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87화 (87/175)

#87화

전직 외교관이 오랜 세월, 그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던 짐을 벗어던지고 돌아간 뒤.

새로운 숙제를 받은 연화존자와 운하신권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세상 두려울 게 없는 두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류의 문제, 힘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장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가장 명심해야 할 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이 물건을 예상치 못하게 손에 넣었기에, 다룰 여력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객관적인 사실.

이것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익힌다는 선택지는 배제한다. 그건 어쩌면 이 비급으로 할 수 있는 최악의 수.

무공이라면 이미 가진 것이 많은 국가무공원이 아닌가? 굳이 일본의 것을, 그것도 이미 몇백 년 전에 발전 없이 보존에만 가치를 둔 무학을 익힐 필요는 없다.

연화신공이나 현천공, 무명공이 무공으로서의 가치는 훨씬 더 높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아마도 세상에 유일할 것이라 생각되는 사무라이 검법의 가치를 찾는다면, 무공 외적으로 찾아야 할 일.

‘이것으로 어떤 국익을 꾀할 수 있을까?’

대대적으로 떠들 수는 없는 일이기에, 얼마 전 신설한 국가무공원 대외전략 팀에게 은밀히 맡겨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다, 가장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더불어 하던 일에 마저 박차를 가한다.

군인들의 처우에 대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서서히 내공 보급의 범위를 넓혀 가는 진기도인단의 활동에 따라 군 병력의 복지 및 관리에 대해서만큼은 국가무공원이 발을 걸칠 여지가 충분히 마련됐다.

연화존자는 이런 말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우리나라 방산 수출액이 얼마가 늘었네, 몇 대를 팔았네 하지만 정작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군인들 월급은 백만 원도 못 주는 거, 꼴 보기 싫거든? 그런데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어, 안 그래?

국가무공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연화존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징병부터 병력 관리, 전투 기술 습득에 제대군인 지원까지. 국가무공원의 돈은 국방에 쓰이고 있지만, 무림인의 돈이 이전처럼 눈먼 돈으로 쓰이지는 않는 바.

새는 것 없이 하나하나 조여 가며 법적근거와 실질적 행정력을 확보하고 있으니, 이를 위한 대량 채용은 덤이었고 관련 규정들 역시 정비되는 중이다.

물론 이러한 개혁에 국가무공원만 나선 건 아니다. 당가그룹에서 당군명을 비롯한 여러 명이 국회의원 및 정당 관계자들을 종종 만났고, 대한잔결회라는 거대조직을 이끌게 된 삼지일절 역시 마찬가지.

법률 제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힘을 보탠다.

북한 또는 중국과의 보이지 않는 분쟁은 소강 상태다. 중국 쪽에서는 연화존자 암살이라는 음모를 준비하며 은인자중하는 느낌이고, 북한의 경우에는 별다른 반응도 소식도 없이 침묵 중이다.

당장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간 청해마도는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했다. 이를 위해 일부 마약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진기요상을 연습 중이었고, 청해마도는 부인과 함께 한인 사회를 비롯한 미국 내 아시안계들과의 친분을 다지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기에 다니엘 김의 사전 작업과 알렉산드루의 후원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고, 그 위력은 굉장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물론이고 정재계의 거물들이 이 사업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며, 청해마도는 수련할 시간조차 없다고 하소연했을 정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 하겠다.

윤아영 검사의 수사 팀은 부패한 자들을 잡아들이느라 바쁘다. 잡아들이고,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을 진행하고. 늘 하던 일을 잘 해내고 있다.

이 모든 걸 총괄하다시피 하는 운하신권은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정도로 많은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에 반해 연화존자는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편이다.

“묵죽과 암해에 그런 것이…….”

여전히 감금 상태인 귀령살은 묵혈성의 신물에 대해 물어오는 연화존자의 말에 망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냉혹한 암살자로 평생을 살며 냉전의 한가운데를 누비던 마교도에게서 볼 거라곤 믿기 힘든 표정이어서, 연화존자조차 속으로 조금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암해에서 나와 너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당연히 뭔가를 듣지도 못했지.”

