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75화 (75/175)

#75화

밝은 컨테이너 속, 한 노인이 묶여 있다.

안에서 봐서는 이곳이 컨테이너라는 것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인테리어다. 눈이 아프게 하얀 조명과 대비되는 회색의 마감재로 덮인 몰개성한 공간. 심약한 자라면 심각한 정신적 압박으로 느낄 게 분명하다.

사실 그러라고 준비된 곳이다. 여기는 국가무공원이 보유한 비밀 장소, 그것도 심문장으로 쓰이는 곳이었으니.

하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왜소한 노인에게선 장소의 설계자들이 기대했을 당황과 긴장의 기색을 찾아보긴 힘들다.

손과 발가락 사이로 끈을 넣어 의자에 단단히 묶은 것도 모자라 내공까지 금제된 사람치고는 놀라울만치 건조한 태도다. 언제 깨어났는지도 모르게 가만히 눈을 뜨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않는, 눈만 살짝 굴려 가며 몸 상태와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란 냉철하고 또 냉정하기까지.

겉으론 비범함 하나 없이 평범해 보이는 노인임에도 말이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스쳐 가면 잊어버릴, 노화라는 시간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쭈글쭈글한 피부와 얼굴, 삶에 찌든 몰골.

그렇지만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 그곳엔 어둠이 있다. 오랜 원한을 곱씹으며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살며 참아 온 인내와 후회를 차곡차곡 쌓아 만든 짙은 어둠이.

오래 지나지 않아 감겨 버리긴 했지만.

노인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고, 또 쉽게 인정한다.

자신의 내공을 금제한 솜씨가 누구의 것인지야 불보듯 뻔한 일 아닌가?

‘완벽하게 제압당했군. 이건 풀 수 없다.’

평생을 마교의 암살자로 살아온 노인은 냉정하게 상황을 자각한다. 단전에 웅크린 살령문주의 상징, 은형귀혼공의 내공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분노에 휩싸인들, 바뀔 건 없다.

이제 선택권은 저쪽으로 넘어갔다. 어쩌면 ‘그’를 죽이겠다 다짐한 이미 오래전부터 진작에.

마교 지파 살령지문은 천마를 죽인 교의 원수를 암살한다는 목적에 실패했다. 교주를 잃고 복수를 다짐했던 마교의 암살 문파는 이제 실패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 시작이 그리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리라. 노인이 깨어난 걸 대번에 알아챈 것인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나?

익히 아는 얼굴이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꿈에서조차 몇 번을 보았던가? 삼십 년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 얼굴을 귀령살은 지그시 쳐다보며 나직히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늦었군.”

노인은 문을 열고 들어온 연화존자, 김철민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덤덤한 태도였지만 이 순간을 여러 번 상상했었기에, 굳어 버린 마교도의 마음에도 떨리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그는 정말로 연화존자를 죽이고 싶었다. 심장이 다 떨릴 정도로, 차마 편하게 방에 누워 죽을 수 없을 정도로.

암살에 실패해 잡혀 온 주제에 목소리에 설렘이 담기는 이유다.

하나 김철민은 그런 귀령살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구석에 접혀 있던 의자를 펴서는 앞에 앉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들어온 그가 취한 행동의 전부.

피차 인사도, 소개도 필요 없는 사이이기 때문일까? 김철민이 평소의 소란스러움을 접어 둔 채 가만히 앉아만 있는 사이, 귀령살은 냉정하려 노력하며 속으로 질문을 선택한다.

긴 시간 동안 가슴을 찔러 대던 의문을 암살자는 참기 어렵다.

“난 자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할 줄 몰랐네.”

“늦었다는 게 그런 의미였나?”

김철민의 나직한 되물음에 귀령살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 태도가 차분하면서도 고요하니 감정을 쏟아 내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바.

잠깐의 고요가 찾아온다.

김철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무표정에 가깝다. 이미 처리했다는 자신감일까? 모르겠다.

반면 귀령살은 마음 씀씀이가 다르다. 그는 연화존자에게 기이한 친근감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쏠린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한 일이다. 그는 교주가 죽고 난 뒤 지난 삼십 년간 연화존자, 오직 저 사람 한 명만을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해 오지 않았나?

