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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64화 (64/175)

#64화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는 분노로 자신을 불사르며 연화존자를 향해 쇄도한다.

이것은 제법 오래 묵은 분노다.

젊은 시절, 루마니아 극우정파 철위대와의 마찰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알렉산드루는 이후 이어진 조국의 비참한 운명에 노여워하며 미국에 투신, 자유세계 진영에 속한 냉전의 투사로 활약한 바 있다.

유럽 전역을 누비며 대단한 명성을 얻었던 그는, 냉전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까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였다.

저 두려운 강철 인간도, 저 거대한 소비에트도, 저 무섭도록 강대한 마교마저도 지리멸렬한 지금까지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건, 그때 받은 미국의 도움을 아직까지 갚지 못했기 때문.

기사의 명예에 집착하는 알렉산드루는 그 크나큰 빚을 갚기 전까지 떳떳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내공심법을 대규모로 제공하겠다는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의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열병을 앓는 것처럼 가슴이 뜨겁고, 숨이 더웠다.

신진의 양성. 그것은 냉전 시기, 미국의 비밀병기로 불리던 최후의 기사는 해내지 못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비루한 동아시아 갱들이 이 나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미국은 비싸게 주고 모셔 온 노기사를 냉전 기간 동안 여러모로 잘 써먹었지만, 끝난 후에도 활용하고 싶었다.

귀족으로서도, 기사로서도 계보가 확실했고 보였던 실력과 신뢰는 더욱 믿음직스럽지 않았던가?

최초의 기대가 그토록 컸던 이유다.

처음 이 계획, 무너진 기사단을 북미에서 재건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수립되었을 때, 성조기를 단 미군의 기사들이 전 세계를 누빌 거란 희망에 정부 관료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호기로울 정도로 막대한 예산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손에 쥔 구슬도 꿰어야 쓸모가 생기는 법. 인종의 용광로라 자부하는 나라답게 수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음에도 숫자와 깊이 면에서 부족했던 내공 사용자를, 미 정부는 알렉산드루를 통해 늘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싸우는 일이라면 모를까, 새로운 기사를 키워 내는 일에 이 귀족 기사는 재능이 없었다.

냉전 이후 삼십은 그가 가진 단 하나의 무능에 대한 증명이었던 것.

미국의 젊은이 중 누구도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의 수련을 이뤄 내지 못했다. 21세기에 재현된 가혹한 전통의 종자 생활이야 어찌어찌 버텨 낸다 해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오러 개화에 성공한 이가 없었다. 기사를 위한 전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인류가 분쟁을 멈추는 일은 절대 없없음에도 힘 대 힘, 육신과 육신이 부딪치는 전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찾아오는 몰아의 순간 속, 한 줄기 희미한 단초를 잡아 영혼에 내재된 힘을 끌어내는 일은 총알과 화약이 터지는 현대적 전장에선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한때 전미 젊은이들에게 가장 판돈이 큰 부귀영화의 길이라 여겨지던, 이민자 가족이 품을 수 있는 희망 중 최고의 희망이었던 기사로서의 수련은 더는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 같은 무언가가 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알렉산드루의 분노는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보다 오래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 손을 놔라!”

하여 알렉산드루는 국가무공원의 제안이 블러핑이라는 의견을 피력했고, 미 연방 정부에서 노기사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기사단의 재건에 실패했다고 하나, 지난 세월 명예로운 기사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가 미 연방에 보인 충성은 진실이었다.

오죽하면 민간에선 만찢남 캡틴 아메리카라 부르길 즐겨 할까? 방패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돌진하는 그 솜씨만 보더라도 싱크로율이 제법 상당하다.

실제로 냉전시대, 최후의 기사와 조우한 마교도들은 그 숫자가 십인 이하 혹은 서열 50위 이하일 경우 무조건적인 퇴각을 허용했을 정도.

상대가 연화존자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먹히고도 남을 솜씨라는 말이었다.

“흥.”

하나 단거리에서 달려든 그 투박한 주먹질은 연화존자의 차가운 비웃음만 부를 뿐이다.

