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주형민은 자신이 이 물건을 손에 넣게 된 것이 오래되고 긴 이야기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제가 필리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오래된 물건과 고문서 따위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외무고시 합격 후 필리핀으로 발령받은 그는 쉬는 날이 되면 마닐라의 골목 등을 돌아다니며 골동품 구경과 쇼핑을 즐겼다고 했다.
동료들은 이걸 어린 나이에 외무고시에 합격한 전도유망한 청년의 인간적인 면모 정도로 생각하며 웃어넘겼지만, 당시 고작 이십 대에 불과했던 주형민에게는 지겹고도 낯선 땅에서의 향수병을 달래는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었던 바.
제법 진지한 취미였다.
“제게도 정붙일 곳이 필요했습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외무고시에 붙었다고 남들은 대단하다, 어쩐다 했지만 제 마음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필리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낯선 곳에서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이어 그때를 회상하던 주형민의 눈빛이 순간 반짝인다.
“외롭다는 생각을 겨우 참아 가며 버티던 어느 날, 아무 계획 없이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두 시간을 꼬박 보냈습니다. 참 희한하지요?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거나, 뭔가 대단한 걸 본 게 아님에도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더군요. 처음엔 그렇게 소소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주형민의 취미는 탄력이 붙었다.
딱히 대단한 안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골동품상이 들고 오는 물건이 좋은 것인지, 희귀한 것인지, 아니면 재치 넘치는 가짜인지 서서히 구분하기 시작했던 것.
즐거움은 앎에서 온다는 걸 깨달았고, 이 새로이 알게 된 기쁨은 젊은 청춘의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마저 되었다.
“당시 필리핀은 우리나라를 연상케 하는 나라였습니다. 비슷한 느낌으로 혼란했지요. 그래서 현실을 잊고자 더 그런 취미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옛일을 회상하며 그는 털어놓는다.
감당하기 어려운 물건을 만나게 된 경위를.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가게 주인이 어느 날인가 ‘진짜’가 있다며 가게 안쪽으로 저를 끌고 가더군요.”
오며 가며 익힌 안면 덕이었을까? 제법 자주 들르던 골동품 가게의 주인이 주형민에게 관심이 갈 만한 물건이 있을 거라며 끌고 간 가게 구석에는 숨겨진 공간과 비밀스러운 물건들이 여럿 존재했다.
모양새와 쓰임새는 물론이거니와 출처와 엮인 이야기조차 제각각인, 하지만 신용 없는 남들에게는 함부로 보여 줄 수 없어 조심스레 취급해야 하는 밀수품과 도굴품들.
거기에는 망해 버린 왕가의 물건부터 시작해 진위를 알 수 없는 이방의 고서와 불상, 심지어 마교와 멸문한 거대 문파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것 등의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개중 주형민의 눈길을 잡아끈 건 필리핀의 어느 깊은 섬에서 발견되었다는 일본군의 유품이었다.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사진과 뼈만 남은 유해 옆에서 찍은 물품들의 사진이 딸려 있을 뿐, 별건 아니었다. 사연 모를 반지와 물에 젖은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잔뜩 쓰인 낡디낡은 수첩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주형민은 다른 것들은 제쳐 두고 죽은 일본군의 유품을 구매하는 것도 모자라 한국으로 돌아올 때 들고 왔다.
“어쩌면 전 이름 모를 일본군의 망령에 씌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사서 귀국하는 과정을 돌이켜 보면 합리적인 이유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이 필리핀에서 홀린 듯이 사 온, 으스스한 사연의 물건들을 잊지 않고 잘 보관했다.
단순히 보관만 한 것도 아니었다. 시간 날 때마다 수첩에 적힌 글자들을 하나하나 해독하려 시도했던 걸 보면 말이다.
별다른 진척이 없음에도 주형민은 이 일을 계속했다. 별 성과는 없었다. 단순히 흐리게 번져서 읽을 수 없는 것을 넘어 알지 못하는 글자로 씌어진 수첩 내용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그럼에도 잊지 않고 꼭 들고 다니며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틈틈이 들여다보곤 했던 건, 말 그대로 궁금증.
시신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죽은 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무슨 사연이었을까? 대체 왜 통상적인 글이 아닌 굳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내용을 남겼을까? 무슨 뜻일까? 사진 하나 없이, 신원을 알아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이 수첩 맨 앞에만 이름만 적어 놓고 대체 무엇을 위해?
대관절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 건지.
주형민이 막연한 궁금증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서글픔으로, 마음속에 품었던 수첩의 주인에 대한 궁금증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 건 물건의 주인이 살았던 곳.
일본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였다.
“일본 외교부 문서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 외교부는 태평양 전쟁 당시 필리핀에서 죽은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사업을 위한 MOU를 체결했고, 그 과정에서 강제징병 된 조선인 청년들을 확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주형민은 관련 문건 중 하나인 전사자 목록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이 핑계가 온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남몰래 소유하고 있는 반지와 수첩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주형민이 주도한 작업이었으니.
그래도 실제로 찾아냈던 걸 보면 헛된 기대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반지와 수첩의 주인이 나름 이름을 날리던 거대한 사무라이 검법 보유 가문의 후계자였다는 것.
주형민은 자신이 그런 이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숨겨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러한 자제심은 딱 한 번의 호기심을 발휘한 후에나 가능했다.
“…저는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 숨겨 놓았던 비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위해 떠나기 전, 가문의 가장 믿고 있던 고용인에게 맡기고 갔더군요.”
운이 좋았다고 주형민은 설명한다.
