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연화존자가 안가에서 함께 생활 중인 최후의 기사를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미친 듯이 굴리는 건 단순한 이유다.
-그는 아직 더 강해질 수 있다. 그것도 충분히,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할 여지가 있다.
위 문장이 단순히 연화존자, 그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이건 그보다 본질적인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토대를 쌓아 올리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
알렉산드루는 과학과 기술이 주도하는 시대의 핸디캡을 극복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급격한 변화에 따른 전통의 현대적 변주를 해낼 정도의 수준에 최후의 기사는 다다르지 못했다.
무림이 몰락한 지금을 기준으로 보자면, 어쩌면 기라성 같은 이들이 많던 옛 기준을 생각해 보더라도 알렉산드루가 뛰어난 무인인 것은 맞다.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냉전 시기, 전 세계를 누비며 마교도들과 혈투를 벌였을 때 살아남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 수준이 명맥이 끊긴 오러 연공법이 말하는 ‘각성의 순간’을 대체할만큼 강했냐면, 그건 아니라는 게 김철민의 판단.
그게 아니고선 오러의 각성을 유도하지 못한 걸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오러 연공법을 통한 각성 자체가 드문 현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오러 연공법이란 기술은 그때 그 시절에조차 서서히 사장 중이었다. 전장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던 시절에도.
체계적인 가르침과 검증된 훈련을 통해 내공을 차곡차곡 쌓는 동양의 무림에 비해 기사들의 세계란 선택받은 소수의 엘리트, 그 자체였던 것.
아울러 연화존자는 알고 있다. 유럽이 자랑하던 전장의 지배자들, 기사라 불리는 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러를 끌어냈는지.
아주 어린 나이, 종자 시절에서부터 시작되는 가혹한 생활과 중원 무림식으로 치자면 동공의 묘리를 원리로 삼아 돌아가는 유럽식 오러 연공법이 반드시 필요로 하던 건, 각성의 순간 마주치는 극한의 경험이 아니었던지.
사라진 오러 연공법에서 혹 배울 것은 없는지 살펴보던 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옛 기록은 전한다. 어떤 이들은 일상적인 수련, 혹은 보통의 체력 단련을 하다가 오러를 각성하기도 했다지만, 절대다수의 기사들은 전투로 몰릴 만치 몰린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오러를 각성했다고.
하여 오러에 대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전해져 오기도 한다.
-주의 은총을 받은 이가 죽음과 키스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며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이를 찬양하리라.
그러니 최후의 기사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이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오러를 심어 주지 못한 건, 그들에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오러 연공의 방법을 안겨 주지 못해서라는 것이 김철민의 결론이다.
알렉산드루가 이룩한 전설에 가까운 업적과 대단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연화존자는 그렇게 느끼며, 이것이 연화존자가 분석한 최후의 기사와 미국이 가칭 신대륙 기사단을 양성하는 데 실패한 이유다.
고로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 깊어져야 한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도약해야 한다.
최소한 연화존자, 그와 같은 수준이 되어 무림의 대종사라 불릴 만한 능력을 갖춰야만 오랜 비원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 작업은 생각보다 즐겁다.
최후의 기사는 김철민의 대련 요구에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유를 묻지 않았고 그저 끝없이, 넘어지고 쓰러져도 지쳐 물러나는 법 없이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마치 무공을 이제 막 익혀 몸이 근질근질한, 주체할 수 없는 상승의 욕구를 지닌 초심자처럼 그리했다.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며 갖은 방법을 짜내어 이를 악물고 싸운 건 확실히 그런 모습이다.
연화존자는 이 과정을 기쁘다고 느낀다.
이토록 무공에 매진했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를 떠올리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면서.
일상적인 수련이야 당연히 늘 한다. 주기적으로 소주천과 대주천을 이루고, 전 세계에서 수집한 무공서들을 읽으며 무리를 연구하고, 또 몸을 쓰며 육체를 단련하는 건 당연히 빼먹지 않지만, 이런 경험은 오랜만이다.
