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72화 (72/175)

#72화

두 다리가 땅을 박차니 흙과 자갈이 사방으로 비산하건만, 정작 이 상황을 만든 당사자의 자취는 흙먼지에 가려 쫓기조차 어렵다.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속도, 흡사 맹수와 같은 기세로 그림자는 건너편 상대를 향해 달려든다.

직선적이지만, 막상 자세히 보면 정직하기만 하다고는 볼 수 없는 움직임이다. 기묘하고도 미묘한 곡선을 그리며 일종의 페이크 모션을 취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림자가 되어 달려드는 자는 늘 선호해 왔던 방식을 버렸다. 몸에 익은, 올곧은 수와 힘 대 힘을 요구하는 공방이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여러 번 확인하곤 방법을 조금 바꾼 것.

불타는 푸른 그림자로 화한, 노인이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강력한 남자가 오랜 시간 믿어 왔던 것들을 조금씩 덜어 내고 있는 건 그런 의미이며 며칠 됐다.

수십 년 이상 변하지 않던 태도는 지극히 최근에야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요즘 시대엔 불릴 리 없는 명칭 오러, 그를 제외한 다른 곳에선 내공이라 불리는 힘을 사방으로 퍼트려 상대를 속이려 든 건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그로써 상대의 감각을 교란하여 헛손질, 헛발질을 하도록 유발하려 했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솔직히 말해 큰 자신을 갖고 하진 않았다.

이런 식의 자잘한 기교는 그와 맞지 않다.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먹은, 어디서 뚝 떨어졌는지 모를 동양인 고수를 상대하려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

과연 통할까?

“크흠.”

이윽고 흙먼지가 확 걷히며 두 사람이 손을 맞대고 있는 광경이 드러난다.

알렉산드루와 김철민이 주인공이었고, 누가 열세인지는 분명했다.

알렉산드루의 주먹 쥔 두 팔은 부들부들 떨리며 미간 사이로 굵은 땀을 흘려 보내건만, 김철민의 얼굴은 얄미울 정도로 고요해 더 볼 것도 없다.

노기사의 싯푸른 오러가 분노를 토해 내듯 타올라도 소용없는 일.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수십 년을 치열한 전투 속에 산 그조차 본 적 없는 기묘한 광채, 형형색색의 내공이 맺힌 양손으로 연화존자, 김철민은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 냈다.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고, 오연할 정도로 태평해 보이는 얼굴로.

요 며칠 내내 보고 있다, 저 얼굴.

뜨근한 열패감이 최후의 기사를 감싼다. 역시 익숙함이 떨어지는 기술로 상대하려고 했던 게 잘못인 걸까?

‘그냥 저자가 말도 안 되게 강한 거겠지!’

뒤로 살짝 빠져 거리를 벌리는 그 잠시간에 알렉산드루는 생각했다. 그냥 김철민, 저자가 말도 안 되게 강한 거라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 있게 된 덕이다.

기실 인정 안 할 수도 없다. 처음의 만남에서도 그랬고, 진기도인단의 기초가 잡힌 후 시작한 매일의 대련에서 매 순간 이리 실감하는데, 부정하기도 힘들지.

노인의 시간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걸 받아들이게 했다. 연화존자는 강하다. 감히 홀로 한 나라를, 세상을 바꾸겠다 선언할 정도였으며 얼마 전부턴 확실히 증명해 내고 있다.

그러니 패배는 부끄럽지 않다.

‘그렇다고 그냥 넋놓고 있을 수는 없지.’

양발에 힘을 주고 다시금 박차 거리를 좁히며 들어간다. 내공과 상관없는 육체의 타이밍을 잡고 들어간 태클, 성과가 있다.

연화존자의 팔을 들어 올린 뒤 번개처럼 그의 허리춤을 낚아채니 말이다.

유럽 기사단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정통 기사단의 가르침을 듬뿍 받은 몸답게 알렉산드루 역시 소드 레슬링의 달인이었던 바.

찰나의 순간, 연화존자와 같은 고수의 팔을 젖히고 허리춤을 끌어안은 것만 봐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한 호흡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원하는 포지션을 점유한 건 그런 의미 아닌가?

오늘 같은 날을 위해 그간의 대련에서 한 번도 이 기술을 쓰지 않았다는 건 최후의 기사가 얼마나 주도면밀한지를 알려 주는 일.

그 인내가 달콤한 성공으로 돌아왔고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희열이 노기사의 가슴을 감싼다. 이게 얼마만의 즐거움인지.

