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전에 없던 온갖 일을 하는 국가무공원의 누가 아니 그러겠냐마는, 평소의 연화존자는 몹시 바쁘다.
바쁜 몸이다. 근 몇 달을 계속 그랬다. 그럴 수밖에 또 없는 것이 운하신권이나 청해마도가 한 손 보탠다고 해도, 결국 국가무공원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내공심법의 정비는 김철민, 그가 전부 맡아서 하고 있지 않나?
애초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는 이 신생 기관의 창립자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한가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
심지어 내공심법의 창안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다.
먼저 어찌 되었건 간에 국장의 자리에 있기에 해야 하는, 아주 기초적이고 간략한 수준으로 줄여 놓기는 했지만 결재가 필요한 서류 작업이 존재한다.
사람과 집단 사이를 조율하는 일에 얼굴을 비출 때도 많았다. 당가그룹이 그의 의사를 묻기 위해 찾아오는 건 거의 주간 보고 수준. 그 외에도 연화존자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매우 많다.
해외에 남아 있는 칠익회의 움직임을 제어해야 하기도 했으며 그 밖의 다른 협력자들, 여전히 국가무공원 바깥에 머무는 이들 또한 연화존자의 손길을 갈구하는 편.
북한과의 충돌로 여론의 노출에서 배제된 걸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야 될 수준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잠도 못 자고 일한다는 게 뭔지 그대로 실천해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김철민에게는 나름의 여유가 있다.
적어도 윤아영이 보기엔 그렇다.
“정치인들 싫어하던 거 아닙니까?”
조심스레 질문을 하면서도 시선은 자연스레 김철민의 손에 들린 피리로 향한다. 근래 김철민이 보이는 여유로움엔 필시 저 물건이 개입한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은 낡았고, 검다. 대나무로 만든 걸로 보이는데 어느 시절,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윤아영의 안목으론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손때 묻은 골동품이었지만, 거기에 엮인 사정이란 걸 모른다면 마교의 물건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외양.
하지만 그 내력이란 것을 떠올리자면 어쩔 수 없이 불쾌하다.
연화존자가 들고 있는 저 오래된 피리가 마교지파의 신물이라는 사실만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다.
저게 범죄의 증거이자 압류품이라는 사실이 강직한 검사의 신경을 콕콕 건드린다.
아마 저것의 밝혀지지 않은 메커니즘, 그러니까 사로잡힌 용의자이자 무림에서 귀령살이라 불리는 범죄자가 증언한 바와 같이 인간의 이지를 제압하여 생명력을 검은 안개로 바꾼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아니었다면, 증거 보관실에 넣어야 한다며 한 소리를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전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해서 당연히 잘했다고 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칭찬이라도 바라신 얼굴이군요. 하지만 전 진심이랍니다. 굳이 어렵게 갈 필요 있습니까? 그의 제안은 나름 합리적입니다.”
대답을 들으면서는 저자가 혹시 마교의 신물에 정신이 팔린 건 아닌지, 윤아영은 살짝 고민한다.
그럴 법한 이야기 아닌가? 저 물건이 주는 감흥이 알 수 없는 정신적 이상을 불러일으켰다거나, 아니면 정말로 독성 물질 같은 게 뿜어져 나오는 것일 수도.
현대로 들어서며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림인에 대한 편견, 주화입마 혹은 오랜 시간 한 가지에 몰두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곤 하는 어떤 벽이 있는 태도 같은 것들이 마교의 물건과 결부되어 발생한 것은 아닌지.
물론 지나가는 상상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철민, 저 사람이 그렇게 되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자신을 방해하는 자라면 마교가 아니라 마교 할아범이 와도 밟아 죽이고 말 거라 생각하는 윤아영의 상념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진실과 닿았다.
“정치라는 것에 그런 힘이 없다면 수많은 사람이 그 분야에 투신할 리 없잖습니까. 권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이랍니다.”
정치권력이 주로 안 좋은 쪽으로 발휘되니 문제라 중얼거린 뒤 이어지는 그의 말은 광증에 빠졌다고 의심하기엔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이다.
사뭇 계산적으로 느껴질 만큼.
