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밤 11시가 넘자 거리엔 인적이 끊긴다. 보이는 거라곤 창문을 통해 나오는 불빛과 소음, 그 정도가 전부.
지친 하루의 일상을 마무리하는 보통 사람들의 거주지였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골목 사이를 걸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그런 걸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한 덩어리로 보지 못한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도, 늦은 시간 각자의 사정으로 지나가던 사람들도 저들의 목적지가 같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움직임이 고요하여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움직이는 범위가 너무 큰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각자의 거리가 먼 까닭에,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얼른 알아채기 힘들 정도.
알아채려고 들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이 제 다리로 걸어가는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것만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행위지.
무공을 익힌 국가무공원 직원들이 연화존자가 머무르는 안가로 향하는 이 기묘한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상한데.’
연화존자의 안가 근처에 통상적인 경우보다 많은 직원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통상적이지 못한 면을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본래도 많았던 인원이 얼마 전 쪽지 사건, 필시 귀령살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일로 늘어났다. 국가무공원 보고 체계 어딘가에서 정보가 샌 건지, 아니면 귀령살 본인이나 조력자가 직접 혹은 다른 경로로 확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유야 뭐가 되었든 이들은 비상이다.
뭐가 되었든 국가무공원은 귀령살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다. 치욕적이다.
한때 내부에선 안가를 옮겨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을 정도지만 옮긴다면 어디로 갈 것이며, 장소를 바꾼다고 한번 샜던 위치가 또 새지 말란 법 있냐는 반박에 없던 일이 된다.
그래서 사람만 늘었다. 조만간 일이 터져도 터질 것 같았기에.
‘다들 뭐에 홀린 것처럼… 어?’
어쨌든 연화존자의 무위와 알렉산드루만 믿고 있을 수는 없던 것이다. 최후의 기사는 미국의 사람이었고, 외부인이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고 실시간으로 얻어 가고 있으니 연화존자에게 달리 해를 끼치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건 조직의 자존심과 연관되는 바.
아무리 강해도 총알, 폭탄, 독약이면 죽는다. 국가무공원은 그 자명한 사실을 김철민의 목숨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국가무공원에서는 안가를 지키기 위해 많은 숫자의 직원들을 배치했고, 지금 그중 하나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새끼들, 눈동자가?’
길목에 배치된 직원들 사이의 연락과 느껴지는 기척이 하도 기이해 직접 와 본 것인데, 두 눈으로 보니 이상한 점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우선 아닌 척하며 몰려드는 자들은 노숙자 행색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인근 서울역 등에서 여기까지 이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것만 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노숙자들이 왜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그것도 이 밤늦은 시간에.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하여 봐야 하는 건 저들의 표정과 눈빛.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국가무공원의 요원은 황급히 본부에 연락을 취했다.
-지금껏 관찰한 바, 거수자 대다수가 눈이 뒤집어진 채 이동 중. 이지가 제압된 것으로 추정.
노숙자 몰골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에 검은자가 없었다.
-마공의 영향이라고 강력하게 추측함.
누가 왔는지는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기에 밤의 어둠 속에서 국가무공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작전의 개요는 이렇다. 길목에 매복하여 각개격파한 뒤 제압할 것.
어찌 되었든 간에 민간인 밀집 지역이었다. 마공에 홀린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피해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국가무공원 바깥까지 피해가 미쳐서는 안 될 것이었다.
설령 귀령살의 작업에 홀린 당사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안에서 대기하라고?”
“저희 쪽에서 최대한 막아 보겠습니다.”
차도 타지 않고 경공으로 달려온 흑응은 연화존자와 알렉산드루에게 안가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다.
작전의 성공과 대민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놈들은 연화존자께서 여기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움직이시면 따라올 게 분명한데, 그러면 포위망도 함께 움직여야 해서 민간인 피해가 우려됩니다.”
그 말에 김철민은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너도 이제 공무원 다 됐네?”
흑응 역시 마주 웃었다.
