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국가무공원이 대한민국 군대에 대규모 내공심법을 마련하기 위해 시범 부대를 운용했던 강원도의 한 훈련장.
급하게 마련하긴 했지만 그래도 버섯이니 약초니 하는 것들을 캐겠다며 들어오고도 남을 민간인들을 막기 위해 울타리 작업과 경고문 부착에 공을 많이 들인 이곳은 오늘, 앞으로는 다른 용도로 쓰여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됐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광소와 함께 훈련장을 모조리 부수고 있는 한 중년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거대한 도끼, 서양에서 할버드라 불리는 모양새의 도끼를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그 움직임에는 오랜 시간 쌓아 온 숙련된 법도와 절도가 있었지만,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와 힘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푸르른 빛으로 휩싸인 쇠붙이가 만들어 낸 가공할 파괴력은 그야말로 압도적.
과장 조금 보태서 훈련장 안 산속에 방금까지만 해도 없던 계곡이 생기고, 나무들의 뿌리가 드러나며, 바위와 봉우리가 조각나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사태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사내는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테스트는 차고 넘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백 년 만에 새로 뛰는 듯한 심장과 피는 아직 더 날뛸 수 있다며 식어 버리길 거부한다.
그럴 수밖에. 이 얼마 만에 되찾은 활력이란 말인가?
“으하하핫!”
물론 사내가 그 나이대의 친구들처럼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했던 건 아니다.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 중 숨 쉬는 사람보다 관짝에 들어간 사람이 훨씬 많으니, 건강함으로만 따지면 동년배 중 최고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지.
그렇지만 그조차 되찾은 젊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이 순간순간, 매 호흡마다 깨닫는다.
젊음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으아아앗!”
고양된 기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양발에 힘을 잔뜩 주고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타오르는 여름의 햇살조차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전신의 모든 힘을 응축하여 순식간에 최고점까지 치솟는다.
그리하여 상승이 멈춘 하강의 시간. 이제 더는 노기사로 불리지 않을 남자는 속 안에 든 모든 것을 아래로, 또 아래로 쏟아 낸다.
-콰앙
충격은 멀리까지 퍼져 산속의 동물들을 도망가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지역사회를 놀라게 만들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요란한 굉음은 어디 지진이라도 난 게 아닌지, 혹 군부대의 사고는 아닌지 민간인들을 걱정하게 만들어 국가무공원이 훈련 상황이라는 공문을 보내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는 개의치 않는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로써 분명해졌으니까. 그날 밤, 마교지파 살령지문이 연화존자를 죽이기 위해 깔아 놓았던 정체불명의 안개 속에서 겪은 변화. 그것이 단순히 외모에만 머문 것이 아님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는데, 공문이니 뭐니 하는 사소한 문제 따위 접어 둘 수밖에 없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렇게 가시지 않은 흥분으로 바닥에 내려앉아 대자로 뻗은 최후의 기사에게 시원한 얼음물을 던지는 건 멀찍이서 지켜보던 연화존자.
히죽 웃으며 묻는 모습에 알렉산드루의 눈이 가늘어진다.
“…너무하는군.”
“뭐가 말입니까?”
“이 좋은 걸 자네 혼자만 누렸단 말인가?”
누워 있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알렉산드루의 얼굴이 전과는 달랐다.
예전에도 물론 나이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젊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완연한 노인의 외양이었던 겉모습은 오늘, 온데간데없다.
그는 잃어버린 중년을 되찾은 것이다. 연화존자만큼 극적으로 어려 보이진 않았지만, 거스른 세월을 생각하면 그 이상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
육신마저도 말이다. 선이 굵은 호쾌한 인상으로 바뀐 얼굴뿐 아니라 전성기의 그때처럼 꽉 채워져 굵어진 어깨와 팔, 허벅지와 허리를 보고 누가 이 사람을 얼마 전의 알렉산드루라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것 때문에 소란이 있긴 했다.
