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독붕 당청영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당가그룹의 대구 지사를 돌아보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도중 미약한 짜증이 올라오고 있는 자신을 알아챘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불쾌감은 육신의 것, 피로나 쇠락이 아니라 마음의 것이었다. 당가 내에서도 손 꼽히는 고명한 솜씨의 독인인 그녀였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고통은, 몸이 아닌 내면에서 온다.
그에 먹히지 않고 들끓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쓴다. 가문의 가르침이다.
먼 예전부터 독과 암기의 명가인 사천당가가 과연 정파가 맞느냐는 말을 들어오긴 했다만, 그 가르침을 들여다보면 부인할 수 없는 정종무림의 기품이란 것이 있고 바로 이와 같은 때에 발휘되어 힘을 내곤 한다.
감정의 동요 따위에 먹혀서는 부끄러운 것이다. 독과 같이 위험하고, 경원시되는 수법을 다루는 이라면 그래야 했고, 요즘 같은 크고 중요한 일을 진행 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지칫하다가는 미끄러지고 말리라.
‘하지만… 짜증나는군.’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당청영은 최근 자신이 처한 입장이 그리 마음에 들지만은 않다.
‘그분의 뜻을 좇아 따르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불합리한 기분이야.’
그녀는 한국에 온 이후로 3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
할 일은 그야말로 산더미여서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전국에 당가그룹의 지사를 거의 시차 없이 동시에 올리는 건 과로 혹은 과로사 직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정도 대규모 자금과 인력, 부산물로 따라오는 다른 많은 것을 처리하자면 잠자는 시간마저 아껴야 했다.
그룹이 보유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였고, 국가무공원이 있는 힘껏 밀어주며 도와줌에도 그랬다.
할 일은 넘쳐 나며 사람은 부족하다.
연일 대규모 채용이 끊이지 않는 건 그래서이기도 하다. 그룹에 도움되는 인재들을 확보하고 길러 내는 건 말 그대로 시급했으니, 이전에 했던 인터뷰, 자리를 잡지 못한 인재들이 많은 이 나라가 매력적이란 건 단순한 입발림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당가그룹의 확장 일색의 행보를 방해하려는 자들이 세상에는 많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나마 유럽 쪽에서 움직이던 자금경색의 기미는 연화존자가 직접 최후의 기사에게 부탁하여 압력을 어느 정도 해소하며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일이 줄어들었을 뿐, 해야 할 것들은 여전히 많다.
눈에 거슬리는 사실들 역시도.
‘감히 마교 따위가 어딜…….’
연화존자에 대한 귀령살의 암살 시도는 당청영으로 하여금 국가무공원과 틀어지게 만들 뻔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정말로 당가그룹은 국가무공원 측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했었다. 무너진 마교의 잔당 따위에 안전가옥의 위치가 노출된 것도 모자라 귀령살이 연화존자의 앞까지 갔다는 사실에, 당가그룹의 고위층 모두는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운하신권이 직접 당군명을 찾아와 불만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이 갈등이 얼마나 깊어졌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청영의 경우엔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기 어려웠을 정도.
그녀는 귀령살을 가만둬서는 안 된다고, 본보기를 보여 령을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정도.
못내 불만스러웠다.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모든 것이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언제부터 무림인이 그런 걸 따졌다고. 들어 보니 동방요선과 다도선객이라는 쓰레기들을 두들겨 잡을 때는 잘도 무림인처럼 굴었더만.
‘국가무공원은 너무 절차에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닌지.’
어디 그뿐인가? 정작 필요할 때면 지닌 바 무력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으면서 이번 일에는 왜 그리 소극적이고,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눈치를 그리도 보는 것인지.
당청영이 보기엔 칠익회와 현천문은 공무원 밥을 벌써부터 많이 먹은 것처럼 보인다.
법, 당연히 지켜야 하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당장 보라. 귀령살 따위의 빨갱이 출신 마교도가 그분과 수시로 독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연화존자의 귀한 시간을 그따위 것한테 소모하게 하다니.