그리하여 품에 단검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씩 웃던 알렉산드루였지만, 곧 깨달은 건 몸으로 부딪친 연화존자의 몸이 무척이나 단단하여 마치 뿌리내린 거목 같다는 것.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이미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연화존자가 그의 무사함을 물어오는 상황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큰 충격에 순간적으로 멍한 정신이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연화존자가 허리춤을 껴안은 자신을 그대로 땅에서 뽑아 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것을.

아무리 훌륭한 기술도 기본적인 힘의 차이에는 어쩔 수 없던 모양.

허탈한 마음이 들어 드러누운 채로 한마디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도 안 통하면 방법이 없는데.”

평소 알렉산드루에게서 듣기 힘들었던 나약한 소리에, 김철민은 그만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아지고 있잖습니까?”

“그래. 나아지고 있긴 하지. 이제는 그래도 버티기라도 하는 모양새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알렉산드루가 누운 상태에서 상체를 번쩍 일으키며 씹듯이 내뱉는다.

“그렇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귀령살이 자네를 노리고 있는데 말이야.”

김철민이 보낸 화답은 콧방귀.

존경할 만한 노기사가 아닌 마교의 생존자에 대한 비웃음이다.

“제깟 놈이 절 어쩔 수 있다 믿으시는 겁니까? 그것도 최후의 기사가 지켜 주고 있는 상황에서요? 전 그런 마교의 떨거지보다 알렉산드루 어르신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답니다. 기사단, 일으켜 세우셔야죠.”

능글거리는 그 말에 결국 알렉산드루는 참아 왔던 심통이 터지고야 만다.

“오, 그래. 그래야지. 힘을 내야지.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냈다간 이 최후의 기사는 지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죽은 기사가 될 것 같단 말일세. 아주 머리가 ‘펑!’ 하고 터져서. 젠장. 늙은이 괴롭히는 게 그리 좋던가? 코리아가 동방예의지국이라더니, 그것도 다 옛말인 게 틀림없어.”

“아직 팔팔하신 거 다 압니다. 새로운 기사단을 꾸리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돌아가실 걸, 알고 있다고요.”

“오, 그래? 자네, 참 날 잘 이해해 주는군. 그럼 혹 귀령살이 나타나 자네 가슴팍에 칼을 꽂으려 들 때 이 내가 슬쩍 비켜 있어도 이해해 줄 거라 믿겠네. 기운이 팔팔해서 그런지 온몸이 뜨거워 앞이 안 보일 지경이거든.”

알렉산드루와 김철민이 이와 같은 대련을 시작한 지도 삼 주가 지났다.

거기에는 알렉산드루에게 했던 약속의 이행과 귀령살의 위협이라는 뒷배경이 존재한다.

주로 후자에 치우친 방향으로.

칠익회 동유럽 지부장 최익현이 국가무공원에 살령지문의 멸문이라는 결과를 보고하는 동시에 귀령살이라는, 위치는 물론이고 생김새와 대한민국에서의 현재 신분 등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 속 암살자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던 것.

조력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국가무공원은 신속하게 결정내린다. 귀령살에 대한 수색과 경계를 전개하는 동시에 연화존자를 어디 안전한 곳에 꼭꼭 숨겨 두자고. 되도록 믿을 수 있는 호위와 함께.

이 결정이 연화존자가 나약하다, 뭐 이런 평가의 발로는 당연히 아니다. 그보다는 존경과 맞물린 걱정이 있었고 그것에 더해 어우러진 마교와의 악연과 특출 난 살령지문의 악명이 있다.

저 옛날 살령지문은 소비에트-마교의 얼마나 무서운 비수였던가? 환희락락궁의 미인들이 전 세계의 지도자들을 홀리고, 살령지문의 암살자들이 적대적 상대 진영의 인사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당의 지도에 반발하는 자들을 숙청하던 그 시절의 엄혹함이란.

뭐, 그것도 마교와 손을 잡아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이상적인 프롤레탈리아 시대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라며 긍정하던 시절의 이야기이긴 하다. 지금은 천마를 잃고 도망다니는 범죄자 신세에 불과한 그야말로 잔당들뿐이지.

이것이 방심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지만.

귀령살의 위험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국가무공원은 따로 마련한 안가에 연화존자와 함께 최후의 기사를 밀어 넣는다. 특히 칠익회, 천마격살의 진실을 아는 이들의 의견은 강경하여 흑응 같은 경우엔 매일 연화존자를 찾아가 읍소를 올렸을 지경.

