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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82화 (82/175)

#82화

귀령살을 만난 뒤 연화존자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찾아간 곳은 독군 당군명의 사무실이다.

만나서 풀어야 할 오해와 확인해야 할 몇 가지, 마지막으로 부탁해야 할 것들이 있다.

“삼지일절께 말씀을 듣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당군명이 째째한 사내는 아니었다. 만약 그가 그런 자였다면, 제 뱃속의 것을 아까워하며 말 몇 마디에 기분이 상하는 그런 자였다면, 연화존자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며 나서진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바꾸는 엄청난 투자를 감히 감행하지 못했으리라. 이와 같은 일은 소인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독을 다루는 사람인 만큼, 또 무공을 익혔고 험한 역사를 여럿 겪은 당가사람들 자체가 외골수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건 맞다. 실제로 앙금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테지만.

하지만 직접 찾아와 사정을 설명하는 연화존자를 보니, 납득이 간다.

가 버렸다. 말보다 그의 몸에 남은 흔적들로 인해 이해가 된다.

저 막강하기 짝이 없는 절대고수조차 마교의 알 수 없는 것 안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왔는데, 어찌 이해하지 못할 것인가?

냉철한 성품의 당군명은 스스로를 잘 안다. 세속의 힘과 독공의 힘이라면 모를까, 주화입마마저 오랫동안 앓고 신체 일부를 결손한 자신이었다. 순수한 내공의 기예 혹은 육체의 수준을 따지자면 운하신권이나 삼지일절보다 다소 떨어지는 게 사실.

연화존자의 우려처럼 묵혈성의 신물은 그에게 위험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현저하다. 신중함은 현명했음이라.

그래서 더욱 ‘위험하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연화존자의 마지막 물음에 질문으로 답했다.

“마교의 신물에 대해 직접 조사를 하신단 말입니까?”

이 질문에 연화존자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는 방금 막 도착해 암해를 함께 연구하지 못했던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음과 동시에 그 안에서의 일들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는 당연히 천마격살의 진실이 일부 섞일 수밖에 없었기에, 당군명의 경악은 한동안 이어졌지만. 아무래도 삼십 년이나 지나 버린 역사적 사건이 근 시일 내의 걱정보다 크진 않았다.

연화존자는 천산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다. 대체 그 드넓은 산맥, 어느 봉우리, 어느 나라에 마교지파 묵혈성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할 거라 다짐했다며 말했다.

“그것도 육로를 통해서, 그러니까 중원 본토를 가로지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심지어 중국 본토를 가로질러서.

이것은 앞선 계획과 연관이 되어 있는 새로운 청사진이다.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절대고수를 노리는, 국가무공원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하는 중국에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 주는 것으로 대응하겠다며 이 절대고수는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아슬아슬한 방식은 아니었다. 국경지대에서의 단기 접선 혹은 중국 밖으로 빼낸 뒤의 교육 훈련이 아닌, 아예 신분을 숨기고 중원에 숨어들어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방식은 당군명을 비롯한 국가무공원 누구의 머리속에도 없던 일이다.

당혹스러웠다.

“사파놈들이 나를 노린다니, 가는 길에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화존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마치 뒷산에 마실이라도 가듯이, 범의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겠다고 담담히 말한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우선은 말려 볼 수밖에 없는, 불경한 표현이지만 정신 나간 계획이 아닌가 당군명은 생각한다.

정말로 마교의 피리가 저 위대한 고수를 홀린 게 아닌가 하는, 얼마 전 윤아영 검사가 했던 생각을 그도 똑같이 하며 만류했던 것이다.