“검사와 판사는 있는 법을 가지고 결과를 내는 거고, 정치인은 그 법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니 올바르지 못한 현실을 바꾸자면 정치를 하는 게 맞죠.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대통령의 말에 틀린 게 없습니다. 새로운 법, 제대로 된 법을 만드는 것만큼 강력한 힘이 인간이 가진 것 중에 어딨습니까? 국회에서 만든 단 몇 줄로 사회의 돌아가는 방식과 수많은 사람의 삶이 바뀌는데요.”
그는 빙긋 웃으며 대통령의 말을 긍정한다. 정치야말로 윤아영이 하고자 하는 일에 꼭 적합하다는 그 말을.
“저를 보십시오, 윤 검사님. 저 같은 놈조차 그 사실을 알고 이렇게 온갖 일을 떠맡아 가며 고생 중이지 않습니까? 돈과 무공, 심지어 사람조차 권력 앞에선 도구에 불과한 겁니다. 본인이 옳다고 믿는 정의를 이루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유일한 수단이죠.”
그러는 동시에 윤아영의 물음을 부정한다.
“그리고 오해가 있습니다. 저는 정치인을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여전한 웃음으로, 손에 든 피리를 만지작거리며 김철민은 말한다.
“저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쥔 위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차라리 하지 말았으면 하거나, 제 욕심을 채우겠다며 뻐그덕대는 것들이 싫을 뿐입니다. 검사님이 많이 잡아넣으셨던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그래서예요.”
그에 반해 윤아영은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
“그 꼴을 보면서 느낀 겁니다. 분명 정치에 투신한 이들 중에는 처음부터 욕심만으로 움직였던 사람도 있겠지만, 한때는 정의롭고 선량했던, 꽤 괜찮았었을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역시나 그녀 또한 검사 노릇하며 보고 들은 게 있나 보다.
정치란 사람을 바꿔 버리는 괴물의 아가리라는 사실을.
“멀쩡했던 사람도 권력의 맛을 보고 완전히 바뀌는 걸 여럿 봤습니다. 욕심일까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하든 간에 옛날부터 생각했습니다. 정치에는 발길조차 들이지 않는 게 좋겠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김철민의 사무실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햇빛은 방 안의 먼지를 적나라하게 비춘다. 깨끗해 보였지만, 또 실제로 깨끗한 공간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을 떠도는 것들이 있음은 그로써 뚜렷하다.
순간 윤아영은 김철민의 손 안에 든 피리가 무어라 속삭이는 것 같아 흠칫했다. 뭐라고 부르는 듯한 목소리, 구체적으로 뭐라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목소리가 그 안에서 들려와, 순간 너무나도 놀랐다.
연화존자의 손바닥이 피리의 입구를 막아 버린 건 그러니 시의적절한 조치.
“그럼에도 전 검사님이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윤아영은 김철민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신뢰하는 얼굴의 그를.
“제가 목격한 당신이라면 정치에 투신해도 잘 해내실 겁니다. 너무 잘 해낼까 봐 조금 겁나기까지 하네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재밌다는 표정으로 연화존자는 자신의 앞선 판단을 수정한다.
끌려가는 것보다는 끌고 가는 것이 낫겠다면서.
“뭐, 그래도 생각해 보니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한 게 영 나쁘지만은 않네요. 한번 튕기고 하면서 몸값을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쉽게 보여서야 안 될 일이죠. 또 최근 대통령과의 사이도 그렇고, 그 아래로 엮인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적 역학관계가 한둘도 아니고. 생각 좀 해 볼 문제네요.”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 우리도 미리미리 준비해 둡시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윤아영의 눈빛에도 김철민은 대답하지 않은 채, 마교지파 묵혈성의 정체 모를 신물만을 손에 꽉 쥐었다.
묵혈성의 피리가 연화존자의 지대한 관심을 끈 건, 앞서 윤아영이 가졌던 의문인 그것이 가진 불가사의함이었다.
한반도 제일의 무맥을 집안으로 뒀기에 중원 본토를 비롯한 온갖 신비한 무공과 물건들에 대한 조예가 깊은 김철민이었는데, 그런 그에게도 이 피리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전혀 밝혀 낼 수 없는 미지였다.
마교의 가장 내밀한 사정인지라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다른 것으로 바꾼다니. 무슨 이야기 파는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사람의 생명력을 힘으로 삼아 검은 안개가 나오고, 피리의 주인은 이를 다룰 수 있다?”
“일단은.”
