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71화 (71/175)

#71화

러시아 인근, 압하지야의 한 폐허.

전 세계 모든 나라 중에서도 알파벳 상 가장 앞에 있음에도 조지아와의 영토 분쟁으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해 옛 영광의 자취만 남은 채 인적이 끊긴 그곳 어딘가에선 열정적이고 건설적인 대화가 한창이다.

“…내가 너한테 다른 건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그러니까 이번 질문에만 대답 잘하자, 응?”

기실 면밀히 따지자면 대화라 부르기 어려운 상황이긴 하다.

한쪽의 일방적인 질문만 존재하는, 상대방의 일방적인 대답만을 바라는 상황을 ‘말을 주고받는다’라는 의미의 대화라고 부르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않나?

그것도 질문받는 쪽은 혼자인 데다 꽁꽁 결박된 상태라면 말이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야무지게 묶어 놓은 솜씨 하며, 주변을 경계하며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건설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은 질문자에게 있어 확고한 사실.

묻는 남자는 이 문답을 오매불망 기다렸으며, 간절히 알아내고 싶은 사실들이 몇 있다.

“귀령살 어딨어? 너네 문주 말이야.”

질문하는 남자의 이름은 최익현. 대한민국으로 철수 중인 칠익회 안에서 몇 안 되게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동유럽의 지부장 역할을 맡고 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온몸의 흉터, 유럽인에게 밀리지 않는 키와 덩치 등을 가진 억센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그는 난폭해 보이는 첫인상과 다른 스마트한 일처리로 정평이 자자한 이였다.

뛰어난 언어 능력과 더불어 탁월한 추적술, 거기에 모나지 않은 성격과 의외로 유머러스함에 인맥이 좋았고 더불어 칠익회 날개 중 하나를 맡을 만큼 넘치는 역량의 무공과 전술 전략 능력까지 능해 조직 내에서 위상이 높다.

그렇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번 사냥은 많이 고단하고 급박했기에, 흉흉한 기색은 자기도 모르게 비질비질 새어 나온다.

“나 진짜 그거 하나만 알면 되거든. 살령지문의 다른 놈들은 지금 안 잡을게. 얼마나 남았는지 나도 아직 모르겠지만, 약속한다니까? 그러니 네 잘난 스승 팔아 빨리 넘기고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 마무리 짓자고.”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말하는 최익현의 목소리가 피로한 건 그래서다. 살령지문, 소비에트 최고의 암살자 집단은 찾기 쉬운 놈들이 아니었다.

마교 여러 지파 중에서도 은신 능력이 가장 뛰어나기로 유명한, 제 흔적 지우기로는 최고 중의 최고라는 살령지문이 아니던가?

그리고 최근 지난 몇 달은 최익현에게 이를 온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천마격살과 마교내전 뒤에 이어진 냉전의 해체와 마교 이합집산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그럼에도 완벽하게 스스로를 지운 놈들답게 흔적이 발견된 이후로도 한참이나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 그를 곤란하게 했다.

이제서야 잡은 게, 이제라도 잡은 게 다행이라는 약한 생각을 남몰래 할 정도.

‘귀령살의 미끼용 제자들이 그 행방을 알고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빌어먹을 새끼들 같으니라고. 마교의 암살자 놈들이 여전히 살아 있을 줄이야!’

살령지문의 기예는, 정확히 말하자면 마교의 맥을 끊어 버려야 마땅하다는 공감대는 칠익회 내부에서 절대적인 법칙과 마찬가지였다.

불비불명의 연화존자를 수호하는 일곱 날개는 그들의 경애하는 아버지이자 스승이 그 사나운 무지개로 천마불사의 전설을 끊어 버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

그러니 어찌 마교의 잔당들을 살려 둘 소냐? 목숨을 걸고서라도 천마의 전설을 믿는 사교도들을 격멸해 마땅한 바.

그 마음이 지금의 최익현에 이르러 점점 커진 것은 그에게 대한민국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더 그랬으리라.

최익현 또한 비슷한 배경을 지닌 연화존자의 아이였기에, 은거를 깨고 기지개를 피는 절대고수의 곁에 서고 싶은 건 당연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연화존자의 존재만으로도 그건 가치 있는 일.

다른 형제들, 흑응은 물론이고 다니엘 김과 준호, 진호 형제가 연화존자의 곁에 있음에 평생 없던 질투가 나 밤잠을 설쳤을 정도였다.

