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중국 산둥성 칭다오 출신 유영은 십 대 중반에 사소한 경범죄를 저질렀다가 공산당의 무공 실험을 위해 끌려간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범죄자의 갱생과 교화를 핑계로 시행되었다는 그 실험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중요한 건 바로 그곳에서 혈마제의 악명이 태동했다는 것을 꼽아야 할 터.
아마도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새로 만들어 낸 사파무공을 익히게 한 뒤 부작용 등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이 실험은 유영이 지니고 있던 뜻밖의 재능과 결합하여 엄청난 성과를 냈다.
감옥 같은 실험실에서 고작 3년간 익힌 무공으로 중무장한 중국 공안 수십 명을 압도하다 못해 다 죽여 버리는 실력과 난폭함을 선보였으니까.
비록 살인광이 되어 버렸다는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중국 공산당이 쓰는 무공 대부분이 사파무공 아니었나? 그보다 더한 미친 것들이 수두룩한 게 공산당 내부의 무림인 집단.
충분히 감당 가능한 문제였다. 출소 후 두 달 정도 참았으면 조금만 더 손봐서 개량하면 될 일.
국가안전부의 움직임을 눈치챈 혈마제가 쥐새끼처럼 재빠르게 한국으로 도망가지 않았다면, 중국 입장에서는 완벽한 성공이 됐을 거다.
그렇게 중국으로부터 탈출한 이후 혈마제 유영은 대한민국에 몸을 숨긴 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공까지 익힌 범죄자가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건실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는 건 단연코 아니다.
제 버릇 개 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어느새 소수의 부하들을 거느린 작은 범죄조직을 운영하며 호의호식하고 있던 것.
혈마제라는 거창한 별호로 불렸던 내공 사용자치고는 정말로 소소한 일들이 전부였다. 기껏 하는 일이라곤 다른 외국인 범죄자들의 수익을 강탈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수익만은 쏠쏠했다.
국내에 기반을 둔 보이스 피싱 조직,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갱단 따위를 때려잡으며 돈을 뺏거나 혹은 제압하여 상납을 받는 식이었는데, 애초에 갈취의 대상을 범죄자 혹은 밀입국자로 한정해 놓았기에 신고를 걱정하는 일도 드물었다.
편히 폭력을 휘두르며 마음 편히 강탈했던 것이다. 당연히 범죄자도 사람인지라 참다 못해 경찰에 신고하는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자들은 혈마제가 직접 납치한 뒤 죽여 바다에 던져 버림으로써 완전범죄를 이뤘다.
살인은 정말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한다면 절대로 시체를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꼬리를 남기지 않으며.
그럼에도 이 조심스러운 범죄자, 중국 국가안전부조차 잡지 못한 무림인을 일반 경찰들이 잡을 수 있을 리 없던 바.
그러니 이 편하고 익숙한 일을 하던 중, 강호에 숨은 고수의 동생을 죽여 버린 건 혈마제 유영이 의도한 일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썅!”
더는 이 바닥에서 감히 자신에게 덤비는 놈은 없긴 했다. 하지만 사정 모르는 놈들, 가령 외국의 제 동네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날을 세우며 덤벼드는 재수 옴 붙은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파키스탄인가, 방글라데시였나? 아무튼 새로 생긴 외국인 갱단의 두목이 유독 악바리였다.
대체 무공까지 익힌 놈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대한민국에 들어왔던 것인지.
물론 숨어 사는 처지이다 보니, 정확히는 굳이 무공 수련이 필요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혈마제의 내력과 육신의 통제가 섬세하지 못했던 것은 맞다.
파편이 주변에 튄 건 좀 재수가 없었지.
더 재수가 없던 건 갱단과 거래하던 중에 말려들어 죽은 남자의 형이 정체를 숨긴 무림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미친놈처럼 쫓아오는 저놈 말이다.
“왜 하필 저런 놈한테 걸려서!”
그래서 유영은 억울하다.
눈에 핏발이 선 채 추적을 멈추지 않는 남자의 동생이 죽은 건 정말로 사고였다. 의도하지 않았다. 왜 자신이 돈도 안 되는 일에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그냥 길 가다가 벼락 맞아 죽은 거랑 똑같은 거였다. 정말 정말 재수 없는 어떤 하루.
“거기 서, 이 개자식아!”
물론 동생을 잃은 형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반드시!”
하늘이 무너져라 쩌렁쩌렁 고함치는 남자는 자신의 위치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여 혈마제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
두 사람은 어두운 산속을 달리는 중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혈마제가 인적 없는 야산을 골라 달리고 있고, 추적자는 맹렬히 따라간다.
