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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85화 (85/175)

#85화

주형민이 운하신권과 안면을 트게 된 건 그가 오랫동안 관료로 재직하며 쌓은 인맥의 도움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국가무공원을 견제하는 정치적 압력을 해소하는 데 꽤 인상적인 도움을 주었다.

결국 아무리 실질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는 국가무공원이라 해도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는 고충이 운하신권을 비롯한 국가무공원의 고위층에 존재했던 것.

나쁜 놈이라고,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다 때려죽일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 사회 아래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만약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국가무공원을 만들 일도 없었다.

그냥 전처럼 밝혀지지 않은 무력 집단으로 남은 칠익회를 통해 다 죽이고, 쓸어버리는 게 나았을 테지.

그렇기에 정치적 타협과 선별, 줄타기는 어쩔 수 없던 일.

국가무공원의 행보를 막아서며 저항하는 자들은 이 나라로만 한정해도 한둘이 아니었고, 운하신권이 현천문을 운영하며 쌓은 인맥으로도 이겨 내기 버겁고 힘겨운 게 사실이었다.

주형민이라는 조력자는 여기에 말없이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국가무공원에 부족했던 인맥과 영향력을 남몰래 발휘하며.

처음 운하신권은 그런 그를 경계했었지만, 이러한 감상은 머지않아 바뀐다.

신기하게 여기게 된다.

‘아무리 보아도 도울 이유가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저러는가?’

심지어 아무런 사전 교감도 없었던 것으로, 종국에는 의아함에 직접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의 감정은 경계였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운하신권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입학, 졸업도 하기 전에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탄탄대로를 걸어온 이 엘리트가 국가무공원을 선뜻, 그것도 적극적으로 돕고 나선 것에 어떤 저의가 있는지 궁금했다.

이와 같은 경계심이 무색하게 주형민이 달리 얻은 건 아무리 조사해도 없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익을 추구한 일이 없다 하겠다. 정치권에서 국가무공원을 견제하고자 했을 때 친구들뿐 아니라 집안의 힘을 동원해 막았음에도 국가무공원에 귀띔 하나 없던 그를 운하신권이 직접 찾아가지 않았나?

찾아온 운하신권에게 주형민은 허심탄회하게 속 안의 이야기를 털어놨고, 이에 장고를 거듭하던 국가무공원의 수장은 그를 연화존자에게 데려왔다.

그것이 오늘의 자리가 마련된 이유다.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냐’라… 그게 왜 궁금합니까?”

하나 오늘 여기 앉기 전까지만 해도 주형민에 대해 지나가듯 들은 게 전부인 연화존자는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눈치를 봤다는 소리는 당연히 아니지만.

“이 시점에서 일본에 대해 제가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다른 나라랑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여기에 한 줄을 더한다면 그래도 편하지는 않다?

아무렇지 않다면 아무래도 거짓말이겠지.

일본과의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화가 나고, 여전히 판을 치는 우익 세력을 생각하면 몇 명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다.

위안부 소녀상을 조롱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일제시대의 어둠을 그들의 역사교육에서 빼 버리는 걸 보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닐 터.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현재로서는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 사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내 관심거리는 아닙니다. 알아서 잘들 살겠죠.”

그건 어쩌면 김철민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행동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에게는 극심한 분노의 표현인 죽여 버리고 싶다는 수사가 김철민에게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이기에, 오히려 이성을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국가무공원의 설계자가 되어 여기까지 온 지금에 와서는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언젠가 일본이라는 나라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마주칠 거라고. 분명한 액션과 대화가 필요하긴 할 거라고.

지금으로선 처리해야 할 문제 목록 중 후순위라 할 수 있다. 연화존자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도 모자라 미국으로 넘어간 청해마도의 마약중독 퇴치 사업 및 내공 보급, 잠시 잠잠해졌지만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올 북한 문제, 아울러 음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작업까지.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은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에게 일본은 그들의 자산을 노리는 흔하디흔한 나라로 머리 한구석에 처박혀 있을 따름이었다.

