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55화 (55/175)

#55화

순조롭게 기자회견을 마친 당가그룹의 상무이사이자 한국 진출 총괄 담당자인 당청영은 직접 차를 몰아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한다. 기자회견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는 바람에 마음이 조금 급했다.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기다리게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정작 당신들은 크게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그녀 본인의 마음이 편치 않다. 서두른다.

흔한 경호원조차 하나 없이 움직이지만 걱정은 없다. 네비게이션은 잘되어 있고, 목적지는 멀지 않다.

그리고 그녀는 퍽 운전을 잘한다. 그룹의 성장과 함께 추격전을 많이도 겪은 덕분이다. 아마 어지간한 운전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리라.

몰락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장을 헤매야 했던가? 쓰러진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흘려 마땅할 피가 있었다.

그 수라장을 지나온 당청영은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믿는다.

악명을 자랑스러워하는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당가의 이름은 이제 옛 영광을 거의 되찾았고, 거기엔 당청영의 몫이 분명히 있다.

당문 최고의 여고수들에게 붙곤 했던 독봉(毒鳳)이라는 별호를 100여 년 만에 계승한 그녀이지 않나?

당가그룹을 적대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옛 중국의 독을 품은 새, 짐(鴆)이라고도 부르는 듯하지만, 무릇 무림인의 명성이란 누군가의 시체 위에 올라와 있는 법.

허약한 것들이 전혀 무섭지 않은 당청영이었다.

거기에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몰락했던 당문이 부활하며 다시 쌓은 기술력으로 만든 무기들이 차 안 곳곳에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차량부터가 당가의 기술력으로 보완한 커스텀인 것이다. 같은 조치가 취해진 차를 당가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만이 탄다.

군대를 끌고 와 포격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치거나 곤란할 일은 없다는 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얼마 전 들었던 불쾌한 소식이 뇌리를 스친 까닭이다.

‘은공께도 한 대 선물해야겠어. 트럭 테러라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기보단 차라리 코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불쾌함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감히 당문의 은인에게 테러라니. 죽지도 못 하고 고통 받고 싶은 건가?

이마에 검은 힘줄이 비죽 돋는다. 당가 사람들은 흥분할 때면 이렇게 티가 잘 난다.

실제로 그녀는 마음이 급하다,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해.

‘어서 빨리 당문그룹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야 해. 그래야 그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은공을 노린 자들이 응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청영이 보기엔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다.

감히 은공의 처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주지하다시피 그녀는 당가의 사람.

암살을 주도한 부잣집 아들이 내력에 의한 발작으로 하루 두 번씩 고통받고, 실행자 대다수는 단전이 깨진 채 재판에 임해 교도소로 갔다는 것 정도로는 성이 찰 집안 내력이 아니다.

당가의 은인을 해하려던 대가를 고작 그 정도로 치러서는 안 되는 것이지.

협박 당했다지만 당시 운전대를 잡았던 이에 대한 관대한 처우는 사뭇 분통이 터지기까지 했다.

‘그분께서는 너무 여리시다. 감히 그분을 노린 것들이 그것밖에 안 되는 처벌을 받다니.’

하지만 이내 떠오르는 어떤 생각에 쓴웃음을 짓는다.

은공의 바로 그 관대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당가의 부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분의 긍휼함이 사라질 뻔한 당가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분의 대가 없는 도움이 모든 것을 바꿨다. 그러니 그분의 결론에 불만을 품는 건, 사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은인의 곁을 지키며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도록 전력을 다해야겠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당가그룹이 한국 진출을 계획하며 가장 세심하게 준비한 장소.

아직 간판을 달지 않은 작은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요식업은 당가그룹의 중점 사업 중 하나다.

무림에서 독왕이라 불리며 추앙받던 사천당문의 가주가 국민당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부천대 직후 비명횡사하고, 살기 위해 유럽으로 터전을 옮긴 집안이 맨 처음 시작했던 일이 이것이다.