죽은 자의 고향에 방문하여 관광하면서 외부에 알려진 대로 골동품을 수집하는 척하다가, 죽은 자의 가문의 하인으로 살던 이를 만나 반지와 수첩을 확인했고 그가 극비리에 보관 중이던 사무라이 검법의 비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 과정엔 확실히 말로 설명하기 힘든 운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기이한 인연의 수레바퀴가 온전하게 굴러온 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후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지난 세월 동안 보관해 왔습니다.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미련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습니다만,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 확실하니까요.”
온 일본이 사무라이 검법을 되찾겠다며 목 놓아 소리치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시절에 한국의 외교관이 그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주형민 개인의 운명은 둘째치고 양국 간의 관계 역시 극도로 악화될 것이 뻔한 일.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이 물건을 원하는 자들로 인해 어떤 혈풍이 불어닥칠지 주형민은 알 수 있었다. 무릇 보물은 피를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옛 무림의 혈사가 바로 이와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침묵하며 인내 속에 기다려 왔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에 오직 하나만이 남았을, 일본의 보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넘겨줘도 될 만한 힘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오기를.
“한 가지 질문을 좀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아까부터 말을 편히 하고 있는 연하존자는 주형민의 말을 듣고 그가 건넨 비급을 훑어보며 확신했다.
이게 진짜라는 것을.
물론 편의상 검법이라고 칭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미 에도시대 때부터 관료화된 집단이 되어 버린 사무라이로서의 덕목과 내공심법 등이 담긴 책이 맞았다.
현대화된 일본어와 약간 다르고 알던 한자와 헷갈리긴 해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물건이 진짜라고 거기에 얽힌 사연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세상에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을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던가?
이것이 함정이 아니라고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않는다. 그를 잡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귀물을 날려 버릴 인간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기에.
그만큼 주형민의 설명에는 믿기 힘든 우연과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죽은 사무라이 문파의 후계자가 왜 하필 가노나 다름없던 자에게 비급을 맡겼지? 그자는 왜 이 비급을 당신이 찾아오기 전까지 세상에 밝히지 않았고?”
한때 남아 있는 사무라이 검법을 가져오는 자에게 일본의 자산가와 정치가들은 1,000억이라는 놀라운 금액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사무라이 검법,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일본의 자존심. 패망해 버린 제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격이라고 그들은 설명했고, 이에 혹한 수많은 사기꾼이 가짜 비급 혹은 가짜 사무라이를 만들어 내는 기이한 사회현상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니 연화존자의 의심은 당연하다. 그 정도 되는 돈에 흔들리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돈을 가져 본 자로서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그는… 일본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보고 온 사람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망해 버린 문파에서 살아남은 늙은 고용인은 온 일본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가문의 후계자가 먼 이국에서 죽은 집안에 쳐들어와서는 일본 제국의 기개를 보이기 위해 할복하라며 칼을 들이밀던 자들, 가문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놓은 것도 모자라 이후로도 사무라이 문파에서 일했다는 사실로 낙인 찍고 괴롭히며 따돌렸던 자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일본에 사무라이 정신이 필요하다고 외치며 잃어버린 것을 찾겠다 말하는 자들을 그는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분노라는 이야기.
“전쟁으로 떠나기 전, 가문의 도련님이 준 비급을 그런 염치없는 놈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무라이 가문에서 일하던 시절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하더군요. 그깟 돈에 눈이 멀어 금수가 될 수 없다고 그는 말했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죽은 후계자는 반지와 수첩, 둘 중 하나라도 들고 오는 자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아무 말 없이 비급을 내주라고 했답니다. 그래도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사람이다 보니 그도 궁금한 게 있었고, 저도 궁금한 게 있으니 그간의 사정을 개인적으로 물어본 것이고요.”
연화존자와 운하신권은 이름을 지운 비급을 쳐다보았다. 증오 속에 간직되어 온 옛 물건의 사연을 들으니, 새삼 비감이 차오른다.
무공을 익힌 자의 숙명이란 죽음과 벗하며 함께 오는 것은 아닐지.
“…이 늙은이가 묻겠소. 주형민 씨는 우리에게 정확히 뭘 원하는 거요?”
그 말에 주형민은 잠시 눈을 감는다. 의도되거나, 의식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비밀의 무게가 순간 그렇게 만들었다.
“이 물건이 국익을 위해 현명하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눈을 뜬 그는 뜻밖에도 국익을 입에 담는다.
“저는 이 비급이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쓰이길 원합니다.”
“나라의 이익이라…….”
전직 외교관은 두 무림인 앞에서 그가 이루고 싶었지만 이룰 수 없던 것에 대해 털어놓는다.
“이 비급을 어디에, 어떻게, 누구에게 주느냐에 따라 일본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겁니다. 계획을 짜고, 기반을 다진 채 반응을 유도하는 일 등이 필요하긴 하지만, 활용하기에 따라 막대한 이득을 취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 생각해 놓은 것들이 있다.
“물론 그로 인한 위험을 감수할 능력이 있어야 하긴 하지만, 얼마 전 최후의 기사와 미국의 압박마저 견뎌 낸 국가무공원이니만큼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래서 무얼 해야 한다는 건가?”
“구체적인 방안은 여러분이 정하십시오.”
다만 방법까지만이다.
“그간 국가무공원의 행보를 쭉 지켜보며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이 자리에 와서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국가무공원에 필요한 일을 하십시오. 나라에 엄청난 돈을 끌어오고, 잘못한 자들을 잡아 넣고, 사회 부조리를 해결하는 분들이라면 나쁘고 어리석게 쓰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우릴 어딜 보고 믿겠다는 거지?”
연화존자의 마지막 질문에 주형민은 짐을 내려놓은 자 특유의 가뿐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다.
“제가 그 비급을 건네드렸음에도 제 얼굴만 보고 계시더군요. 무림인에게 이보다 더한 증명이 필요합니까?”
국가무공원의 두 사람은 반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