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북한-마교와 정면 충돌 한 일로 잠시 세상로부터 숨은 연화존자는 요즘 본인 소유의 카페, 팀북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가깝지만 먼 곳으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이다. 허름한 듯, 낡은 듯. 하지만 번잡할 뿐인 세상의 무의미한 것들이 하나 없는 그곳은 사람들의 인식을 가리는 옛 무림의 기예가 적용된 평화로운 장소다.
그의 지시 아래 북한의 해커들이 죽거나 잡히고. 그들이 갈취한 검은 돈을 세탁하던 브로커들이 납치 당해 흉중에 감추었던 어두운 비밀들을 실토하며, 덕분에 불로소득을 얻은 제갈 패밀리 등이 기뻐하는 와중에도, 연화존자의 일상은 그토록 평화로웠던 바.
분노한 중국과 북한의 빨갱이들이 그를 죽이고 싶어 밤잠을 설치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한가로운 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것이 여유로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치열하다 단언할 수 있다. 카페 팀북투에 하루 종일 앉아 끝없이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그가 하는 일이란 대한민국을 떠받칠 새로운 무공과 그 체계의 창조였으니까.
‘무명공-1의 효능은 확실하다. 그러면 이제 이를 기반으로 뻗어 올라갈 수 있는 상위 무공을 개창해야겠지만, 벌써부터 손을 대기엔 시범 부대의 일정이 끝나지 않았어. 모두 파악했다고 자신하기엔 수련 기간이 너무 짧아. 부작용에 대한 검증이 완벽하지 않으니, 아직 설익은 솜씨를 부릴 때가 아니야. 아무래도 영감과 깨달음 위주로 정리해 놓고 차근차근 고민해야겠군. 어차피 진기도인단의 실력이 무르익지 않았으니, 진기의 흐름을 살필 기회는 많을 거야. 이쪽은 아직 여유가 있어.’
그것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점에서 창작의 고통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는 천마를 죽인 연화신공의 창시자이자, 수많은 무림 명가의 무공을 복원하여 역사의 망각마저 이겨 낸 천고의 기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연화존자라 한들 새로운 무맥, 그것도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를 토대를 세우는 게 마냥 편할 리만은 없었다.
오늘의 작은 실수가 훗날의 큰 파탄으로 올지도 모를 일.
연화신공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천에 하나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리라. 뭇사람들의 수준이란 걸 고려하지 않는 신공은 낭비에 불과할 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연화신공을 뼈대에 두고 어떤 살을 붙일지 고려해야만 했다.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익힐 무공이니만큼 세심하고 조심스레.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연화신공이 도가 정종 무공에서 기반했음이 어찌나 다행인지. 만약 자신이 사파나 마교의 무인이었다면 정말로 암울했을 거라며, 연화존자는 홀로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격동의 20세기, 종남의 검선이 하산하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에게 아무 말 없이 내어 준 고대의 비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그래도 쉽지는 않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강호 무림 최고의 고수는 이렇듯 바빴던 것으로 그런 그를 옆에서 보조하는 인원이 여럿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잔 드시면서 하시죠, 숙부님.”
“고마워.”
대표적으로 손수 커피를 내려 건네는 청해마도의 아들이자, 증산방의 소방주인 송철우가 있다.
원래부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방주를 대신해 소방주로서 역할을 수행하던 그였지만, 서울로 상경하여 국가무공원에 합류한 이래의 매일은 이전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부산과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전과는 달리 이제는 대한민국, 나아가 동아시아와 세계에 영향을 끼칠 일에 한 손 보태고 있지 않은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현천문과 칠익회에는 날고 기는 고수들과 놀라운 실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여럿이라 기가 죽을 지경이다.
당장 국가무공원의 거의 모든 법적인 문제를 감당하는 와중에도 무서우리만치 연화신공의 성취를 높여 가는 윤아영 검사만 봐도 그렇다.