한때는 자신을 입양 보내며 버린, 부모가 버렸건 아니면 국가가 버렸건 간에, 아무튼 최익현은 버려졌다는 생각으로 대한민국을 증오했고 그로 인해 방황하며 어둡기만 한 길을 걷기도 했었지만, 연화존자를 만난 후 삶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 번도 온 적 없던 봄은 만개하듯 최익현에게 왔다. 오직 연화존자의 자비와 긍휼로써,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됐다.

한때 심취했던 범죄의 길에서 벗어나 칠익회의 품에 안긴 것은 바로 그래서 가능했던 것.

고로 존경하여 따르는 연화존자의 곁으로 가고 싶은 최익현을 방해한 살령지문의 문도에게 말과 행동이 곱게 나올 수가 없다.

“네 스승이 한국으로 간 건 알아. 한국, 어디에 간다고 했어? 어떻게, 뭘 한다고 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빠뜨리지 말고 전부 불어.”

그런 최익현의 손에 잡힌 살령문도는 정신이 살짝 나간 상태.

약물에 의한 상태는 아니다.

청해마도를 위시한 대한민국의 무림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화하려는 진기 요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대저 내공을 지녔다 함은 각종 약물에 저항력이 생기는 법이었다.

최익현과 그의 수하들이 살령문도를 심문하기 위해 자백제 따위를 놓는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어차피 통하지 않을 걸 숱한 마교도들과 다퉈 봤기에 안다. 마교 지파 중 가장 세심함이 떨어지는 북한-마교 거력패부의 광혼공조차 몸을 좀먹는 마약 성분을 가차 없이 밀어낼 정도인데, 그보단 세련된 운용을 보여 준다 알려진 살령지문의 은살지공에 자백제 따위가 먹힐 리 없지.

그래서 최익현은 자신의 내공을 밀어 넣었다.

그 기원이 고대의 종교, 조로아스터에서 기원한 탓일까? 마(魔)를 숭상하며 패(霸)를 추구하는 마교의 마공은 화(火)의 기운이 치우치기 마련이었고, 이는 조화를 추구하는 연화신공과 상극인 바.

홍혈천마가 연화존자에게 패배한 건 이유가 있던 셈이라 하겠다. 연화신공은 존재만으로도 마교도를 압도했으니, 살아남은 마교의 잔존자들은 칠익회를 상대로 늘 열세에 처하며 곤란을 겪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흐흐흐… 크흑… 커억… 꺼어억… 흐…….”

최익현의 내력, 연화존자에게 사사받은 연화신공의 한 자락이 살령지문의 제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공을 잡아먹는다.

해체한다. 연화존자에 비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칠익회의 동유럽 지부장으로서 보기 드문 수준을 지닌 무인의 내력이 옅은 무지개빛으로 화하여 마교의 불길을 잠재운다.

그것만으로 사로잡힌 마교도는 극한의 고통과 혼미함에 손발을 떨며 발작한다. 시시각각 흩어지는 평생 쌓은 내력이 부숴지는 느낌에 말이다.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는데, 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을 거야. 안 그래?”

연화존자의 가르침을 받은 최익현의 솜씨는 악랄하다 불러도 무방했다.

자신들을 사로잡으려는 러시아로부터 도망쳐 동유럽까지 왔고, 다시 칠익회에 쫓기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살령지문의 마지막 생존자는, 손도 발도 쓰지 못하는 모양새 그 자체로 이와 같이 신음했다.

알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서 활약하던 준호, 진호 형제가 익힌 패월삼락공의 연구 결과는 연화존자의 손에서 재해석되어 그대로 칠익회에 배포되지 않았나?

이것이 칠익회가 세계 어느 나라, 어딜 가서도 원하는 정보를 상대에게서 얻어 내는 이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이 단어는 유효하다.

그 오래된 가르침을 배워 이제는 체득한 최익현은 마교도의 등 뒤에 서 있다. 그로써 이 순간, 얼굴도 표정도 없이 오직 고통과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완전히 제압한 상태로 상대가 극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세심하고도 천천히 최익현은 내력을 불어 넣었고, 거기에는 배려나 온기와 같은 것은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냉철한 실험자,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적 정신의 자세로 궁구한다.

살령지문의 문주, 귀령살은 진정 연화존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가?

“그, 그만… 제발… 제발 그만해… 제발…….”