이렇게 몸을 움직여 가며 치열했던 적이 대체 언제였더라?
김철민이 이룩한 무공의 경지란 것이 그랬다. 현대 무기와 같은 다른 수단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무공이라는 수단으로 위협할 만한 자는 도통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다툼은 순식간에 끝나기 마련.
그 천마조차 연화존자의 검에 목이 떨어졌다. 다른 누가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
미국이 자랑하는 냉전의 최전선, 최후의 기사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조차 아래로 볼 정도의 무위를 연화존자는 지니고 있다. 가열차게 달려들며 온갖 묘수를 짜내는 노기사의 공격이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
그럼에도 그리운 감정이 들었다.
몸을 부딪치고, 반응을 살피며 다음 수를 고민하고, 속임수를 넣거나 힘을 주어 방어와 공격을 무력화시키며, 김철민은 잊어버렸던 감각과 기분을 다시 찾은 듯하다.
그러자 배우면서 깨닫는다고, 김철민은 생각한다.
연화신공은 완벽한가? 오행무극도와 칠색홍예수는 그것으로 완전한가?
세상에 적수가 없다는 것이 더는 더하고 보탤 것 없는 완전한 것으로 귀결되었음을 의미하는가? 자신 있나?
거기엔 차마 답을 내지 못했다. 이건,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사람도 없는 거니까.
단지 그 즈음, 그를 찾아온 어떤 사람과 사건만이 있을 뿐이었다.
* * *
국가무공원이 마련한 안가는 서울 도심, 서울역 인근 후암동 자락에 위치해 있다.
나무를 숲에 숨긴다는 격언을 실행한 셈으로, 혹 이런 날이 올지 모른다며 국가무공원이 출범하기 전에 사서 기존 주택을 철거한 뒤 새로 지었다.
마당과 지하실을 새로 팠고, 콘크리트를 두껍게 부었다. 알렉산드루와 김철민이 아무리 얌전하게 대련을 했다고 하지만, 그 정도 준비가 아니고선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고 수다만 떨며 오러 연공법의 미래를 논해야 했을 터.
물론 기껏해야 증인 보호 프로그램 정도를 생각한 것이지, 첫 입주자가 연화존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더불어 주변의 다른 다세대 주택도 여럿 사 놓았다. 오고 가는 길목에 위치해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거주 인구가 적지 않고 길이 복잡한 곳이긴 하지만, 무공을 익힌 이들의 능력은 그러한 어려움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쪽지를 들고 온 노숙자를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 후. 남산. 9시.
쪽지를 안가의 대문 앞에 꽂은 뒤 자리를 떴던 노숙자는 곧바로 국가무공원 직원들에게 잡혀 온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들을 수 있던 건 별 도움이 되지 않은 몇 가지 진술뿐.
“어떤, 어떤 사람이 이 종이를 여기다 꽂고 오면 돈을 준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냥 한 건데…….”
어눌한 말투의 노숙자에게서 알아낸 건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소주 두 병과 함께 건네받은 쪽지를 안가에 놓고 돌아오면 다시 술을 사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국가무공원에선 이 진술이 온전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긴 거리 생활로 정신이 온전해 보이지 않은 노숙자는 횡설수설,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줄줄이 내뱉었고 그가 말한 장소로 접근했을 때 찾을 수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할 만한 사정은 존재한다. 최근 국가무공원이 누구 때문에 소란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귀령살 같죠?”
연화존자의 말에 알렉산드루가 고개를 끄덕인다.
연일 가혹하리만치 이어진 대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루는 어딘지 모르게 생생한 기운이 넘친다. 실력에 어느 정도 향상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신중했지만 말이다.
“유인해 내려는 거겠지.”
생각이 깊어진다. 저 악명 높은 살령지문의 암살자가 먼저 접촉해 올 거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에, 그 이유와 대처 방안 등을 떠올리며 잠시지만 침묵한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상대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먼저 침묵을 깬 건 알렉산드루.