지금까지는.

“일본에 대해서 물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저는 국가무공원이. 정확히는 김철민 씨가 일본에 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형민은 거기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고, 영민한 연화존자는 갑작스레 찾아온 은퇴한 외교관이 심중에 담고 있는 생각을 두어 마디로 알아챈다.

“…사무라이들의 검법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도 말이다.

“알렉산드루 경의 이야기를 듣고 일본 쪽에서 그런 얘기가 돌 거라고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누군가 찾아올 거라곤, 그것도 대한민국의 외교관이셨던 분이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군요.”

미국으로 돌아간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는 한바탕 홍역을 겪었지만, 거기에 대해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노화라는 질병에서 벗어난 최후의 기사에 대해 미 대륙 전역이 ‘음모다’, ‘기적이다’, ‘과학이 나서야 한다’ 등으로 정치권과 미디어 매체 모두 연일 시끄러웠다는 정도만 언급하면 충분할 테니.

중요한 건 다른 게 아니다. 알렉산드루가 매우 매우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다는 사실, 하나.

곧바로 천명했던 것이다, 기사단의 명맥을 다시 잇겠노라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반로환동하여 젊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최후의 기사는 자신이 더 이상 지상 마지막 기사로 불리지 않을 것이라 당당히 선포했고, 미 연방 정부는 그러한 알렉산드루의 선언을 뒷받침하고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특별법을 만들고, 긴급 예산마저 투입하여 사람을 모으고 훈련장을 조성 중이다. 막대한 이익을 보장한 모집에 호응은 굉장하여 젊은이들이 자원하는 중이었고, 할리우드에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전격 영화화에 나선다는 소식을 흘리기도 했다.

그건 너무도 대대적이어서 숨길 의도 없는 투명한 미국의 축제.

국민, 시민단체, 정치인 중 누구라도 하나 튀어나와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는 거 아니냐고 따질 법도 한데, 어째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건 아마도 미국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열등감, 제대로 된 전통이 없다는 패배감을 자극한 일이 아닐까 짐작한다는 연락을 청해마도는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한 시끌벅적한 이벤트를 보고 있자면 결은 약간 달라도 비슷한 처지인 나라에서 몸이 달지 않을 수도 없었을 거란 걸, 일견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일본 또한 사무라이 검법의 복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숨길 것도 없는, 오래된 이야기죠.”

푸른 눈의 쇼군이 패망한 제국의 잿더미 위에서 사무라이 검법을 공여하라 명했을 때, 버섯구름 속에 무너진 모든 내공 사용자는 할복을 선택했다.

이때 모든 사무라이가 자발적이지는 않았다. 인간이 그럴 수는 없다.

다만 불에 탄 채 굴러가던 수레바퀴가 마지막 폭발로 박살이 난 것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을 뿐.

할복을 거부한 이들은 어제의 동문에게 혹은 죽음으로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결사대에 의해 붙들린 채 죽어 나갔다.

리틀보이와 팻보이가 일제의 망상을 박살 내고 현인 신이 초라한 인간으로 내려온 여파로 인한 광기였으니, 결국 남은 자들은 기꺼이 제 배를 칼로 가를 수밖에.

불명예스럽게 죽은 이들의 가족이 조리돌림 속에서 살아도 산 게 아닌 꼴이 되는 걸 보고 있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시대를 덮은 광기의 파도를 막아 낼 수도, 이겨 낼 수도 없다면 선택의 여지는 전혀 없었던 바.

그랬던 일본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잃어버린 기예를 찾고자 한 건 버블 경제로 콧대가 한창 높았던 때가 시작이다.

“한창 일본의 경제적 위상이 높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자산가들과 정치 세력은 잃어버린 그들의 심법을 찾고 있습니다. 우익 세력들은 당연한 일본의 것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며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요.”