강단 있게 범죄자들을 처리하는 똑부러지는 솜씨도 그렇지만, 가끔은 무림의 인재를 대한민국 법조계에 빼앗겼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윤아영이 보여 주는 내공에서의 성취는 보통을 넘었다.
연화존자는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던 것일까?
“너도 잠깐 앉아서 한잔하지? 네 아버지가 곧 올 텐데.”
“알겠습니다.”
하여 연화존자의 권유에 따라 제 몫의 커피를 내리며 송철우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아 풍진 강호에 기인이사는 몸을 숨기고 있는 법이라고.
그것이 국가무공원에 합류한 뒤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당가그룹의 상무이사, 독봉 당청영 또한 좋은 예시가 되리라. 일을 추진하는 그 야물딱진 솜씨가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옆에서 보고 있자면 혀를 내두를 정도.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온 것인지 궁금했다. 몰락했던 당가그룹의 성장과 함께 커 온 여자이니만큼 평범한 삶은 아니었겠다만은 정치인들을 한 손에 쥐고 흔들며 그룹의 진출을 방해하는 자들을 자근자근 밟는 그 숙련된 솜씨란.
존경심마저 생겨나는 요즘이다.
칠익회의 고수들은 말할 것도 없지. 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 몸을 숨기고 살아왔던 건가?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자신만만했던 예전이 부끄럽다.
“수련은 잘되 가나?”
하지만 그럼에도 질투와 자기 비하로 흔들리지 않는 건 그가 청해마도의 아들이자, 연화존자의 조카이기 때문일 터.
송철우는 자신을 보며 부드럽게 웃는 절대 고수에게 자신 있게 답한다.
“부족하지만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연화존자와 송철우는 최초의 충돌 이후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증산방의 소방주는 연화존자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그건 분명 청해마도의 후광에 기인한 것이긴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국가무공원이 증산방을 핍박한다는 생각으로 거칠었던 첫 대면 때와 달리, 송철우의 인품은 그만한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치곤 흠잡을 데가 없었다.
훌륭한 부모에게 물려받은 무공에 대한 재능과 특유의 친화력이 연화존자의 마음에 들었던 것.
실제로 증명하기도 했다. 청해마도가 증산방이 위치한 경상도는 물론 지방의 거파들을 아우르며 국가무공원에 대한 동요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에는 방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쌓은 송철우의 인망이 기여했으니.
이후 백 년을 생각하는 연화존자에겐 기꺼운 재능이다.
‘천년만년 나 혼자 해 먹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래서도 안 되는 거고.’
극에 달한 무공에도 자기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는 그는 유망한 후배의 성장이 실로 기쁘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쁜 시간을 쪼개 가며 송철우의 무공을 봐주지 않았을 터.
늙은이의 욕심이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주범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이 젊은 인재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 많이도 보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국가무공원이지만서도 미래를 바라보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하는 법이었으니. 결국 실망과 회한으로 떠났던 그가 대한민국에 돌아온 이유란 이 나라의 암울한 미래를 바꾸기 위함이 아니었던지.
‘미래를 떠받칠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인데…….’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궁리를 또 하게 된다. 잠시 쉬자 했건만, 할 일이 많고 의욕 넘치는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도 쉬는 법을 모른다.
긴 침묵은 아니었다.
“형님.”
문을 열고 들어온 청해마도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오셨습니까?”
“그래.”
아들의 인사에 짧게 답한 그가 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어디선가 누군가 커피를 내려, 가벼운 디저트까지 함께 내려놓는다.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그 귀신 같은 솜씨에 누구 하나 놀랄 법하지만 연화존자도, 송철우도 그러기보단 청해마도의 입에 집중한다.
그는 중요한 협상을 막 마치고 온 참이었다.
“미 대통령의 방한은 한 달 후가 될 거라고 합니다.”
“코앞이군.”
CIA와의 협상을 지속해 나가고 있었다.
미리 나눌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물은 잘 받겠다고 하더군요.”
“불량국가의 해커한테 여러 번 털렸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겠지.”
국가무공원 내에 역할 분담은 이렇듯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었다.