아무리 마교지파 묵혈성의 신물이 알 수 없는 공능을 지니고 있고, 그로 인해 최후의 기사가 반로환동하며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지만,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
‘본 그룹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원하는 걸 얼마든지 토설하게 만들 수 있거늘.’
윗사람에게는 윗사람의 일이, 아랫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의 일이 있는 법이라고 당청영은 생각한다.
망해 버린 마교의 잔당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토해 내게 하는 건 당가그룹 같은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일 아닌가?
만약 그녀의 손에 귀령살이 들어온다면, 운이 좋아 그녀가 심문을 맡게 된다면 저 가증스러운 암살자는 표층 의식 아래에 숨어 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모조리 뱉어 낼 수밖에 없게 될 것이었다.
그녀도 지금처럼 좁은 나라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공사를 감독하고, 사람을 뽑는 한가한 일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좀 더 책임감 있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게 될 터였지.
그런 당청영의 불만을 듣기라도 한 걸까?
-끼이이익
그녀가 타고 가던 차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 선다.
하지만 당청영은 이에 놀라 ‘누구지’, ‘어디지’, ‘무슨 일이지’와 같은 그런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그녀가 유치원을 가던 시절부터 함께해 온 운전기사와 경호원들이다. 사적으로는 당가의 방계였고, 공적으로는 그룹의 최정예 직원들.
그런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차를 멈춰 세울 리 없다는 믿음으로, 말없이 재빠르게 장비를 점검하며 상황을 살핀다. 시선을 앞으로 던져 무슨 일인지 파악한다.
내공을 북돋아 안력을 집중하니, 과연 보이는 것이 있다. 인적 없는 산속의 길이 세 대의 봉고차로 꽉 막혔다.
당연히 차만 덩그러니 놓여 있지는 않았다. 숙련된 무림인의 감은 속삭인다. 적은 차 안에도 그리고 길 주변에도 하나 숨어 있다고.
무공을 익힌 놈들이었고, 나름 준비가 철저했으며, 무엇보다.
그녀가 올 걸 알고 있었다.
“…재밌는 것들이네.”
어디서, 언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확한 타이밍에 길을 막고 기다릴 수는 없다. 이 말인즉슨, 그녀의 동선이 어디에선가 샜다는 이야기.
심장이 뛰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어떤 깜찍한 것들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것일까?
한국말 중에 울고 싶을 때 뺨 때린다더니, 이 상황에 꼭 알맞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 당청영은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 채 다가오는 놈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지시했다.
“한 놈도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데려와.”
“알겠습니다, 이사님.”
대답을 마친 운전기사와 조수석의 경호원이 조심스레 문을 연다. 혹시 모를 총기에 대비해 방탄 처리 된 차문으로 최대한 엄폐하며 신중하게 나선다.
그리고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를 다른 것으로 오해한다.
“당가, 당가 하더니, 이거 순 겁쟁이들이구만?”
껄렁대며 말하는 이는 산속의 습격자 주제에 정장을 빼입었고, 소매 끝과 셔츠 카라 사이로는 알록달록한 문신이 보였다.
무공 한 자락을 익힌 것 같긴 했지만 느껴지는 내력의 기운은 미약하고 혼탁하여, 정식으로 입문하여 수련을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운 좋게도 어디서 알음알음 전해지는 무공의 파편 한 조각을 주워 들게 된 건 아닌지.
그동안의 삶에서는 저것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지금는, 글쎄?
전형적인 조직폭력배의 모습을 한 습격자를 보며, 당청영은 이런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쟤는 이 상황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기는 할까? 그 옆에서 웃고 있는 놈들은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그럴 리 없지, 없고 말고.
“하도 무서운 놈들이라고 들어서 조금 긴장했는데 저, 저 쫄아 가지고 차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거 봐라, 저거. 하여간 별것도 아닌 놈들… 크아악!”
숫자에 눌려 당가의 사람들이 겁을 먹었다고 착각한 대가는 부숴진 안면으로 치룬다. 기감을 넓혀 총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경호원이 허리춤에서 팔각봉을 꺼내어 날려 무례의 대가를 직관적으로 받아 냈다.