살령지문의 문주인 그조차 이런 기사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묵혈성의 마지막 제자를 죽이고 얻은 비급에서 묵죽을 다루는 방법을 익혔다고 했다.

거기에는 암해를 불러내는 진기 운용법과 목표물을 찾는 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고, 대한민국에 밀입국한 귀령살은 전국을 떠돌며 노숙자와 무연고자, 수배된 범죄자들을 죽여 가며 이를 익혔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자신 외의 다른 존재를 본 건 그가 사로잡힌 결행의 날, 연화존자와 마주치며 목격한 게 전부.

연화존자에게는 실망뿐인 이야기였다, 결국 아는 게 없다는 소리이기에.

“알지 못하는 물건을 잘도 다뤄 왔군, 귀령살. 사람 잘 죽이는 암살자가 되려면 모르는 것에도 기꺼이 손을 대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뭐 그런 건가?”

이러한 빈정거림에 화가 난 것일까?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여는 귀령살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어려 있다.

“…묵혈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연화존자를 향한 분노는 아니다.

이 분노는 이제 사라진 어떤 자들에 대한 것이다.

귀령살은 그간의 심문에도 털어놓은 적 없는, 마교 외부로 알려진 적 없는 비사를 털어놓는다.

“그것들은 당대의 위대한 천마셨던 홍혈천마를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어.”

“따르지 않았다고? 독자 행동을 했다는 건가?”

“아니, 그렇진 않았다. 그렇지는 않았어.”

귀령살은 지난날의 이야기를 어렵게 꺼낸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노부는 물론이고 다른 지파에서도 묵혈성의 오만을 그런대로 눈 감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놈들이었다, 연화존자.”

이제서야 꺼내는 이야기에, 수치심과 부끄러움 같은 것마저 느낀다.

“그들은 오만했다. 늘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는 태도였지. 본교가 소비에트 내부에서 자리를 잡고,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시큰둥하며 관심조차 없었어. 심지어 홍혈천마께도 그랬다. 예의는 지키지만 마음이 없었어. 시키니까 한다는, 그래 천마의 지시에도 해 준다는 느낌이 너무도 명백해서 본교의 많은 이들이 그들을 경원시하고, 심지어 증오하기까지 했다.”

연화존자는 생각한다. 증오하던 자 중 적어도 하나는 자기 눈앞에 있는 것 같다고.

이후로도 이어진 귀령살의 이야기에 사라진 마교지파 묵혈성이 어떤 자들인지 알 것 같은 그였다.

마교지파 묵혈성은 천마신교 내부에서도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쓰는 힘은 무공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기이했고, 타 지파와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런 그들이 그럼에도 마교의 한 축이었던 것은 천마신교의 위기에 알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생존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

수백 년 전, 만약 정마대전에서 패배한 천마신교의 마지막 생존자 집단이 무림맹의 추적대에 붙잡히기 직전 묵혈성이 불러낸 검은 안개가 없었다면, 마교는 그때 끝장이 나고도 남았을 거라고 마교의 구전은 전한다.

소비에트로의 합류에도 큰 공을 세웠다고 했다. 강력한 무력을 필요로 하던 레닌의 설득은 절박하면서도 호소력 있었지만, 긴 침묵을 깬 묵혈성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코민테른으로의 합류와 적백내전의 참전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스탈린의 숙청에서 벗어난 것은 또 어떠한가? 강철 인간의 무자비한 의심에 홍혈천마마저 옥쇄 아니면 이탈을 고민하던 그때, 묵혈성이 불러낸 검은 안개 속을 헤매고 돌아온 서기장 동무가 마교의 처리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러한 지대한 공에도 귀령살은 마교 내 묵혈성에 대한 혐오가 가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본교 내에 자리한 다른 집단처럼 굴었다. 평소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가 중대한 기로에 섰을 때만 나서는, 오직 제 의중만 중요하던 그런 것들.”

귀령살이 그런 묵혈성의 명맥을 끊어 버린 건 오랜 혐오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란 걸, 연화존자는 알 수 있었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다.