신중론을 펼친다. 그것은 마교의 암살자들과 오랜 시간 싸워 본 자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
“살령지문이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도구가 꼭 무공만 있지는 않네. 목표를 죽일 수만 있다면 도구가 무엇이든 가리지 않아. 장담하건대 저 시간, 저 장소에 맞춰서 나가면 자네를 죽일 만한 온갖 수단들이 갖춰져 있을 거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을 것. 도구도, 사람도, 심지어 도덕과 인륜마저도 이용하여 원하는 자를 제거할 것.
살령지문의 악명이 특히나 높았던 이유다.
실제로 그들은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와 같은 방법도 거침없이 써 대는 편이어서, 소비에트의 지도에 반발하던 반체제 인사들의 가족을 포섭하거나 협박해 죽이는 일과 같은 분열책을 즐겨 사용할 정도였다.
이에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지만, 소비에트에 합류한 마교의 지파가 그깟 비난을 신경 썼을 리 없는 일.
알렉산드루는 귀령살이 버릇을 여전히 못 고쳤다며 혀를 찬다. 비록 거리에서 생활한다고 하지만 별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저런 고초를 겪게 하다니.
그 수법이 어설프게 느껴지는 동시에 간절함마저 느껴져 최후의 기사는 이 쪽지를 무시하자고 말했다.
“그럼 어르신 말씀은 안가에 계속 머무른 채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겠지.”
여기까지 말한 최후의 기사는 연화존자를 쳐다보았다. 결정은 그에게 걸렸다는 것처럼.
김철민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번 헤아려 보기로 한다.
“우선 귀령살이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 이상한 일이지만,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무공원의 추적이 부담되거나, 혹은 습격이 임박했거나.”
“일리 있는 말이군.”
“지금으로부터 7년 이상의 시간 전에 탈북한 탈북민들을 중심으로 수색해서 의심스러운 자들을 골라내고 있으니, 걱정이 될 만하긴 하죠. 아무리 귀령살이라도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해외에 있던 살령지문의 제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도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고요.”
국가무공원의 수사는 맹렬하면서도 은밀했지만, 살령지문의 멸문은 그렇지 못해 여러 경로를 통해 공식화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령지문의 멸문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으니, 이는 신분을 바꾸어 살아가는 귀령살이라도 들었을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아무리 한국으로 숨어들었다 한들 한 문파의 문주로서 동요가 아예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동요하여 자신을 노출시킬 정도로 어설픈 자는 아니라고 보네만.”
이러한 알렉산드루의 반박은 김철민의 말에 의해 다시 논박된다.
“절대적 독재자였던 홍혈천마가 죽은 지도 벌써 삼십 년이고, 마교가 사분오열한 건 그보다 더 비참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사람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마교도라지만 그렇게까지 심지가 굳은 인간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그런가?”
“제가 천마를 죽인 뒤 봐야 했던 광경이 어떤 광경인지 아십니까?”
감히 반박하기 힘든 사실 진술로써 그리된다.
“결국 홍혈천마의 시신이라도 수습해 보겠다고 덤빈 건 무극검마, 그자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놈들은 제 한 목숨 챙겨 보겠다며 도망가느라 바빴지요. 강자지존이니, 소비에트의 과도기를 책임지는 무력 집단이니, 어쩌니… 그래 봤자 마교도 중에 사람 새끼라곤 그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론은 같다.
“그런 놈의 같잖은 도발 따위에 넘어가 줄 필요 없죠. 귀령살이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러니 더더욱 저따위 쪽지에 휘둘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김철민과 알렉산드루는 종전과 같은 생활을 이어 나간다.
대련을 하고, 직원들이 사 온 안전이 검증된 먹거리를 먹고, 지루하면 직접 요리를 하고, 가끔은 손과 발이 아닌 대화로 무공의 나아갈 길을 논하고.
별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다. 그사이 국가무공원에서 귀령살의 꼬리를 잡은 것 같다는 보고와 함께, 분주하여 어수선하던 어떤 밤.
낯선 자들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