지독한 집착이었다. 집요하기 마련인 보통의 무림인에게조차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지어 마교의 다른 지파들도 복수에 동참하라는 성마른 재촉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곤 손을 흔들며 떠날 만큼, 귀령살은 연화존자를 죽이고 싶어 몸둘 바를 몰랐다.

오죽하면 한 줌도 남지 않은 묵혈성을 제 손으로 죽이고 그들의 신물을 빼앗았을까?

그 과정에서 떠나간 제자도 있었고, 죽은 자도 많았다. 교가 무너지며 챙겨 온 한 줌의 재산도 조직을 갖추며 거의 다 소진했고, 나이를 먹어 기력은 나날이 떨어져 갔지만 기약 없는 비참한 삶을 버텨 낸 귀령살은 오직 연화존자를 죽일 기회만 노렸다.

마교가 삶의 전부이던 누군가에겐 그 길밖에 남지 않았음이라.

그렇기에 그는 김철민과 대한민국의 긴 침묵이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본교를 무너뜨린 직후, 자네가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할 줄 알았어.”

“진실을 알던 사람들이 했던 예상이긴 하지.”

“그러나 그러지 않았지. 전혀, 죽은 듯이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교의 원수을 암살하기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범의 아가리에 들어온 귀령살은 긴 시간, 정신의 많은 부분을 연화존자에 할애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지만, 교주를 죽인 원수가 어떤 생각일지 헤아리기 위해 정말이지 온 힘을 다했다.

진실로 많은 생각을 했다. 연화존자, 그는 누구이며 왜 갑자기 나타나 교주를 죽였는지, 죽여 없애 놓고 왜 다시 침묵하며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는지 등.

증오는 애정의 양면이었을까? 끝없이 연화존자에게 천착하며 이제는 다른 모든 것을 대충이나마 이해하게 된 암살자는 단 하나의 질문에서만큼은 여지껏 적절한 답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

“교주를 죽이고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이 하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교가 지리멸렬하게 무너지고, 이어서 소련이 무너졌을 때. 그때 연화존자가 전면에 나섰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극동아시아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기에.

최소한 마교의 붕괴로 정신없었을 북한의 마교 지파들을 처단한 뒤 통일하는 방안 정도는 시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연화존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조국인 대한민국조차 그랬다. 교주를 죽여 마교를 내전 상태로 밀어 넣은 걸로 제 할 일을 끝냈다는 것처럼, 그들은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자기 일이라 자랑조차 않았다.

당시 막 올림픽을 끝내고 민주화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던 동방의 작은 나라는 자신들의 나라에 저런 고수가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난 자네가 철의 장막을 걷어 내기 위해 교주를 죽였다고 생각했네.”

김철민은 답 없이 여전한 표정으로 귀령살을 쳐다만 본다.

감정이 거세된 암살자는 그 시선을 응원으로 삼아야 할지, 아니면 거북함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의 마지막 궁금증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대체 왜 교주를 죽인 건가? 설마 무림인의 호승심이라는 헛소리를 할 거라면 집어치우게.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지만, 천만에! 작금의 자네를 보게!”

여기가 삶의 종착점이라면 못 할 말이 없다.

“자네가 세상 모든 일을 무공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끝내 돌아와 이 작은 나라를 무림 국가로 탈바꿈하려 들진 못했을 거야! 지닌바 무력이 강하고, 이룩한 경지가 높다 하여 자네와 국가무공원이 해내고 있는 일들이 가능한 거였다면, 다 이긴 전쟁에서 패배하고 쫓겨난 섬나라 정파들이 저 모양, 저 꼴로 타락하진 않았을 거란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부는 잘 알아.”

온 유럽을 공포로 물들이던 암살자, 자유 진영은 물론이고 같은 공산권 국가의 지도자들조차 살령지문의 방문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귀령살은 급기야 평생 지켜오던 부동심을 잃는다.

“부디 대답해 주게.”

도무지 참을 수 없다.

“교주는 왜 죽어야 했는가?”

오래된 질문이었다. 교주의 죽음은 무슨 의미였나? 왜 연화존자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그들의 명성과 실력을 확인시켜 줄 기회를 허무히 날려 보냈는가?

이 질문이 비단 연화존자의 손에 교주를 잃은 마교의 암살자에게만 궁금한 질문은 아닐 것이다.

여지껏 그랬듯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연거푸 질문을 받은 김철민은 이번에도 대답은 않은 채 침묵했고, 귀령살은 끝까지 기다렸지만 나온 것은 답이 아닌 되물음.

