요한 건 사람, 오직 중심이 될 사람이다.

사실 이 밤의 만남 자체가 삼지일절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잔결방의 주인은 연화존자가 가장 궁금해하고 우려하던 걸 스스로 고백한 셈이었으니, 바쁜 시간을 쪼개 나온 이 자리가 너무도 만족스러운 김철민이다.

오직 선량한 이들만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법이란 걸 안다. 내면의 선량함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제 자신의 선을 완성하는 법이라는 것 역시도.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잔결방주 같은 협객도 또 없을 터.

또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필요가 하나 있어 잔결방을 원하기도 한다.

“저는 대한민국의 군대를 가장 먼저 바꾸고 싶고, 거기엔 예상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예상하는가?”

“군인들에게 무공을 보상으로 주고자 하는데, 이때 분명 반대하는 자들이 나올 겁니다.”

군 가산점 소송에서 여자와 남자 문제는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였다. 헌법 소원을 받아 든 대법원은 군대를 선천적으로 갈 수 없는 장애인들과의 차별에 또한 주목했다. 여성계에서도 그 점에 포커스를 맞춰 연대하며 장애인 단체와 연대했던 것이고.

그러니 예상해 본다. 과연 지금의 시범 부대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진기도인단의 구성을 완성했을 때, 현역 간부와 징병된 사병들을 대상으로 내공심법을 보급한다고 발표하면, 관련 시민단체 등이 가만히 있을까?

“어르신께서 이 문제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절대 그럴 리 없지, 절대로.

“일방적으로 편을 들어 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누구도 불이익을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믿고 함께 갈 이로 삼지일절 어르신을 초청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사회의 분열을 잠재워 건설적인 결론을 내리길 저는 원합니다.”

군 가산점 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 자체가 틀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사람의 목숨이 가장 값싸게 취급되는 곳에서 그 보상으로, 인생이 가장 빛나는 시절을 애국이란 이름을 내세워 뺏어 가 놓고 고작 공무원 시험 때 가산점을 주는 것으로 떼우려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사실 수작이나 다름없다, 개수작.

월급을 지역상품권으로 주는 것과 뭐가 다른 일인가, 그게?

대한민국 전역자들 전부 공무원 시험을 보라는 소리와 군 가산점 제도가 뭐가 다르냐는 생각을 한다.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면서도 전역자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못 되는, 땜질이나 다름없는 보상안이 아니었는지.

그건 대한민국이 정말로 어려웠을 때나 통했던 일이다. 지금처럼 잘사는 나라가 되었음에도 저런 식의 보상밖에 내놓을 게 없다는 걸 부끄러워 마땅해야 할, 그런.

반쪽짜리가 아닌 제대로 된 보상이 필요하다.

연화존자가 원하는 건 그따위 돌려 막기가 아닌 것이다. 매순간 격동의 한국사를 살아 내야 했던 그는 그런 걸 너무 많이 봐야만 했다.

단단한 마음으로 말하는 그의 눈에 예의 무지개가 맺히는 이유다.

“대한민국이 변하려면 함께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과 마교라는 모순적 상황이 외부에 존재함에도, 우리는 뭉쳐 단결해야 합니다.”

그러자 삼지일절은 알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한참이나 젊은, 반로환동마저 이룬 눈앞의 무인이 역사적 존재라는 걸.

해방 전부터 살아온 자신조차 목격하지 못한 전무후무한 존재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저는 이제까지와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비단 일신에 지닌 천외천의 무공 때문만은 아니다.

“무림이고, 사회고. 그간 다들 힘들다고, 어렵고 귀찮다고 넘어가며 외면해 온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쌓여 있지요. 이것들이 싸워서 해결될 일이라면 얼마든지 이 한 몸 희생해 영원한 싸움에 임하기라도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연화존자에게는 그보다 큰 위대함이 있다.

“대한민국 무림의 큰 어른께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바꿀 가시밭길을 나아가기로 마음먹음에 김철민, 이 한 몸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어렵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이의 고집이나마 하찮다 내치지 마시고 간절히 내미는 이 손을 잡아 주시어 함께 가기를 청합니다.”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이는 그를 보며 삼지일절은 말없이 한탄했다.

그것은 인생의 늦어 버렸음에 대한 소고와 다름없었다.

“나는 너무 일찍 왔고, 자네는 너무 늦게 왔군.”

일어나 다리를 절며 걸은 그가 연화존자의 손을 힘 있게 다잡는다.

“이런 말을 듣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어찌 무림인이라 자처하겠는가? 대한의 건아가 뜻을 세웠음에 내 남은 세월이 얼마 남지 않음이 야속할 뿐이네.”

언덕 위를 부는 바람을 말 없던 달이 고개를 내밀어 내려 보고, 이제 막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여검사가 두 절대고수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지켜보던 어느 날.

“이제부터 내 목숨은 자네 것일세.”

연화존자가 또 다른 조력자를 얻었다.

그의 다른 날개가 한국에 도착한 날 즈음이었다.

충무로의 한 호텔.

드넓은 컨퍼런스룸에 기자들이 모여 있다.

얼마 전,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외국계 기업을 취재하기 위함이다.

“…그룹의 이번 투자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워낙 대규모 투자로 한국 내에서도 기대감이 높은 데다, 유럽 쪽에서도 손꼽히는 선진 기업 문화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이들은 돈이 무척 많은 글로벌 기업이다.

“저희 그룹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굉장한 가능성과 큰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그룹의 투자를 결정지었습니다.”

대답하는 이는 붉은색 계통의 정장에 녹색 넥타이를 멋들어지게 차려 맨 여성이었다. 무쌍의 눈이 매력적인 중국계 여성의 실제 국적은 스웨덴이었지만, 놀랍게도 유창한 한국어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 중이었다.

사뭇 친절하기까지 하다.

“어떤 면에서 가능성과 매력을 느끼셨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봐도 될까요?”

머리를 정갈하게 틀어 올린 여자는 다리를 꼰 채 여유만만한 태도로 대답한다. 딱히 사전 조율 따위 없었음에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거침없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저희 그룹은 대한민국의 사회적 기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나라를 구성하는 여러 기반이 그룹의 이익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보고 있지요.”

옆에 놓은 투명하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말을 잇는다.

컵에 립스틱은 묻지 않았다.

“이 나라의 치안과 교통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국민성이 그렇습니다.”

“국민성이라 하시면?”

“교육받은 젊은 인재들이 많다는 것 말입니다.”

여자의 웃음은 매혹적이다. 자리한 기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기분을 느낀다.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이고, 문맹률 역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그들 대부분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윙크하듯 눈을 가늘게 뜬 여자는 자칫 예민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다.

“저희 그룹의 일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교육받은 인력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죠. 도덕적이고, 헌신적이며, 규범을 준수하는 성향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얼마나 흥미롭겠습니까? 어찌 보면 진출이 조금 늦은 편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로 답변을 마무리한다.

“저희 당가그룹은 대한민국을 제2의 고국으로 삼아 투자를 아끼지 않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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