요리, 식사, 독을 만지던 손으로 밥을 만들어 파는 일.

지금은 세상을 뜬 당청영의 증조부, 당재문은 생전에 이렇게 강조했을 정도다.

‘이 마파두부야말로 중원에서 쫓겨난 당가를 지탱한 새로운 뿌리나 다름없었다.’

이것으로 당가의 식솔들을 먹여 살렸다.

어떤 농담이나 비유가 아니다. 모든 재산을 공산당에 몰수당하고 방계와 직계를 가리지 않는 대학살 끝에 오직 소수만이 탈출에 성공한 당가의 무림인들은 깨닫는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진정한 의미를.

그들 가문의 밥줄이었던 작은 차이나 레스토랑이 아니었다면, 당가의 명맥은 끊겨 버렸을 게 확실하다. 그랬다면 복수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잊혀졌겠지.

옛날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지, 하는 지나가는 말 따위만이 남았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원한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당가는 복수를 원했고, 지금껏 살아남았다.

“…늦었습니다.”

당문 최고수의 단전을 폐한 뒤 저잣거리에 묶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던져 때려죽이게 한 중국 공산당을 증오한다.

당가의 혈족들을 조롱하고 총으로 쏴 죽인 뒤 찾을 수도 없게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묻어 버린 중국 공산당을 미워한다.

중국 공산당에 붙어 당가의 죽음을 방조하다 못해 조장했던 사파의 떨거지들을 혐오한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여전히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선 채 건재한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마음은 한결같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남자가 당청영 앞에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 독군 당군명의 등에 손을 올린 채로.

서로 다른 내공심법을 익혔음에도 쉽사리 진기요상을 시도하는 가운데, 입을 여는 대단함을 목격한다.

“왔나?”

그것은 그녀가 이제 막 십 대의 봄을 맞이했을 무렵과 같은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다.

여전히 놀라운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당가직계의 독문무공인 화독귀원신공(花毒歸元 神功)의 화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렸을 적의 경이로움은 작아지는 일 없이 나날이 커지기만 한다.

독왕의 죽음으로 실전된 사천당가 최고의 내공심법을 몇 번의 훑어봄으로 복원시킨 놀라운 고수였다. 존경심이 저절로 샘솟을 수밖에.

“흐으으음.”

“오랜만에 만나 뵌 거라 조정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독군 어르신.”

지금도 보라. 오랜만에 만난 조부의 내력을 바로잡아 주는 것을.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도 이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으리라.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하는 조부의 이마로 굵은 땀이 흘러내린다. 검녹색의 진기가 거칠게 요동치며 사방으로 힘을 뻗으려 한다. 고통이 느껴진다.

그런 조부의 내력을 무지갯빛 내력이 붙잡아 진정시킨다. 다루기 까다롭고 보고만 있어도 불길한 녹색빛을 띈 검은 내력이건만, 그 일을 하는 이의 표정은 편안하고 여유롭다.

옆으로 서서 호법을 선다. 이미 그러고 있던 흑응과 다른 칠익회 인원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그분, 연화존자를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당가 부활의 신호탄이었던 그날을 떠올리게 된다.

죽어 가던 그녀의 조부가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마파두부 같은 사천요리를 팔며 연명하던 옛 무림세가의 후예들이 거대그룹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그날을.

“후우우……”

“거의 다 됐습니다.”

독왕을 비롯한 가문의 핵심 고수들이 떼죽음을 당하며 사천당가의 비전이 실전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다. 훗날 독군이라 불리는 조부 당군명은 이제 더는 사천당문이 아니게 된 당가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무인이었던 바.

그 시절 사람들이 그렇듯 무너진 영광을 되찾기 위해 청춘을 갈아 넣기까지 했다.

당가의 부활을 위해서 활약하기에 시기와 지리도 좋았음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기사단이 사라진 유럽 대륙에서라면, 많이 약해진 당문의 무인으로도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으니까.