원장의 위를 맡은 운하신권이 지난 세월, 현천문을 운영하며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정부의 일을 맡는다. 그리고 음지에서 일어나는 일, 예컨대 얼마 전 있었던 북한 해커 부대와 중국 브로커들의 사냥을 진두지휘하는 일과 같은 경우는 흑응의 업무다.
무공에 대한 거야 당연히 연화존자의 것이었고.
무 자르듯 자른 건 아니다. 무명공-1을 창안하는 일과 같이 모두가 필요한 경우엔 다 같이 힘을 모은다.
청해마도는 주로 해외에서 일어나는 일 중 공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그것은 앞으로의 계획을 대비하는 측면이 크다.
“제갈 패밀리의 몫을 제외하고 북한 해커들의 자금은 미 정부가 회수하여 언론에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이번에 드러난 중국 공산당의 비자금 흐름을 남몰래 추적하겠다고 합니다.”
미국과의 협상을 주도하는 것 역시 그의 일.
“다만 남은 북한의 해커들을 넘겨줄 수 없겠냐고 묻는 건 거절했습니다.”
“잘했네. 미국이 직접 나서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 괜히 제갈 패밀리에 의뢰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찔러보는군.”
연화존자는 잘했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을 찌푸린다.
북한의 무력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해커 부대를 공격한 건 세심한 고려 속에 이루어진 일이지 않나?
“아무리 지지율이 답이 없다지만 너무 욕심 부리는데? 뭐, 그렇게 안 했다가는 답도 없는 상황이긴 하다만.”
칠익회의 숨겨진 비수인 제갈 패밀리를 동원했을 때 이미 해외에 산재한 모든 북한 해커를 제거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제갈세가 내에 존재하는 또 다른 해커들, 타고난 지능이 선풍회류공의 공능으로 증폭된 세계 최고 실력의 해커들을 보유한 범죄 조직에겐 그것이 아예 못할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명백한 동기부여 또한 뒤따르지 않았나?
북한 해커들을 잡으며 중국 공산당에 타격을 주는 건 중원 본토에서 쫓겨났다는 오래된 악감정의 해소와 더불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분쟁 중인 삼합회의 힘을 뺄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연화존자가 약속한 막대한 수수료까지.
괜히 패밀리의 대모 제갈연이 직접 나선 게 아니었던 것이다. 칠익회에 속해 있음에도 연화존자에 대한 충성보다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이익으로 움직이곤 하던 범죄자 두목은 꽤 비싼 몸이었던 바.
그럼에도 절반만 제거한 건 남북한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편이다.
“곤궁해질수록 북한은 중국으로 붙을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그것들의 범죄 행위와 무력 도발을 묵과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국이 나서는 건 주체사상가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일이지.”
연화존자는 이 일을 단순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안다.
국지 도발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북한과 남한의 분쟁은 단순히 누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로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을 이미 넘어섰다.
남북한의 문제가 당사자 간의 문제거나, 그런 거였다면 결론이 나더라도 아마 진작에 나지 않았겠나?
동아시아 정치라는 무대 위에는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공이 많아 배가 산이 아니라 우주로 날아갈 기세이며, 심지어 사공들의 사이란 혐오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미 대통령이 형님을 만나면 다시 얘기를 꺼낼 듯합니다.”
하여 연화존자는 이 엉킬 만치 엉킨 상황 속에서 고민한다.
무엇으로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함께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 청해마도는 들었던 바를 이야기했다. 연화존자가 알아야 할 제법 중요한 정보들이 몇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실패와 우한 폐렴으로 인한 경제 문제가 발목을 잡아 많이 조급한 눈치입니다. 우리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더군요. ‘최후의 기사’가 이번 방한에 동행할 거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럽의 마지막 기사가 이번 방문에 포함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침묵하기를 한참.
많은 것이 뇌리를 스친다. 무엇을 고려하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현 상황에서 무엇으로 국익을 담보할 수 있을까?
긴 고뇌 끝에 연화존자가 몇 가지 준비를 입밖으로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