그리고 혈마제는 안다. 추적자가 저 이름도 모르는 인간, 하나만이 아닐 거란걸.
‘이 새끼가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서 야산을 달리고 있는데.’
국가무공원이 쫓아올 것이다. 얼마 전, 대한민국에 새로 생긴 이 조직이 해 왔던 바를 생각하면 분명하다.
운하신권 같은 고수가 수장이며, 연화존자라는 불가사의한 고수가 버티고 있는 곳이다. 누가 그를 감당할 수 있나? 동방요선과 다도선객은 물론이고 북한-마교마저 박살이 나 버리지 않았나?
국가무공원은 자신들의 힘과 집요함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조차 곤란을 겪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것이다. 중국 국가안전부의 대남 조직이 모조리 붕괴했다는 흉흉한 소문은 혈마제의 입장에선 희소식이었지만, 그것도 며칠 전까지의 일.
뒤에 따라오는 미친놈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그 생각을 하면 분통이 터지지만. 그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 얼른 몸을 돌려 두 손을 편 채 뻗는다.
-쩌저정
고수로서의 육감이 그를 살린다.
“미친 새끼!”
어느새 자신의 뒤에 붙은 추적자가 눈에서 뇌기를 줄기줄기 흘리고 있었다. 뻗은 손바닥을 타고 찌릿함이 올라온다.
이것이 그가 도망친 이유다. 온갖 신비로운 내공심법이 존재하던 옛 강호에서도 익힌 자를 극히 볼 수 없었던 뇌기를 다루는 내공심법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를 만난 것이 혈마제의 불운.
저 위험한 힘을 요즘 같은 시대에 대체 어떻게 익힌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이로 인한 당황이 혈마제만의 몫은 아니다. 도심에서 다짜고짜 무공을 펼치며 싸운 추적자와 자신을 잡기 위해 나섰던 국가무공원 인원들조차 저자를 어쩌지 못해 일단 후퇴했다.
그렇다고 순순히 당해 줄 수야 없지.
“작작해라!”
도망만 쳐서는 떼 놓을 길이 없다는 걸 깨달은 혈마제가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다. 눈이 붉게 물드는 동시에 붉은 빛의 내공이 전신을 감싸며 손바닥에선 수강이 솟아오른다.
뇌기라는 신비로운 기운을 다루는 추적자의 목을 노린다.
“하아압!”
추적자 역시 멍하니 당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상정하고 준비한 초식이 있지 않나?
왼손과 오른손에 뇌기를 잔뜩 모은 뒤 손바닥을 겹치니, 우뢰와 같은 벽력성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바.
강기를 손에 두를 정도의 고수인 혈마제조차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파괴력이 일어난다.
“크아아악!”
결국 기운을 돌려 눈과 얼굴을 보호하며 거리를 벌리는 게 전부. 추적자가 단순히 복수심에 눈이 뒤집혀 쫓아온 게 아님을 증명한다.
지닌 바 무공의 경지는 물론이고 실전 경험 역시 혈마제가 앞섬에도 불구하고 뇌전의 힘이 그 모든 불리함을 뒤집을 거라는 확신이 추적자에겐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강박이.
“흐흐… 그래야지. 이 정도는 되야지. 그래야 내가 인생을 버려 가며 익힌 보람이 있지.”
동생을 잃은 추적자는 자신의 뇌기를 쐬고 얼굴이 익을 것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는 혈마제를 보고는 울며 웃었다.
그 또한 막대한 힘을 쏟아 낸 탓에 잠시 몸이 굳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회한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내가 이걸 익히려고 무슨 인생을 살았는지, 네놈이 알아?”
중년으로 넘어가기 직전쯤 되어 보이는 추적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지만, 얼굴이 익어 버릴 것 같은 고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혈마제에게는 그저 개소리일 뿐.
“오냐, 여기서 죽어 보자. 네놈 살을 저며 젓갈을 담가 주마.”
생존을 위해 꾹꾹 눌러 왔던 흉성이 폭발한다. 벌겋게 익어 버린 얼굴로 눈알을 번들거리며 추적자를 노려보니, 과연 이 살인마가 무슨 죄를 지어 고향을 떠나온 죄인인지 알 일.
“어차피 내 동생이 죽었을 때부터 난 끝났어, 개자식아. 알아? 네가 나한테 남은 유일한 걸 부쉈다고!”