“이 정도 했으면 적응해야 맞습니다. 거기에 저희가 원래 민간인 피해는 지양하기로 유명하잖습니까? 다 대단하신 분한테 귀에 딱지가 지도록 제대로 배워서요.”
두 사람의 관계를 대충이나마 아는 알렉산드루가 흥미롭다는 듯이 보다가 입을 연다.
흑응의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마교 지파 중 그런 수법을 주로 쓰던 자들이 있지 않았나? 사람의 정신을 제압하여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던.”
“…묵혈성(????血城)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자들.”
알렉산드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연화존자와 흑응은 떠올린다. 여섯 개의 마교 지파 중에서도 가장 베일에 쌓인. 신비주의적이고, 광신자적인 면모를 보이던 이들을.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어르신 말씀은 묵혈성이 귀령살과 손을 잡았다는 말씀이신데… 묵혈성은 마교의 다른 지파들과 교류하지 않고 오직 천마에게만 충성하는 자들 아닙니까?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는 자들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마교와 묵혈성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 그딴 식으로 고개가 뻣뻣했으니 스탈린한테 깨져서 굴라그로 끌려갔다가 겨우 복귀했을 정도인 놈들이지.”
고개를 주억거린 알렉산드루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재차 주장했다.
“그런데 묵혈성이 나선 것 말고 저 이상한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나? 난 마교의 암살자들과 숱하게 싸워 봤지만 저들에게 저런 종류의 기예가 있다는 건 처음 목격하네만.”
그 단단해 보이기까지 하는 확신에, 연화존자와 흑응은 서로를 바라보다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저희끼리 말해 봤자 답이 없는 일이군요. 일단 잡아 놓고 물어보도록 하죠.”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
비명을 닮은 괴성의 서울 한복판을 울리기 시작했으니까.
“아아아아악!”
노숙자들은 방금 전까지 흐믈거리던 몸짓으로 걷던 것이 무색하게 그들을 막아 세우는 국가무공원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눈동자가 올라가 하얗던 눈동자가 정체불명의 검은빛으로 번뜩이고, 행려병자나 다름없이 살며 비쩍 말라 활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육신이 출처 모를 힘으로 팽팽해졌다.
그 대가인지 이성은 사라졌다. 적대감, 악의 같은 것들로 꽉 채워져 들이받듯 앞으로만 달려간다.
하나 곧바로 막힌다.
“팔다리를 부러뜨리겠습니다!”
마공이 대단하긴 해도 국가무공원의 구성원들이 그리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제도가 개편되기 전, 대한민국 유일의 1급 국가 공인 문파였던 현천문이 그랬고 칠익회라는 보이지 않는 비밀결사의 구성원이란 사실이 그렇다.
아무리 마공의 흉험함이 유명하다 해도 그들이 모시는 자가 누군가? 아는 자는 알고, 모르는 자는 모르는 천마격살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정신이 날아가 버린 짐승 같은 것들에게 겁먹거나, 밀릴 이들이 아니다.
“전부 한곳에 모아. 도로 봉쇄하고, 사진 찍히는 거 조심하고.”
그에 더해 이들의 제압이 어설프지 않았던 덕도 크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심지어 깨물려고까지 드는 마공의 노예들에게 국가무공원은 단호히 대처했다. 이미 한번 사이비 종교와 바다 사이에 숨은 국제 범죄자에게 보여 준 것처럼, 손을 쓰는데 주저함이 없이 신속하다.
최대한 부상을 입히지 않으려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몸 버려 가면서까지 그러진 않는다. 팔을 잡아 꺾고, 그럼에도 반항하면 부러뜨려 움직임을 제한했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했지만, 그건 최소한의 조치를 다르게 일컫는 말.
개중에는 더러 인원 수와 저돌적인 기세로 밀어붙여 안가의 근처까지 다다른 자도 있긴 했지만, 한밤의 소란에 놀란 일반인 중 몇이 웅성대며 동요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공의 노예들은 순조로이 제압된 편이었다.
그런 줄로 알았다.
