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65화 (65/175)

#65화

미 대통령은 다소 지친 얼굴로, 얼떨떨하기까지 한 기색으로 에어포스원을 타고 돌아갔다.

연화존자와 밤을 새워 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 덕에 쌓인 피로는 돌아가면서 풀 일이었으니. 귀국한 그에겐 할 일이 많았다.

사소한 충돌은 불문에 부친다. 연화존자의 손에 의해 몸 안의 더러운 것들을 모두 토해 낸 대통령의 아들이 두 달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명징한 정신으로 약을 끊고 사람이 바뀌었는데, 따지고 들 마음이 들 리 없지.

애초의 약속을 지켜 연화존자가 기꺼이 영향력을 발휘한 것 또한 크다.

언론인 암살 문제 등으로 미국과 대립하며 중국, 러시아 등과 가까워지는 스탠스를 취하던 사우디의 왕세자는 연화존자의 제안으로 미국과의 회담을 받아들였고, 뿐만 아니라 전에 없이 다소 전향적인 태도마저 보였다.

그간 외면하던 국제 유가 안정 협의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형제와 숙부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실권자를 압박할 수단이 달리 없어 전전긍긍하던 미국에게 이는 외교적 쾌거나 다름없는 일.

이로써 미국은 중동 문제에 있어 의외로 한국이, 정확히는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이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냐’라는 윤아영 검사의 질문에 연화존자는 이렇게 답한다.

“내 재산의 상당수가 중동의 왕족들에게서 나온 돈이거든요, 검사님. 앞선 인연이 있다는 소리죠.”

“연화신공을 그들에게 전수한 겁니까?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 고개 뻣뻣하던 왕세자가 미국과의 회담이라는 중요한 부탁을 들어준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저런, 검사님. 고작이라니. 저라는 존재가 전 세계 무공 시장에 일으킨 파란에 대해 아직 모르시는가 봅니다.”

연화존자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저는 이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다른 게 아니에요. 사파 무공과 마공은 더러 완전한 상태로 나오기도 하지만, 정종의 내공심법, 그것도 신공의 영역에 다다른 내공심법이 매물로 나온 건 제가 최초나 다름없거든요.”

씩 웃으며 설명하는 그의 말처럼, 제대로 된 신공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난망한 물건이 맞다.

신공은 검증부터 쉽지 않은 물건이다. 단순히 구결이 보존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오의에 정통한 수련자가 있는지, 익히고 있는 심법이 훼손되거나 오역된 일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부터가 문제인 시대.

유일하게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다고 알려진 대만의 정파 연합은 자신들의 무공을 해외로 반출하는 걸 엄히 금하다 못해 눈에 불을 켜고 무기를 휘두르기 일쑤라는 점도 연화존자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정천(正天)’이라는 무공 상회를 만들긴 했다만. 애초에 구입자의 자격을 말도 안 되게 엄격히 따지는, 가령 국적을 대만으로 바꿔야 하며 그 섬을 종신토록 떠날 수 없다고 못 박아 놓는 바람에 판매 이력 자체가 몇 없는, 그곳과 연화존자와의 비교는 조금 곤란하다.

그렇다고 중동의 왕족쯤 되는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이 뒤에 있다는 강한 의혹을 받는, 그래서 UN 무공헌장을 어기고 사파 무공을 파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순천(順天)’의 내공을 살 수는 없는 일.

다른 부숴진 심법이나 마공은 말할 것도 없으니, 연화존자야말로 원하는 물건을 구하지 못한다는 경험이 거의 없는 중동 왕족들의 구미에 맞았던 셈.

“심지어 진기도인의 속도마저 아득히 다르죠. 어려운 수련이 달리 필요한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운기조식 정도만 해 주면 되고요.”

연화존자가 진기도인단을 만들어 대규모로 내공심법을 공급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밑바탕에는 오일 머니의 세례가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규모 제공의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서구화,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불만이 많은 왕족들을 달래기에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신공인 연화신공의 구매와 제공은 중동 여러 왕가에게 제법 구미가 당기는 것이어서, 연화존자는 지금까지 세 자리에 가까운 왕족들에게 진기도인을 시행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하고도 남는 막대한 부를 축적한 중동의 여러 왕가가 연화존자에게 접촉해 온 건 필연이나 다름없었던 것.