추적자 역시 물러서지 않고 내력을 끌어올린다. 어찌나 힘을 끌어올렸던지 그간의 수련으로도 몸이 감당하지 못해 혈관이 지져지는 고통마저 느껴지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고통은 힘을 부른다. 크면 클수록 더 큰 힘이 따라오며, 즉각적이다. 그로써 살아 있음을 느낀다. 평생 익힌 무공이 그를 죽여 가며 힘을 준다.
육신이 익어 버리는 기분 속에 분노가 샘솟아 파도처럼 덮어 온다.
혈마제 역시 고통에서 힘을 끌어낸다. 긴 시간, 잘 숨겨 왔던 죄의 무게가 우연치 않게 드러남에 이 대량 살인마 또한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제 자신을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충돌하려 한다. 지직거리는 번개와 피를 먹은 강기가 다시 한번 부딪쳐 누구의 분노가 더 큰지, 누구의 고통이 더 깊은지 가려 보자며 포효하려 든다.
“거기까지.”
그럴 예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몸 성히 간다.”
땅에서 솟은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어느 순간 거기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지 않았다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사나운 무지개와 함께 그가 왔다.
“이 정도면 꽤 관대한 조건 아닌가?”
“여, 연화존자!”
이제는 티비와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유명인사가 되어 버린 연화존자의 출현에 혈마제의 투기가 급속하게 사그라든다.
그저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인 연화존자에게 심상치 않음을 느끼면서였다.
피부가 따갑다. 아까 익어 버린 것과는 다르다.
느낄 수 있다. 마치 수없이 많은 작은 바늘로 온몸의 피부도 모자라 구멍이란 구멍을 있는 대로 찔러 대는 무형의 기운을.
‘의기상인의 경지… 그것도 이 나를 상대로… 처, 천외천이구나!’
혈마제 유영 또한 어찌 되었든 간에 강기까지 뿜어내는 고수였기에, 평소 수하들에게 연화존자니, 국가무공원이니 다 언론 플레이라고 만들어진 허상 같은 것들이라며 허세를 부렸지만, 그건 말 그대로 허세.
오랜 도망자의 삶 속에 체득한 감이 말한다. 도망치라고. 안 되겠으면 숙이라고.
살 길은 그것뿐이라고.
“항복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내력을 거두고 무릎을 꿇은 뒤 머리를 바닥에 박는다.
여전히 뇌기를 양손 가득 담은 채 자신을 죽이려는 추적자를 앞에 두고 꽤 과감한 행보라고 연화존자는 여긴다.
생존 본능 하나만큼은 제대로 된 놈이구만.
“이놈!”
반면 혈육을 잃은 정체불명의 지명 수배자는 그렇지 못하다. 혈마제가 내력을 거두자마자 달려든 걸 보면 말이다.
추적자 또한 연화존자의 위압감을 느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과감하게 덤벼든다. 그것은 인생에 더 남은 것이 없기에 부릴 수 있는 자포자기.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은 그 뒤 없음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신 번개가 사방을 뒤덮으며 곧게 나아가 위용을 자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나 추적자가 몰랐던 것이 있으니, 그의 삶도, 죽음도 이제 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연화존자가 여기에 온 이상, 누구도 제 뜻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어리석군.”
혹 몰랐으면 어찌 틈이 났을지도 모르겠다만, 이미 수하들의 망신살을 통해 무림 초출 지명 수배자가 어떤 무공을 쓰는지 알고 온 터.
오행무극도의 무지개가 벼락을 가르며 뚫어 버린다.
“커헉!”
세 줄기의 무지개가 밤의 산 위로 떠오른다. 작열하던 벼락은 그 압도적이고 오묘한 힘에 저항하려 했지만, 못내 헛된 일.
버티고 버티던 추적자는 끝내 피를 토한다.
“아, 안 돼… 이렇게는… 안 돼…….”
그러나 가시지 않은 뇌기에 토한 피가 증발하는 지경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물어뜯을 기세로 아득바득 혈마제를 향해 기어가는 그를 보며, 결국 연화존자는 혀를 찼고. 손을 뻗어 수혈을 짚는다.
추적은 끝이 나고 정적은 찾아온다.
“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끝이 아니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얼이 빠진 혈마제에게 연화존자는 턱끝을 까닥였다.
“쟤 들고 따라와.”
살아남았다며 안도했던 범죄자의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만 생각한다. 데려가서 깨운 다음에 대체 무슨 사연인지 물어봐야겠다고. 대체 이게 다 무슨 난리냐고.
그리 먼 나중의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