연화존자는 상대의 뒷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오직 한 손만으로 최후의 기사를 상대했다.

세월을 이긴 바위 같은 근육도, 미 육군 미래사령부에서 알렉산드루를 위해 제공한 최첨단 합금으로 만든 갑옷도, 수십 년 가까이 고련한 육체의 기예와 광폭하게 포효하는, 기사들은 꼭 내공이 아닌 오러라고 부르는 그 힘조차도.

연화존자는 능히 맨손으로 상대했으며 작은 소리 하나 내는 법이 없다.

실로 고절한 솜씨였다. 느슨하게 편 손바닥을 오므리고, 피는 연화존자의 손은 노기사의 주먹질을 흘려 내고 빗겨 낸다.

예의 일곱 빛깔 찬란한 내력의 정화가 분노 넘치는 기사의 주먹질을 희롱하듯 쳐 낸다.

이에 지상 마지막 기사가 치욕감으로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

가장 놀라운 수법이 펼쳐지며 경악조차 앗아 간다.

“커헉!”

“잠시 머리 좀 식히고 계시오, 최후의 기사. 우리의 대화는 조금 나중으로 미뤄야 할 테니.”

촌각의 거리에서 펼쳐진 격공장을 최후의 기사는 예상하지도, 막아 낼 수도 없었다. 순간 주먹을 쥐어 거리를 격하여 펼친 귀하디귀한 수법에 주변의 눈은 놀라 동그래지지만, 무릎 꿇는 것만은 겨우 막은 알렉산드루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는 바.

가슴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슴만 겨우 부여잡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황망함과 두려움이 범벅된 책망은 고성을 타고 다른 자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미 대통령이 어느새 김철민에게 삿대질을 하며 달려가려는 걸 경호원들이 말리지만, 그런다고 말려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려고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던 건가? 잡아서 날 협박하려고? 감히 미국을 뭘로 보고!”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간 연화존자의 손에 목이 잡혀 뻣뻣하게 굳은 자가 대통령의 아들임에야 그럴 수야 없지.

이는 국가무공원의 요청이었다.

사생활에 많은 문제를 일으켜 아버지의 집권 동안 자숙 중이던 자식을 회담으로 데려와 달라는 말에 미 연방정부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북한 해커들이 탈취한 막대한 금액의 회수라는 큰 선물을 안겨 준 국가무공원의 요구를 거절하긴 힘들었다.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아 딸려 보냈던 것인데, 연화존자가 이런 행동을 할 줄 알았다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터.

장내의 긴장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진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연화존자는 상황 설명 없이, 태연하면서도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미국은 위대한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한 인물답게 대통령은 노기 어린 고함을 쳤다. 이에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이 총구를 겨누고 국가무공원 측에서도 은은한 내력을 끌어올리며 대응했지만, 연화존자는 여전히 덤덤했다.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서늘하다.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개척자들의 나라는 위대하냐고 물었다.”

개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려던 대통령의 외침은 다음 순간 삼켜진다.

아들의 몸이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악!”

비명과 함께 타오르며 막강한 열기가 회의장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지만,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내력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있기도 했다. 연화존자가 대통령의 아들에게 내력을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을.

하여 대통령의 아들의 전신엔 두꺼운 땀이 흐르지만, 정작 그를 잡고 내력을 운용하는 연화존자의 신색은 평온하다.

그 와중에 입을 여는 신기마저 보이는 것이다.

“지금의 미국이 진정 자유롭고 위대한가?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루고자 했던 이상이 잘 지켜지고 있나? 글쎄, 난 잘 모르겠군. 나름 살 만큼 살았는데도 잘 모르겠어. 적어도 예전이 좋았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아.”

이제 불길은 붉은색을 넘어 여러 빛깔로 아롱지기 시작했다. 신기한 광경이지만, 순수하게 감탄하기엔 사건과 상황이 가볍지 않다.

주변을 장악한 연화존자의 기세와 알 수 없는 말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뿐.