“그리고 찾아내지 못했지.”

주형민의 말을 받은 연화존자는 곧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말투는, 아까보다 훨씬 퉁명스럽다.

“나 또한 추적에 실패했을 정도니까.”

한때 김철민 또한 일본의 사라진 기예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한 정파 후예로서의 책임감과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 어우러진 감정으로, 칠익회 또한 사무라이들의 기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때가 있었다.

그랬었다. 자체적인 조사 결과 정말로 모두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찾아봤자 별 가치가 없겠다는 예상을 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게 복원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거절하지.”

해야 할 것이 많은 국가무공원의 설계자는 말한다. 자신은 이웃 섬나라의 재주에 관심이 식어 버렸노라고.

이미 하고 있는 일들만으로도 차고 넘쳐 그런 일엔 손대지 않겠노라고.

“사무라이, 사무라이 하지만 일본에 전쟁이 줄어들며 무공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떨어진 기술이야. 애초에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이 칼 들고 싸우던 시절 자체가 몇백 년 전에 끝나지 않았나? 사족이 된 사무라이들의 명맥을 끊은 건 메이지유신이 직격탄이었고, 2차 대전에서의 패망이 마무리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시니컬하게 지적한다.

결국 무림인인 그가 사무라이들의 기예를 찾았던 건 혹시 모를 상승에 대한 단초, 아울러 이 물건을 원하는 자들과의 거래 때문.

현 시점에서는 영 수지맞지 않는 장사였다.

“알렉산드루 경처럼 명맥을 이은 자가 있다면, 뭐 그래. 고민을 조금 해 볼 수도 있겠지. 그 과정에서 나도 얻는 게 분명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예 바닥부터 사무라이 검법을 복원한다? 쉽지도 않을뿐더러, 성공 가능성도 솔직히 모르겠어.”

죽고 죽이는 전국시대에 발전한 사무라이 검법은 중원이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한반도와는 체계 자체가 달랐다.

왜 연화존자가 알렉산드루의 무위를 끌어 올리는 식으로 도와야 했는지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아무리 대종사의 능력을 갖췄다 해도 아무도, 아무것도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시피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처럼 바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고, 연화존자의 마음 한편에 있는 감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내키지도 않아. 내가 왜 일본이 원하는 걸 해 줘야 하지?”

주형민은 언짢은 표정의 연화존자를 굳은 얼굴로 말없이 쳐다본다.

“지난 역사도 역사지만, 난 그들에게 받아 낼 것이 없어. 알아? 내 이것만은 분명히 하지. 난 미국에게 아무 대가 없이 뭔가를 해 준 게 아니야. 오, 그래. 그들은 분명 우리의 동맹이지. 6·25 때부터 이어져 온 혈맹. 좋아, 좋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난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아 냈고, 또 대가를 받아 낼 거야. 이전의 것들은 일종의 선금이지.”

열띤 발언을 듣는 주형민의 눈에서 빛이 난다.

하여 더 이상 모른 체하기도 힘들다고 연화존자는 생각한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나라는 없고, 국제 관계 또한 그렇다고 알고 있어. 외교관 출신, 그것도 엘리트 코스를 있는 대로 밟은 당신이라면 잘 알고 있을 텐데?”

“물론입니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고. 한결같은 인간은 결단코 없지요.”

“그러면 더는 숨기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

국가무공원에 대한 저항을 해소할 정도로 능력 있는 관료가 아무리 은퇴했다 한들 일본의 요청을 받고 이 자리에 왔음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물며 운하신권의 소개 아닌가?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가?”

이에 주형민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보자기로 싼 네모난 것을 조심스레 꺼내 올려놓는다.

“말씀을 들으니 확신과 함께 안심이 됩니다.”

“무슨 확신과 안심을 말하는 거지?”

“어떠한 경우에도 치우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눈으로 질문하는 연화존자에게 오랜 짐을 내려놓은 노인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이것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사무라이 검법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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