그렇지만 당가의 지엄한 질서는 살아 있음이라. 얼굴이 완전히 부숴졌음에도 놈은 죽지 않았다.
한밤의 습격자들은 삶도, 죽음도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없다.
“으어어억… 으어…….”
첫 격돌이 허무하도록 강력해서 그런 것일까?
어느덧 상황은 역전되어 무시무시한 기세의 경호원, 당가그룹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백타랑(百打狼)’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그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습격자들은 움찔대며 뒷걸음질친다.
나머지 놈들 또한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뒹구는 놈과 비슷한 꼬락서니였다.
별다른 단련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기개 같은 건 어불성설. 약자들을 핍박하고, 강자들 앞에 꼬리를 흔들었을 지난 인생이 너무도 눈에 선한 자들.
자기가 늑대인 줄 아는 돼지 새끼들.
그 사이로 두 마리의 범이 뛰어든다.
“씨, 씨발! 조져!”
“쑤셔 버려!”
습격자들은 정확하게 겉모습과 같은 수준의 공격을 보여 줬다. 손에 든 몽둥이와 품 안에 든 회칼 등을 들고 휘두르지만, 정작 두 명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엉덩이는 뒤로 뺀 채 언제라도 도망갈 기세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적나라한 부조화를 선보였으니까.
이들이 익힌 건 무공의 겉껍데기라 해도 무방하리라. 쥐꼬리만 한 내력이야 어떻게 지니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무림인의 투지, 향상심의 함양 같은 건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반면 당가의 두 사람은 다르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팔각봉을 발로 차올린 경호원의 손속은 무자비했다. 칼을 쥔 자가 있으면 손을 뭉개 버렸고, 몽둥이를 쥔 자가 있으면 그대로 뺏어서 어깨에 쑤셔 넣다시피 한다.
적수공권의 운전기사는 또 어떠한가? 코앞을 스치는 칼날 등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손바닥과 주먹을 사정없이 꽂는데,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웃음기가 외면하기 힘들게 선연하다.
기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유럽의 마피아 카르텔과 불꽃 같은 전투를 벌여야 했던 예전에 비하면 오늘의 습격은 시시하다 못해 하품이 나올 정도.
고작 이런 것들을 데리고 와서 당가그룹의 이사를 노렸단 말인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당청영은 차 안에서 바깥으로 비수를 날렸다.
“아아아악!”
긴 비명이 산을 울린다. 수풀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다 여의치 않음에 도망치려던 비겁한 놈의 울부짖음이었다.
하품이 나올 뻔했다.
“으으으…….”
“일어나서 기어라. 그러라고 다리 안 건드린 거니까.”
쓰러뜨린 습격자들을 백타랑이 양 떼를 몰 듯 발로 차서 정렬시킨다. 얼굴과 어깨와 손이 박살 난 습격자들은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지시에 따라 차례차례 오와 열을 맞춰 무릎을 꿇는다.
그사이, 운전기사는 당청영의 한 수에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 놈을 주우러 갔다.
차 보닛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당청영은 한가롭다.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국가무공원에 연락을 취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역시 재미가 없을 거였다.
“다 모였나?”
은은한 내공이 실린 당청영의 목소리에 그녀를 해치고자 습격했던 놈들의 시선이 주목된다. 신기하게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됐다.
“이제부터 네놈들이 할 건 하나야. 너희가 아는 사실 중 쓸 만한 걸 내게 말해. 들어 보고, 괜찮다 싶으면 무사히 경찰에 넘겨주도록 하지.”
여기까지 말한 당청영이 맨 앞의 녀석을 가리키며 턱짓을 해 보지만, 그는 당가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고개를 저은 독봉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고, 지목 당한 자는 이내 피를 토하며 경련한다.
그 모습에 긴 비명이 울려 퍼지지만, 그녀가 펼친 기막을 뚫고 나가진 못한다.
다음 녀석도 마찬가지. 익숙해진 덕인지 이번 비명은 아까보다 짧았지만 크고, 강렬하다.
패닉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려던 녀석들이 제압당하고, 지목당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지옥도가 펼쳐지니, 이것이야말로 당가의 손속.
배후는 쉽게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