물론 그사이에 있던 기이한 인연이 아니었다면 연화존자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겠다만은, 그건 여기서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김철민이 다가온 인연을 쉽게 물리치지 않았고, 그렇게 연을 맺은 지 벌써 이십여 년. 여러 미묘한 알력이 존재하는 중동의 정재계에서 칠익회는 축적된 인맥을 기반으로 하는 꽤 든든한 커넥션을 지니고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금까지도 말이다. 연화신공의 맛을 보고 매우 만족했던 중동 왕가 여럿에 사후 AS 개념으로 칠익회를 파견해 무공을 가르치고 있으니, 돈독함은 고객 만족 서비스에 뒤따라온 것이다.

“뭐, 덕분에 필요한 일을 제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국가무공원에도 미국을 제어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추가된 것이 나쁘지 않다.

미국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외교 관계에서 영원한 아군은 없으며, 그것은 이 나라에 많은 투자를 해 온 미국이라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

그리하여 연화존자는 지난 세월에 만족하고 있다.

왜 아니겠나? 덕분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뜯어 낼 수 있게 되었는데.

미국의 지원과 국가무공원의 지도 아래 대한민국의 무공 고수들이 미국 본토로 넘어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마약 중독 치료 센터를 만들 예정이다.

이 일의 책임자는 연화존자에 준하는 고수인 청해마도. 그가 직접 가기로 한다.

청해마도가 줄곧 미국과의 협상을 담당했던 이유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에서의 일이 마무리된 후 있을 미국 내 내공 보급 또한 그가 책임지고 이행할 것이다.

인력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산재한 문파에서 뽑기로 한다. 연화존자가 대통령의 아들에게 시행한 것과 같은 완벽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진기요상을 시도할 만한 고수 혹은 그럴 만한 싹이 보이는 내공 사용자를 선발하리라.

문파의 자산을 정리 중이던 증산방도들이 대거 합류하는 건 당연했고 말이다. 동래철권 김도석을 필두로 증산방의 장로들, 방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고수들이 전부 미국행에 오르기 위해 문파의 재산과 신변 정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재결합한 청해마도의 부인이자, 송철우의 어머니가 따라가기로 한 건 조금 의외였지만.

‘합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독수공방 시키려는 거예요? 이 나이에 또?’

이 한마디에 청해마도는 물론이고 운하신권과 연화존자마저 껄걸 웃었지만, 이 사업은 제법 진지하다.

다니엘 김이 사전 작업을 다지고 있다. 그가 미국에서 굴리고 있는 연화존자의 자금 상당수와 그간 쌓은 미국 내 인맥을 총동원해 가며 국가무공원 인력들을 맞이할 사전 작업이 한창.

물론 그럼에도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우선 국내에선 미국과 긴밀한 사이가 될 것 같은 국가무공원에 대한 견제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이때의 견제는 정치적인 것보다도 관료제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컸는데, 가령 윤아영 검사가 밝히는 얼마 전의 일화가 그렇다.

“국가 부처 여러 곳에서 업무를 내놓으라고 하던데요?”

“뭔 생각으로요?”

연화존자는 별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국방부 쪽은 아직 말이 없는데, 복지부랑 여가부 쪽에서 몇 번 찾아왔습니다. 대한잔결회와 당가그룹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 관할이니 넘기라고 요구하더군요. 예산 때문이겠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 흥미진진한 얼굴이 그동안 많이 시달렸던 윤아영 검사에게는 조금 얄밉다.

아마 정말로 뺏겼으면 열받아서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한잔결회는 차후 장애인 회원들을 대상으로 내공심법 보급 계획이 있어서 안 되고, 당가그룹은 민간 그룹이라 우리가 손댈 것도 없다고 했죠. 뭐, 그래도 순순히 넘어가지 않고 급수를 높여가며 찾아와서는 귀찮게 해서 쫓아내긴 했습니다.”