“젊어지니 이리 좋은데 말이야. 자네만 이 기쁨을 누렸다니, 그 생각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군그래.”
“이게 가르쳐 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고, 가르쳐 줄 수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저뿐만이 아니라요. 어르신은 다른 사람에게 이 감각과 깨우침을 전달할 자신이 있으신지요?”
그 물음에 알렉산드루가 마주 웃으며 답한다.
“절대 아니지.”
국가무공원이야 연화존자라는 케이스가 있어 놀라긴 했어도 받아들일 수는 있었지만 나머지 사람들, 가령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이나 주한 미국 대사관과 주한 미군 등은 안개 걷힌 밤에 돌연 나타난 이 사람이 정말 알렉산드루가 맞는지 확인하느라 한동안 부산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재빠르면서도 다급했던지, 사정을 모르는 외부에서는 한반도에 비상사태가 일어난 게 아닌가 우려를 표시했을 정도.
소란하고, 또 소란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의 사진과 대조하는 일차원적 작업을 시작으로, 본토에 보관 중인 알렉산드루의 물건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검사를 통해 비교하는 등의 온갖 일들로 잡혀 있던 최후의 기사의 신원 확인이 끝난 건, 바로 어제.
그가 오늘에서야 완전히 바뀐 자신을 실감하는 이유다.
‘반로환동 한다고 유전자가 바뀌거나 하는 일 따위 없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려나?’
이런 생각을 하며 알렉산드루의 툴툴대는 말을 듣던 김철민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저보다는 오히려 마교 놈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검은 안개, 마교지파 묵혈성에서 암해(暗海)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르신의 반로환동은 계기를 잡지 못했을 겁니다.”
연화존자의 농이 다분히 섞인 말에 알렉산드루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할 말을 찾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궁색하다.
연화존자의 말엔 틀린 게 없다. 최후의 기사에게 기연은, 그야말로 기이하고 기가 막히게 찾아왔다.
최후의 기사가 평생을 싸우던 적의 신물로부터 기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놈들이 날 위해 깔아 준 건 아니지 않나?”
그 말에 그만 참지 못하고 김철민은 목젖이 드러나게 웃는다.
“네, 맞습니다. 마교가 다른 누구를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할 놈들이 아니지요.”
결국 이 깨달음은 알렉산드루의 것이었다.
깨달음이란 불가에 말하는 그것처럼 벼락처럼 오는 것이라지만, 알렉산드루가 쌓아 온 세월과 최근의 대련으로 얻은 자극이 없었다면 그저 허우적대다 끝났을 수도 있는 일.
놀라운 순간은 누구도 미리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마교는 그저 거기에 끼어든 구성품일 뿐.
“저조차도 어르신께서 반로환동에 성공하실 줄 몰랐습니다.”
연화존자가 귀령살을 붙잡고 정보의 교환을 제안한 건 알렉산드루의 반로환동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루는 전신의 감각을 제한하는 마교의 안개 속에 빠지는 순간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영혼 위에 쌓인 기억과 역사, 전부를 내려놓고 오롯한 나와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라고.
한편으론 이렇게 말했다. 경험, 의무감, 부담감과 압박감, 기쁨과 슬픔의 감정 따위를 내려놓고 보니, 답은 너무나도 쉽게 나와 허탈했다고.
웃음마저 나왔다며 알렉산드루는 털어놓았다. 솔직했다.
이 진솔함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면도 있다. 배운 학문이 다르고, 경험과 배경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결국 알렉산드루가 겪은 기이한 현상, 반로환동이라는 믿기 힘든 기묘한 사건을 온전히 이해해 줄 것은 이 세상에 연화존자 한 명뿐.
“이제는 길이 보이십니까?”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다.
“보이네.”
알렉산드루는 예전의 자신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연화존자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전에도 강했지만 격변하는 시대의 무게를 이겨 낼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실패는 그렇기에 예정되어 있던 것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법이었음에도 앞을 보지 못했으니.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네. 아직은 모호하여 확실하진 않지만, 할 수 있을 거란 그런 기분이 들어.”