“나에게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제국이 보인다. 자유를 위한다며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를 지키겠다며 안전할 자유를 침해하는 한 나라가 보여. 실로 그렇지 않나? 그토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도 내부의 문제조차 해결 못 하는 당신네 나라가 이제는 가련하기까지 해.”

“…대체 지금 상황과 그 말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미 대통령의 질문에, 연화존자가 살짝 미소 짓는다.

그 질문을 기다린 것처럼.

“이런 얘기지.”

“카학!”

대통령의 아들이 피를 토한다.

다들 움찔했지만, 그가 토해 낸 검은 피가 바닥을 녹이며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것에 다들 할 말을 잃는다.

“미국인들을 죽이고 있는 좆같은 마약조차 감당 못하는 너희 나라가 걱정된다는 소리야.”

평생을 약물 문제에 시달리며 커리어를 망치고, 충동적인 행위를 일삼아 온 아들의 뱃속에서 나온 고약한 것을 보며 대통령은 말을 잇지 못한다.

“세상엔 실로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더러운 약물이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사람을 죽여 버렸는지 나는 알고 있어. 아, 물론 당신들도 잘 알 테지. 절친했던 친구와 사랑하던 가족이 이 빌어먹을 약 때문에 무너지는 걸 최소한 건너건너 들어 보기라도 했을 거란 걸 알아.”

사그라든 불꽃 아래 컥컥대며 대통령의 아들은 남은 것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대체 저런 게 어떻게 사람의 몸에 있었는지. 그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그것들을 게워 낸다.

연화존자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어.”

“…뭐라고?”

“미국을 좀 먹고 있는 마약 중독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연화존자가 손을 뻗어 대통령의 아들을 일으켜 세운다.

직접 손을 댄 건 아니었다. 허공섭물의 기예를 펼쳐 오물로 더러워진 그를 의자에 앉혔다.

보고 있는 미국인들에겐 남다른 광경으로 다가온다.

“망가진 게 스타워즈만이 아니지. 당신네 나라, 안 그래?”

연화존자는 그제야 돌아본다, 강렬한 눈빛으로.

“군대에 내공심법을 보급하는 걸 이야기하긴 했지만, 꼭 협조가 하나만 있을 필요는 없지. 이쪽이 더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고.”

이제 대통령의 머리가 어지럽다.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인 아들의 모습과 예상조차 못 한 제안에 늙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아, 내가 너무 먼 훗날의 이야기를 했나? 그럼 좀 가까운 이야기를 해 보지. 재선은 좀 어떨 것 같아?”

혼미한 그를 연화존자가 돕는다.

“아무래도 힘들지? 다음 대선이 이 년 넘게 남았음에도 머리통 내려놓고 말하기 좋아하던 전임 대통령하고도 막상막하의 지지율 대결을 펼칠 정도이던데 말이야.”

사실이었다. SNS를 참 좋아하던 전임 대통령은 잡혀 들어갈 건수가 그렇게 많아 보임에도 공화당 내 압도적인 차기 대선 후보로 손꼽히는 중이었고 현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마저도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군대를 강하게 하고, 마약 중독 문제를 해결하면 지지율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안 그래?”

이제 미 대통령은 할 말을 고른다.

중요한 순간이란 걸 모를 수가 없다.

“…마약 중독의 치료 효과는 확실한가?”

“의심되면 아들 데려가서 한두 달 지켜보고 다시 얘기하던가. 시범 케이스를 더 보내도 되고.”

연화존자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대통령의 아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답한다.

무심한 그 태도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다.

“확실하지 않으면 얘기조차 안 꺼냈어.”

연화존자의 호언장담에, 미 대통령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걸로 뭘 원하는 거요, 미스터 김?”

연화존자는 여기에 망설임 없이 답한다.

“글쎄. 아름다운 세상?”

자기 말이 자기도 웃긴지 킬킬 웃는 그에게는 하나 분명하고도 명확히 바라는 바가 있었다.

“아름답지 못한 것들에 의해 아름다움이 파괴되지 않는 세상을 나는 원하지. 설령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세상을 난 원해. 더러운 약물 따위에 빛나는 영혼이 타락하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자세를 바로 하며 그는 말한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 하나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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