다만 운은 조금 나빴다. 비전과 심득을 잃은 당가의 무공을 복원하고, 흩어진 혈족들을 모아 가문을 바로 세우려고 무리하다 주화입마가 왔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몰락한 무림세가의 후손이란 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인 것인데.

결국 무모하게 도전한 화독귀원신공의 여파로 내공을 잃자 체내의 독 기운이 퍼져 팔 하나와 발가락 일부를 잘라야 했던 그녀의 조부는, 식당으로 쓰던 건물 2층에서 거동도 못 하는 퇴물이 되어 통한의 눈물만 흘려야 했지만, 그것도 한 사람이 찾아오며 끝이 났다.

앞서 말했듯 연화존자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게 웃으며 찾아온 그 남자가 조부의 주화입마를 고치고, 잃어버린 내공심법을 돌려주었다.

변변한 대가도 없었다. 그저 성공하여 자신의 일을 조금 도와 달라는 게 전부였으니까.

이를 위한 투자금이라며 자금마저 빌려주고, 어려움이 있을 때 도우며 당가를 당가그룹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리하여 소녀에서 여인이 된 당청영은 가문의 옛 격언을 늘 되새겼다.

복수는 두 배지만 은혜는 열 배로 갚아야 하는 법이라는 가풍을.

비로소 때가 왔음을 실감한다.

“더는 굳이 제가 손을 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독군 어르신의 내공이 완전히 돌아왔네요.”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덤덤히 말하는 그녀의 조부는 예전 그 이상의 무위를 되찾았고, 당가그룹의 회장이 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 있는 그룹의 농장을 다른 기업들로부터 지켜 냈고, 그룹의 용병 회사들을 이끌고 체첸 전선에서 활약하며 러시아로부터 천연자원 판매권 일부를 얻어 내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보인 활약으로 가문 내 위상은 완벽하게 공고한 바.

그렇지만 연화존자의 크나큰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았다.

“내 하고 싶은 말이 있네만, 우선 청영이의 말부터 먼저 들어 볼까 하네.”

“그러시죠.”

당청영은 조부의 말에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연화존자의 내력이 귀밑을 스치니, 예전의 떨림이 다시금 재현된다.

그렇지만 맡은 바 소임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그룹의 한국 진출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반 시설 일부를 시작으로, 지사를 열기 위한 신고 및 허가에 문제는 없습니다. 칠익회의 다른 지부들과의 협조 또한 잡음 없이 진행되고 있고요.”

“다들 연화존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아닌가? 쓸데없는 알력 다툼은 없어야 할 것이야.”

조부의 추임새에 고개를 끄덕이며 붉어진 볼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다.

아직 보고할 게 많다.

“전에 말씀하신 친우분의 총기 회사와의 협업 역시 매끄럽게 진행 중입니다. 제 막냇동생이 담당하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롭고 즐겁다고 합니다. 그룹의 기술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리 꿇리지 않는 기술력을 갖고 있어 근 시일 내로 의미 있는 시제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약 공장과 화장품 공장은?”

“공장을 시작으로 본사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만, 일단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먼저라고 그룹 중진들은 여기고 있습니다. 공장과 함께 주민 편의 시설을 함께 지을 예정으로 지자체와의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다섯 개 부지를 선정하여 분배할 예정이고 이에 따른 환경오염에 대한 대비 역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부 사항은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당가는 연화존자의 꿈을 위해 그룹의 가용 자원 대다수를 쏟아붓기로 의결했다.

이사회 대다수가 당가의 사람들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당가의 사람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여전히 무림인인 그들은 은원 관계에 철저했고, 연화존자의 자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 중 그 무엇도 없었다는 걸 잘 알았다.

대한민국을 제2의 고국으로 삼겠다는 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고생했구나. 참,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다음에 나온 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노부가 이 기회에 대한민국으로 귀화를 하고자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독군 당군명은 그를 돕기 위해 국적마저 바꾸겠다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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