켜켜이 쌓인 증오가 가시지 않은 저 표정을 보면 알 일.

하나 연화존자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묵혈성의 신물이 더 있나?”

연화존자의 질문에 귀령살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본다.

“묵혈성에 대해 더 알고자 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봐야 하나?”

김철민은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사로잡힌 암살자와 죽은 마교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귀령살.”

아무런 내공도, 기세도 일으키지 않음에도 시선으로 압박하는 연화존자의 모습에, 귀령살은 한참을 침묵한다.

그건 천마를 죽여 천마신교를 찢어 버린 남자가 더 높은 경지, 더 큰 강함을 자신의 실패 때문에 얻었다는 죄책감일지도 모른다고 연화존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미련일 뿐이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묵죽, 묵검(墨劍), 묵상(墨像)의 세 가지다. 모두 본교의 혼란 속에 사라진 것들이지.”

그렇기에 둘의 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고, 연화존자는 자신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이 그가 곧바로 떠날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지만.

귀령살로부터 묵혈성의 나머지 신물의 이름과 생김새에 대해 들은 연화존자는 곧바로 물건들의 위치를 수배하지만, 곧바로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다시 말해 봐.”

완공된 국가무공원 본원, 최상단층의 회의실에 간부들이 여럿 모였다. 국가무공원의 시작부터 함께한 흑응을 필두로 칠익회 출신과 현천문 소속이 대다수였는데, 어쩐 일인지 다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분위기.

그럴 법도 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무림인을 통제하겠다는 야심찬 행보를 지속해 온 조직으로서는 최초로 그 일에 실패했으니까.

“수도권 도심 한복판에서 무림인들끼리 싸움이 붙었는데, 말리지 못한 것도 모자라서 주요 용의자를 놓치기까지 했다고?”

운하신권이 외부 일정이 있어 김철민이 주도한 회의였지만, 운하신권이 이 자리에 있었던들 그와 표정이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설명해.”

귀령살로부터 정보를 얻은 뒤, 당군명으로부터 중국행의 준비 사항을 물으며 일정을 조율 중이던 연화존자의 계획은 미뤄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납득이 가게.”

그의 수하들은 그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명은 신분을 속인 채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 한 명은 이십 년 전에 길에서 사람을 죽이고 수배된 내국인 범죄자입니다.”

“두 놈 다 무림인이고?”

“맞습니다.”

굳은 얼굴로 보고하는 흑응 또한 얼굴이 벌게져 있다. 그건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나선 그조차 위의 둘을 잡지 못했기 때문.

“도망친 용의자 중 중국 국적의 유영은 세 건의 대량 살인으로 중국 공안의 추적을 받던 중 브로커에게 가짜 신분을 구매, 조선족으로 위장하여 대한민국으로 입국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부르던 별호는 ‘혈마제’입니다.”

“범죄자 새끼 주제에 별호가 뭐 그리 거창해?”

“대량 살인 중 마지막 건이 무공을 익힌 중국 공안 스무 명을 일격에 참살한 사건입니다. 이에 중국 국가안전부가 나섰고, 조이는 추적을 버티지 못하고 밀입국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흑응의 보고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지어 보인 연화존자는 들끓는 마음으로 한 가지 지시를 중간에 내린다.

“그 새끼 한국으로 들여보낸 놈들 싹 다 잡아와. 신분 만든 브로커 새끼부터, 그 새끼 한국에 정착하게 도움 준 놈까지, 싹 다!”

수하들에게 거의 역성을 내지 않는 연화존자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 들일 놈이 없어서 대량 살인범 따위한테 국가 시스템이 뚫린단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뭐? 놓쳐?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그럼 무려 혈마제와 맞서 싸운 놈은 어떤 놈이야? 무슨 사연인데?”

연화존자의 성난 물음에 흑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한국인 쪽은 잠적한 수배범이 맞긴 한데… 무림 초출입니다.”

“…뭐라고?”

“무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고 그의 동생이 혈마제에게 죽었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