“이대로 끌고 가서… 어,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팀장님?”
“주변이 너무 어둡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더욱 기이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나둘, 가로등의 불빛과 옆에 있는 동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인원들이 늘어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뿌연 안개가 자욱하다.
“이자들입니다.”
“뭐라고?”
“검은 안개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어요!”
안개의 근원은 곧 밝혀진다. 붙들린 자들의 코와 귀에서 흘러나오는 탁하고 불쾌한 기운들을 목격하며.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어 어떻게든 이들을 안가 근처에서 떨어뜨려 놓으려 하고, 하다 안 되어 막아 보려고 하던 그때.
오직 그들에게만 들리는 어떤 소리를 들은 것처럼 마공의 노예들이 입을 벌리며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양의 검은 안개를 꾸역꾸역 토해 내기 시작했다.
곧 사방이 어둠에 점거된다. 빛도, 소리도, 그 어떤 감각도 검은 바다 속에선 무용지물.
그 사이를 걷는 한 노인만이 자유롭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 한 손에는 오래되어 반들반들한 피리를, 한 손에는 날카로운 꼬챙이를 든 노인은 천천히, 주의 깊게 앞으로 나아간다.
더러는 걷고, 더러는 경공을 펼치며 조심스러운 노인은 물속을 헤치는 한 마리의 이름 모를 야조와도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어느 집 앞에 도달하여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의 눈앞에 오랫동안 기다리던 한 남자가 들어온다.
깊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의 그를 세상은 연화존자라고 부른다.
노인, 귀령살의 얼굴에 금이 가는 건 그래서다.
‘교의 원수……!’
수십 년 동안 바라 왔던 원수의 목을 따기 전, 노인의 가슴이 요동치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다.
귀령살이 했던 그간의 준비는 완벽했다.
사라진 묵혈성의 자취를 찾아 헤매다 손에 넣은 그들의 신기와 무공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온 뒤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노숙자로 분해 그들의 심령을 제압하고, 마공을 심은 건 바로 오늘,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함이었던 바.
수많은 사람 사이를 뚫고 연화존자의 앞에 이르렀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는 이걸 위해 모든 걸 내던졌다.
효과는 분명하다. 천마의 목을 벤 고수는 자신의 출현에도 반응이 없다.
환희가 격통이 되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지만, 참는다.
저 목을 베어 교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는 한편.
그때의 연화존자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안개에 갇혀 보이는 것이 없었다.
깊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감각을 둔화시키고, 소리는 사라지며, 시야는 암전 되니, 김철민의 감각 또한 그렇다.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한 육신의 감각과 기감이 순식간에 멀어져 간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에도 겁먹지 않는다. 두려워 않는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스스로를 믿는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도 평온할 수 있음을, 또 제 집 안방에서조차 삶이 지옥일 수 있음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나온 생의 순간들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상엔 별의별 인간들과 별의별 사건들이 많은 법.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이 보이지 않던 때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어디 연화존자씩이나 되어 고작 몰락한 마교도의 잔재주에 겁을 집어먹을소냐.
하여 그를 천하제일의 무인으로 만들어 준 무공의 일 초식을 펼쳐 낸다. 누가 왔음을 알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내면이 그러라고 속삭였다.
지금이라고. 가라고. 나아가라고.
단 하나의 두려움도 겁도 없이 뻗으라고.
그리하여 어둠은 걷힐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던 바.
“크억!”
시야를 가렸던 안개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산산이 찢겨져 나갔고, 그를 기습하려던 자는 볼품없이 나뒹굴고.
어두운 밤하늘엔 어느새 무지개가 떴다. 이제야 눈을 뜨고 망연한 최후의 기사와 흑응의 눈동자에도 선명한 일곱 줄기 빛자락이 길게 꼬리를 늘이고 있던 그 순간.
부러진 검 옆에 누워 가슴을 움켜쥔 노인이 기어코 한 맺힌 한마디를 내뱉는다.
“칠색홍예수… 연화존자… 그대는 여전히…….”
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