“중국의 감시를 뚫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회 감시망은 촘촘하며, 믿을 수 있는 우군이라는 말은 중국 내부에선 통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직접 무슨 일을 하시는 건, 그것도 오랫동안 정체를 들키지 않고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본가의, 거기에 제갈가의 힘이 보태진다고 해도 결국 중원은 저들 공산당의 것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가를 부화시킬 시대의 거인인 그조차 이 계획은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연화존자께서 홀로 베이징에 들어가 당의 고위 간부들을 죽이실 계획이라면, 예. 그런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가문의 지혜를 짜내고 힘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협력자를 만들고, 또 횡단하여 국경을 넘는 건 도무지 이 사람으로선 두고 볼 수 없는 무모한 일입니다.”

김철민은 그렇게 말하는 당군명을 지그시 쳐다본다.

위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부드러운 미소였고, 무슨 말을 고르는 것처럼 신중한 모양새였지만.

순간 당군명은 그런 연화존자가 두려워 오싹했다.

뭐가 잘못된 걸까,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아니면 표정만 저렇지 실제로는 기분이 좋지 못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벼락처럼 깨달음이 왔다.

“…대성을 이루셨군요.”

눈앞의 남자가 기존의 경지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사실을.

동시에 왜 그가 천산으로 가야 된다고 말하는지 역시도.

“대성은 무슨. 소성… 정도라고 합시다.”

그답지 않게 겸손하게 말하는 김철민을 보며, 당군명은 다시금 큰 충격을 받는다.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화존자의 무공에 또다시 진일보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연화존자는 거대한 사람이었기에, 당군명은 그가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천외천의 경지, 옛 사람들이 현경이니 생사경이니 하던 경지에 이미 다다른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연중에라도 말이다. 본인이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고, 이것이 비단 그 혼자만의 짐작도 아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연화존자 김철민을 능가하는 무림인이던가?

누가 그런 사람을 본 적 있었나?

없었다, 아무도.

연화존자가 세상에 드러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를 아는 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저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김철민, 그는 연화존자라 불리며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이해하게 된다. 왜 연화존자가 마교의 신물을 찾고자 하는지 역시도.

마교지파 묵혈성을 찾아 더 강해지고,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본능이다.

마교의 물건이니, 어쩌느니 해도 그것 말곤 지난 세월 무엇 하나 연화존자를 자극했던 것이 없지 않나?

더불어 이미 얻은 진일보로 중국의 안마당에서 그 힘을 감당할 자신이 있기도 한 것일 터.

무림인이라면, 칼 위에서 살며 생과 사를 오갔던 이라면 저 희열과 열망, 자신감과 호기로움이 섞인 감정을 모를 수 없다.

“본가에서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겠습니다.”

하여 당군명이 아까와는 다른 대답을 내놓은 건, 정말이지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 * *

연화존자가 이렇게 상승한 무공의 경지를 숨기며 여러 가지 일을 벌일 준비를 하는 동안, 대통령의 제안과 연화존자의 권유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애써 누른 윤아영 검사는 지방의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늘 하던 일이며, 잘하는 일 아닌가? 검사가 범죄자를 잡고, 조사하고, 기소하여 재판에 임하는 건 그야말로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윤아영은 이 분야에서 자신이 쓸 만한 인재임을 익히 증명한 바가 있다.

지방 무림의 동요에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조직폭력배들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확률은 희박하다.

이제는 자리를 잡다시피 한 국가무공원이 서포트하니, 일이 한결 수월하기도 했고.

이 전적인 지원이 단순히 내공을 익힌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일에 소속 수사관을 붙여 주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국가무공원은 초기 멤버이자 사이비 교도들에 의해 큰 테러를 당했음에도 마음이 꺾이지 않은 용맹한 공무원, 김철민의 은거를 깨 버린 그녀에 대해 대한민국의 모든 내공 사용자를 통제하는 조직은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수사관들, 경호원들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자생하는 부패의 사슬이 그녀의 수사를 방해할 수 없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윤아영의 수사를 방해할 자가 없도록 깨끗이 치우는 청소였다.

윤아영에게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여 펄펄 날아다니며 죄 지은 자들에게 마땅한 법 집행을 해낼 수 있었지만, 최근 대통령과의 면담에 더해진 연화존자의 언급으로 국가무공원은 한발 더 나아가기로 한다.