그것도 뜬금없기 그지없다.

“묵혈성의 이야기를 좀 해 봐.”

“묵혈성……?”

“그래, 묵혈성.”

김철민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이는 말해 준다. 두 사람에게 넘어야 하는 의문이 여럿 있다는 것을.

“이번에 펼친 그거 말이야. 신기하더군. 나도 견문이 제법 넓다고 생각했는데, 못 따라가겠어. 마교에는 그런 기술이 여럿 있는 건가?”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아무래도 그 물건, 그러니까 자네가 들고 온 그 피리가 나에게 좀 필요할 것 같거든.”

김철민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하다고……?”

“그래. 음… 그러니까 이런 거야. 평소의 나는 절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묵혈성의 신물이라는 그 피리, 그것이 펼친 검은 안개 속에선 좀 달랐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지, 안 그래?”

김철민의 말에 귀령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러니 생각을 정리해 둬. 내가 원하는 걸 준다면 네가 원하는 걸 주도록 하지. 어차피 우리 대화가 오늘로 끝날 것 같지 않아.”

기대하지 못한 자신의 대답에 망연해지는 귀령살을 보며, 김철민은 이런 말을 남기고 컨테이너를 나선다.

마치 풀 수 없는 숙제를 남기고 떠나는 선생님과 같은 모습으로.

“참, 죽겠다고 설쳐서 괜히 여럿 힘들게 하지 말고. 어차피 네 목숨은 국가무공원의 것이니까, 재판 정도는 받게 해 주지. 다음에 보자고.”

원하는 답을 주지 않고 떠나가는 김철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귀령살은 끝내 눈을 감고 격동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시도한다.

서로 할 말이 많다는 연화존자의 대답이 모든 걸 포기했던 마교도의 가슴을 뒤흔든다. 의문을 풀지 못했으나 가능성을 얻은 암살자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팬다.

미욱한 번뇌가 다시 한번 그를 찾아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밖으로 나온 김철민에겐 남은 일들이 있다.

수행하며 귀령살이 갇힌 컨테이너 앞을 지키던 흑응에게 물어보고 지시할 것들이.

“여기 애들한테 말해서 잘 보살펴 주고, 밥도 잘 먹여. 뽑아낼 걸 뽑아낼 때까지. 아, 무엇보다 조심하고. 무공만 무서운 노인네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컨테이너가 있는 방에서 나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며 김철민은 흑응과 귀령살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저자가 그동안 어떻게 국가무공원의 추적을 피했지?”

“노숙자 및 무연고 노인들을 죽이고 신분을 위장했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폐지를 주으며 돌아다녔는데, 일 년 이상 한곳에 머무는 일 없이 계속 떠돌아다녔다고 하더군요. 주기적으로 피해자들을 죽이고 희생자들을 가장했고요.”

“그에 더해 돌아다니며 작업을 해 놨던 거군? 다른 지파에서 훔친 기술과 보물로?”

“…맞습니다.”

작정하고 숨으면 자신조차 잡을 수 없는 노인네였다. 얼마 전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은 안개로 겪어 봤듯 마교의 기술 중엔 상궤를 벗어난 것이 많았는데, 가령 살령지문의 독문 내공심법인 은형귀혼신공 또한 그렇다.

대성하면 천하제일에 다다른 무인의 기감만으로도 온전히 찾아낼 수 없는 특이한 기술이라고 했다.

“살령지문의 무공도 뺏어 보자고.”

입맛을 다셨다. 타고난 오성과 재능으로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그에겐 마교의 기예조차 뜯어고쳐 재창조할 능력이 충분히 존재한다.

애초에 그가 익힌 연화신공이 그렇게 만들어진 신공이었다. 한반도에 내려온 무맥과 근현대사 시기에 한국으로 들어온 중화의 절세심법을 분해하여 재창조해 만든 놀라운 수준의, 안전하기까지 한 위대한 신공.

이러한 능력을 지닌 김철민이기에, 살령지문의 기예가 탐나지 않을 수 없다. 마공을 익히는 건 국제 협약 위반이지만 그걸 그대로 익히지 않고 뜯어고치는 건 불법이라고 할 수 없을 테지.

물론 그것 때문만에 귀령살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귀령살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건 여기까지.

해야 할 뒷수습이 산더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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