“순순히 쫓겨나던가요?”

“복지부에는 그동안 국가 공인 자격증과 관련되어 조사에 들어가서 뒤집어엎을 거라고 예고했고, 여가부에는 그 많은 예산을 받아가 놓고도 대한민국 출산율을 이따위로 떨어뜨린 주제에 자기들 능력 없는 건 생각 안 하고 매년 돈하고 권한만 늘려 달라고 하는 부처 아니냐고 했습니다. 무능한 것들한테 줄 건 없다고요.”

윤아영의 대답은 김철민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역시. 저 정도는 돼야 믿고 맡기지.

“노발대발하긴 했는데, 나중에 운하신권 원장님께 혼쭐이 나고 좀 잠잠해졌어요. 국가무공원의 일을 뺏어 갈 생각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요.”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를 보며 연화존자는 굳이 그녀의 일에 개입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조금 곤란한 선물 같은 분을 바라보며.

“자, 그럼. 알렉산드루 어르신.”

“…그 어르신이라는 말이 심히 거슬리는데.”

갑옷을 벗은 평상복 차림의 최후의 기사가 불만 넘치는 얼굴로 연화존자를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화존자의 싱글거리는 표정은 가실 줄을 모른다.

일손이 여간 부족한 게 아닌 판국에 보기만 해도 배부른 고수가 굴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거의 조손 관계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네놈이 반로환동한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어디서 개수작인가?”

“오, 개수작이라는 말도 알고. 한국어가 참 유창하시네요. 과연 북한이 두려워하는 ‘미 자본주의 압제자의 철퇴’다우십니다.”

고수는 많을수록 좋다는 진리를 떠올리는 연화존자의 웃음기 어린 입에서 나오는, 소싯적 북조선 빨갱이들이 자신에게 붙여 준 별명을 들으면서도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는 애석하게 찍소리도 내지 못한다.

결국 아쉬운 건 자신이란 걸 알기에.

“너와 난 맹세를 했다. 그러니 너도 지키도록 하…….”

“물론 전 맹세를 지킬 겁니다.”

연화존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전 약속 같은 걸 함부로 남발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저 또한 무공을 익힌 놈이기에, 당신께서 짊어진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압니다. 이런 걸 가지고 장난칠 생각은 없습니다. 절대로요.”

최후의 기사,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가 대한민국에 남은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미 연방 정부의 공식적인 부탁이었다. 내공이라는 미증유의 힘을 다루는 국가무공원이 거래에 있어 어떤 속임수 같은 걸 부리지는 않는지, 제대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최고의 내공 전문가에게 미국이 부탁을 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수십 년간 후학 양성에 실패한 지상 최후의 기사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제 몸은 하나고, 할 일은 무척 많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게 말입니다.”

알렉산드루는 저 말이 옳다는 걸 안다.

수많은 사선과 고난을 넘어온 그가 보기에도 보통이 아닌 스케줄이었다.

당장 손을 대고 있는 무공이 몇 개이던가? 대한민국만 한 나라의 군인 대다수에게 보급하겠다는 것도 모자라 경찰, 소방관에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으로 진행하는 무명공부터 시작해, 직분에 따라 분배될 상위 무공들이 얼추 보아도 한둘이 아닌 바.

뿐만 아니라 진기도인을 할 수 있는 고수 여럿을 양성하겠다는 무모하기까지 한 계획까지.

최후의 기사가 보기에 이 정체불명의 고수는 무공, 그 하나만으로 이 대한민국과 동아시아 전체를 바꿔 버리고자 하는 놀라운 야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그에 더해 알렉산드루 어르신에 대한 제 존경심 때문에라도 가장 시급한 것들을 처리한 후 오러연공법 연구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간을 말해 줄 수 있나?”

심지어 성공 가능성이 그리 낮지 않아 보이기까지 하다.

“육 개월. 육 개월 후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쩌겠나?

“그 기간 동안 여기, 윤아영 검사님을 경호해 주셨으면 하는 게 제 부탁입니다.”

이런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밖에.

노기사와 여검사의 기묘하고도 한시적인 조합은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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