인력 소개와 비슷한 일들을 시작한 것은 그런 의미다.

“…유민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유 경장님.”

윤아영은 국가무공원이 함께 일해 봄 직하다며 추천해 준 남자, 어딘지 모르게 혼자 사는 남자의 몰골을 잔뜩 하고 있는 찡그린 얼굴의 그에게 인사하며 암기했던 신상 내력을 복기한다.

이름 유민우. 나이 38세로 경찰이 된 지도 15년이 훌쩍 넘은 그의 계급이 여태 순경인 것은 무능 때문이 아니라 두 번의 징계 때문이라고 한다.

한 번의 과잉 진압과 한 번의 상관 폭행으로 막내들과 같은 계급으로 주저앉은 그는 경찰 조직 내에서 백안시 되는 인물이라고 했는데, 유민우가 수사한 사건들을 살펴본 윤아영은 국가무공원의 이러한 평가가 사실이란 걸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유민우의 경찰 내 이력에는 얇은 얼음 같은 악의가 깔려 있었다. 분명 존재하지만 활자와 서류에서는 결코 알아볼 수 없는 차가운 적의 같은 것을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수사에 공을 세웠음에도 석연찮은 이유로 인사고과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거나,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사 배제 등이 서류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선 설명되지 않는 굴곡이란 걸 윤아영은 보았다.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윤아영 그녀 또한 검찰 조직 내에서 비슷한 취급을 받아 봤기 때문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

경찰은 유민우를 내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 유민우의 상관 폭행이 조직 내에서 이루어지던 비리와 상납을 덮으려던 간부를 두들겨 팬 것에서 기인한 불편함이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국가무공원의 수장인 운하신권이 콕 찝은 자를 내주지 않는 건 현 상황상 불가능한 일.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랬다.

최근 국가무공원은 경찰청과 내공심법의 보급에 대한 문제를 논의 중이다.

군에서의 심법 보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덕에 경찰 쪽에선 몸이 달았다. 완벽하게 안착한 건 아니었지만, 간부들과 일부 병사들에게 주어진 내공심법의 성과는 분명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각군 특수부대에서의 호평과 군대 내부의 각종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건 뚜렷했다. 국가무공원은 이를 통해서 다시 한번 여러 분야에서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여기에는 다소 자본주의적인 이유도 존재했는데, 국가무공원 측에서 무공을 익힌 군인들에 대해 수당을 보조해 주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것.

전역률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조치였다. 물론 이것은 임시 조치였고, 기본적으로 군인 월급에 대한 현실화를 장기 해결 과제로 제시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국가무공원의 군 내부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긴 했지만, 안팎의 격한 호응에 우려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었고, 이제 행안부 쪽에서 국가무공원의 예산을 탐내며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덕분에 진기도인단을 확대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기수가 앞선 기수들의 지도 아래 수련 중이었고, 머지않아 성과가 있을 예정.

하지만 눈앞의 불만 많은 경찰에겐 중요한 일이 아닌가 보다.

“근데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윤아영은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알아본다. 지치고 나아질 길 없는, 바르지 못한 걸 바로잡을 거라는 희망 따위 없이 그저 버티는 게 전부이던, 그래.

연화존자를 만나기 전의 날들이.

파견의 형식으로 국가무공원까지 왔음에도 자신의 현실이 쉽사리 바뀔 거라 상상하지 못하는, 좋은 게 좋은 건 줄 모르고 불의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해 세상사에 질려 버린 남자를 보며, 윤아영은 되레 묻는다.

“유 순경님은 어떤 나쁜 놈을 가장 먼저 집어 넣고 싶으십니까?”

윤아영의 질문에 어디 한 군데 찔린 것 같은 표정을 한 그의 입에서 오랫동안 간직한 사건이 흘러나오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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