“그럼 말해.”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윽박지르며 손끝에 내공을 집중한다. 밀어넣는다. 무자비함과 두려움. 최익현이 살령지문의 제자에게 심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답을 이야기해. 그러면 끝내 주마. 그것 말고는 네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절대로.”

이 시도는 성공한다.

“무, 문주는… 한국의, 한국에 협력자가 있다고 했다…….”

굴복한 마교도의 입에서 그가 아는 모든 것이 흘러나온다.

“누군지는… 누군지는 아무도, 아무도 몰라… 문주조차 확신할 수 없댔고 그냥, 그냥 있다고만 했어…….”

그렇지만 띄엄띄엄 나오는 진술에 최익현의 얼굴이 서서히 굳는다.

이 고생을 하며 뒤쫓은 것치고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이야기들뿐.

“문주는… 말했다… 연화자, 그 가증… 스러운 자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 겠노라고… 살령지문의 령은 아직 끝나지, 끝나지 않았다… 천마… 불사… 만마앙복…….”

“언제였지, 너희 문주가 한국으로 들어간 건?”

“처, 천마께서는… 치, 칠 년 전…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신… 커허억.”

극한의 고통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눈의 검은자가 서서히 돌아가는 마교도를 보며, 최익현은 맹렬히 머리를 회전시킨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귀령살 또한 천마격살의 현장에 있었으니 연화존자께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 거다. 하나 칠 년 전의 입국이라…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밀입국한 건 아니겠군. 조력자라면 구체적으론 지칭할 수 없어도 북한 쪽 사람일 확률이 높겠어. 살령지문이 북한의 마약 수출을 돕게 된 것도 아마 거기에서 비롯됐겠지. 이 도구 같은 제자들은 거기까진 모르고, 그저 돈이 되니 좋아했던 것 같지만.’

만약 그와 그의 팀에게 주어진 여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심문의 환경이 좀 더 갖추어진 상태에서 질문을 던졌더라면 추론의 모호한 부분들에 보다 확실한 덧칠을 할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곧 최대한 빠르게 압하지야를 벗어나야 했다.

살령지문을 노리는 건 칠익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옛 소련의 영광을 기억하는 그들은 지근거리에 있는 마교도들을 순순히 놓아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쓸모 많은 자들이란 말인가? 문주의 행방이 묘연하니, 이처럼 제압하여 부리기 쉬운 암살자들을 어디서 또 구할 수 있겠는가.

방사능 홍차 같은 것보다야 훨씬 쓰기 편하지. 그렇고 말고.

그만큼 살령지문의 뒤를 쫓으며 고생한 것에는 러시아의 탐욕 또한 지분이 존재했다. 여기까지 오며 대체 몇 번이나 부딪쳤던 것인지.

“너와 함께 온 자들 말고 다른 문도들은 또 있나?”

“어, 없어… 없어… 문주, 문주 말고는 아무도…….”

“그래.”

죽어 가는 마교도의 등에서 손을 뗀 최익현은 곧바로 그의 목을 돌려 버렸다. 오늘 밤, 칠익회 동유럽 지부장이 보인 유일한 자비였다.

이어 곧바로 칠익회는 내공을 머금은 두 손으로 땅을 파서 죽은 마교도를 묻었고, 이후 러시아 정부에 고용된 용병들이 흔적과 시신을 찾아냈을 땐 이미 부패가 진행되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살령지문은 멸문했다. 살아남은 단 하나, 전 세계를 무대로 냉전 최고의 살인자로 손꼽히던 이력의 문주 귀령살을 제외하곤, 모두.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은 은밀하면서도 바빠진다.

안전지대로 퇴각한 뒤 곧바로 연락을 취한 최익현의 정보를 바탕으로 귀령살과 그 조력자를 찾기 위해 나선다. 국가무공원의 실무를 담당한 흑응이 직접 국정원까지 찾아가 귀순한 탈북자들의 정보를 요구했고, 조건에 맞는 이들을 하나하나 추리며 가능성 높은 자들의 감시에 나선다.

경호의 수준 역시 높인다. 아무리 연화존자라 한들 상대는 무수한 강호인, 강호 세력 중에서도 사람 죽이는 일에 특급 에이스다.

안이하여 방심할 수는 없어 국가무공원과 유관 기관엔 비상이 걸린다. 후보자를 추리고, 감시 인원을 뽑고, 경호 수준을 올리고.

하지만 그 모든 걱정이 무색하게 연화존자, 국가무공원의 설계자인 그는 천하태평.

미뤄 뒀던 숙제를 해결하는 데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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