그렇기에 그가 되찾은 젊음은 돌아간 것이 아니다.
육신의 시간은 거꾸로 먹었을지언정 최후의 기사는 분명 앞으로 나아갔다.
“기사단을 재건할 걸세. 약속을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더 강해졌고, 더 높아졌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는 건 그로써 가능하다.
“모두 자네의 도움 덕분이지, 고맙네. 자네가 없었다면, 자네의 옆에 내가 없었다면 죽지도 못한 채 억지로 살아가야 했을 거야. 갚아야 되는 빚, 약속… 이루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 진실로 고맙네.”
최후의 기사는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국가무공원의 능력에 대해 완벽히 확신이 있는 건 아닌, 앞선 성과들로 인해 그런데로 믿을 만하여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 만하다고 여기고 있는 미 정부로서는 미심쩍은 가운데 내린 결정이었다.
그간의 실패가 얼마나 뼈 아팠단 말인가? 하여 고작 일 년도 안 된 시간 만에 벌써 목표에 도달했다고 믿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반로환동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외면할 수는 없어 연방 정부는 알렉산드루의 귀환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알렉산드루의 심정은 긴가민가한 미 정부와 다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혹 있겠나?”
그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하여 연화존자에게 이 은혜를 갚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과 유럽에 친구들이 많으실 테죠?”
“당연하지.”
무림의 늙은 생강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 다 이 문답으로 서로가 원하는 것과 해 줄 수 있는 것을 알아챈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연화존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답은 빤히 나와 있는 것.
갚겠다면, 김철민에게 없는 것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무공으로는 적수를 찾기 힘들며, 이를 바탕으로 쌓은 재산과 인맥 또한 남다른 사람이었다. 이번 일, 미국을 중동에서의 망신으로부터 구한 일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어떤 면에서는 미국의 자산,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게 연화존자 아닌가?
부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유능하니, 근 시일 내의 대한민국만 봐도 그렇다. 국가무공원이라는 조직을 새로이 만들고, 이를 방해하려는 자들을 처리하는 일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착착 이루어졌다.
“얼마 전, 제 의형제가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일이라면 워싱턴에 말을 해 놓지.”
기민하게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
“내 친구들은 거의 죽어 전능하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지만, 그 자식과 손자들은 아직 살아서 나름 하고 있는 것들이 있네. 개중에는 제법 큰 사람이 된 녀석들도 있지. 내 그들에게 자네의 의형제를 주의 깊게 살펴 도우라고 말해 줌세.”
“감사합니다.”
“유럽은 무슨 이야기인가?”
유럽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뜬금없다.
얼마 전 마교의 잔당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고 얼핏 짐작하고 있긴 하지만. 유럽… 유럽이라.
“다른 건 아닙니다. 그쪽에 남아 있는 제 수하들이 곤란해지는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보험을 들고 싶은 거니까요.”
“당장 필요한 건가?”
“나중에 필요할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내 직통 번호를 남기도록 하지.”
“그리고 덤으로, 윤아영 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알렉산드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흙먼지를 털 생각도 없이 연화존자에게 다가온다. 그 기세가 흉흉에까진 이르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렬하다.
이 질문만은 영문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연화존자는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윤아영 검사에 대해 내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지?”
“참 괜찮은 사람 아닙니까?”
침음성을 낸 최후의 기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의아함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윤 검사님이 참 대단하다는걸요. 아무런 배경도 없이 사람이 그렇게 올곧은 거, 쉽지 않잖습니까?”
“나 또한 동감일세.”
“그런 사람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이어진 김철민의 말을 듣고 최근 윤아영에게 건네진 어떤 제안들이 있었단 걸 알게 된 최후의 기사는 이내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한 손 보태겠노라고. 보탤 수 있다고.
그건 덤이라기엔 너무 큰 대가였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