강제 피난에 당사자의 의견은 별로 존중되지 않았다 하겠다.

“어르신은 귀령살이 절 노릴 거라 확신하십니까?”

“물론이지.”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로, 냉전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최후의 기사가 건넨 조언은 이에 쐐기를 박았다.

“살령지문의 체계가 그렇네. 가장 높은 자가 암살 대상 중 가장 강하고 높은 자를 맡네. 낮은 자는 낮은 자를 죽이고.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강자지존의 명예라던가? 실제로 이건 유럽과 미국에서 이루어졌던 살령지문의 암살 중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었어. 살령지문보다는 환희락락궁이 암약하던 동아시아에선 알지 못하겠지만, 그랬네.”

마교를 상대하는 일에 있어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인 기사 중의 기사가 오랜만에 기억 한쪽으로 밀어 뒀던 지식을 꺼내 들며 눈을 빛낸다.

옛 추억을 상기하는 일이 사뭇 즐겁기까지 한 눈치다.

“만약 살령지문이 온전했다면 이런 방법을 추천하지 않았을 거야. 만약 자네가 숨었다면 자네를 끌어내기 위해 문도들을 총동원해서 무제한 암살에 들어갔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살령지문의 문도는 귀령살, 그 빌어먹을 놈 하나만 남았지. 그가 자네를 노리는 건 필연이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보면 정확할 거야.”

하나 판단의 마지막에 보이는 건 아주 약간의 망설임.

“만약 오랜 도주와 마교가 무너진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다면요? 무림인 놈들 맛 가는 것도 순식간 아닙니까?”

“…자네는 마치 무림인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뭐, 그렇게 쉽게 바뀔 성질의 규칙은 아닐세. 강자지존이라는 이상한 원칙으로 움직이는 자들 아닌가?”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연화존자는 안가에 갇혀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마침 해야 할 일이 있는 지금, 잠시 미뤘던 오러연공법의 복원이라는 약속을 지킬 노기사가 함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루 칸차쿠치노에게는 한 가지 확신에 가까운 의심과 미덥지 못한 의심이 각각 하나씩 존재한다.

“마교주, 자네가 죽였지?”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질문에, 연화존자는 말없이 미소 짓는다.

두 사람 다 놀라지 않는다. 왜냐면, 이 짐작은 예전부터 하던 거니까.

“홍혈천마는 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고수였지. 목숨을 부지한 것도 모자라 사지를 붙여서 귀환했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만큼 그는 강했다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당연한 걸 거야. 이 세상에서 천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다는 건.”

그간 국가무공원의 핵심은 아니어도 근처에서 관찰을 지속해 온 터라 알렉산드루에게 있어 이 정도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였다.

자연스레 드는 추론이기까지 했다. 주어진 몇 가지 조건, 가령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반로환동 한 엄청난 고수가 있고 그자가 이끄는 정체불명의 인력들이 있는데 마교의 출현에 과도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그렇다면 결과는 나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몇 가지 비약을 추가하더라도 진실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다는 게 알렉산드루의 내심.

두 번째 질문은 날이 서 있다.

“그러니 넘어가세. 천마는 죽었고, 시간은 흘렀으니 그걸로 된 거지. 하지만 이것만은 묻고 싶네. 자네는 미국을, 나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나?”

그간 관찰해 보니 윤아영 검사 자체는 괜찮았다. 그 정도의 정의감은 검사와 같은 직업을 가진 공무원으로서는 보기 좋은 것.

하지만 연화존자는 다르다. 알렉산드루가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무작정 공포를 느끼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확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긴 세월을 침묵했다 들었네. 이렇게 일을 벌려 얻고자 하는 게 뭔가?”

필생의 소원을 걸고 질문하는 알렉산드루의 모습에, 잠시 침묵하던 연화존자는 짧고 간단하게 답한다.

더없이 진솔하게.

“나는 내 나라가 아름답게 번영하기를 원합니다. 앞선 약속들과 행동들은 모두 이를 위함입니다.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여기까진 제법 진지했지만, 이어진 다음 말엔 최후의 기사는 그만 이를 갈고 만다.

“그나저나 끝나려면 아직 멀지 않았습니까? 잡담할 시간 없습니다.”

괜한 질문을 한 죄로 알렉산드루는 그날 일곱 번을 더 땅에서 굴러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