한밤의 습격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안개에 대한 설명이 연화존자는 이해하기 힘들어 귀령살을 유심히 바라본다.
진실일까? 거짓일까?
여전히 묶인 상태인 암살자는 늙은 육신에도 불편함 하나 없이, 자신이 뭐 틀린 말이라도 했냐는 것처럼 뻔뻔한 얼굴이다.
“묵혈성 놈들은 그 물건을 ‘묵죽(墨竹)’이라고, 묵죽이 뿜어내는 검은 안개는 ‘암해(暗海)’라고 불렀다. 암해를 다루는 방법은 ‘묵악(墨樂)이라 했으며, 놈들이 지닌 힘은 거기에서 비롯되었지. 실제로 저놈들의 저 기이한 수법이 아니었다면 빠져나가지 못했을 큰 곤란함이 소비에트 치하 본교의 역사에는 여럿 존재했다. 당장 스탈린, 그 미친 의심병 환자의 숙청도 피할 수 없었을걸?”
따지고 보면 귀령살은 그래도 된다. 그는 현재 국가무공원에 전폭적으로 협조 중이었으니까.
그의 입을 여는 데에는 고문도, 설득도 필요 없었다. 오랜 세월, 아주 희미한 단서들을 모아 연화존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추론해 낸 뒤 올 지, 안 올 지도 모르는 기회를 상상하며 노숙자들을 상대로 묵묵히 작업을 해 온 그는 완벽한 실패 후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기에.
국가무공원 내부에서는 여전히 의심과 의혹을 거두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연화존자가 보기엔 확실히 그렇다.
은형귀혼신공마저 기꺼이 내놓은 걸 보면 말이다. 살령지문의 문주지공을 아무 대가 없이 넘긴 것만 봐도 귀령살의 상심과 후련함은 꽤나 커 보이는 모양새.
그게 아니면 설마 알려 준 내공 구결의 일부를 잘못 불러 줘서 주화입마를 유도하기라도 한 걸까?
“그랬던 묵혈성 놈들은 다 죽었다. 이제 세상엔 없어.”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것이 연화존자 김철민은 천마살해자였다.
천마신공마저 깨 버린 절세무공의 소유자가 잘못된 구결로 어떻게 될 거라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
“애초에 내가 만났을 때 살아 있던 놈은 하나밖에 없기도 했지만.”
게다가 잘못 가르쳐 준 걸 못 알아볼 정도인 사람이 새로운 내공심법을 창안하여 국가를 상대로 보급한다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실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로 귀령살이 연화존자의 주화입마를 원했다면, 그건 너무 희망찬 암살 시도가 아닐지.
“하나밖에 남지 않았었다고?”
“그래. 놈은 산속의 동굴에 다 죽어 가는 모양새로 누워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모양새였지. 그래서 같은 천마신을 믿는 입장에서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줬다.”
김철민이 보기엔 이 전설적인 암살자도 끝까지 가 보려는 것으로 보인다. 더 없이 솔직함으로써.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연화존자의 죽음이 누군가의 손에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심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남아, 결과를 보는 것.
“그렇지만 그건 너무… 인위적이었지.”
다만 묵혈성의 최후를 상상하는 얼굴만은 심히 불쾌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의 어느 이름 없는 자락, 동굴 안에 숨은 묵혈성의 마지막 생존자는 제 죽음은 물론이고, 내가 올 거란 걸 아는 눈치였어. 묵죽은 물론이고, 묵악을 불러 암해를 다루는 방법을 상세히 적어 넣은 공책을 예쁘고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았던 모양새가 말이야. 심지어 날 보고도 아무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더군. 왜 천마께서 죽으신 뒤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그것도 교의 재산을 헐값으로 세상 곳곳에 뿌렸는지 변명조차 하지 않은 모양새에서는 더러운 냄새가 났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어.”
귀령살의 눈이 번뜩이며 그의 앞에 앉은 김철민을 노려본다.
“네놈을 죽이려면 말이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널 죽이려고 다가가던 날 바라보던 네놈의 미친 눈빛을.”
그러곤 기세를 잃고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다 지난 일이군. 근데 왜 이런 것이 궁금하지?”
이에 연화존자는 수월히 답했다.
“이 물건 덕에 원하던 바를 하나 이뤘거든.”
“원하던 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최후의 기사가 마지막 기사가 아닐 수도 있게 된 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