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다소 격정적이지만 그래도 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던 김동연에 대한 설득에 비해, 혈마제 유영에 대한 영입 제안은 여러모로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다.
“제, 제가 왜 국가무공원의 비밀 부대에 들어가야 합니까?”
“싫어?”
“시, 싫은 게 아니라… 에, 그것이…….”
거창한 별호, 그에 걸맞는 잔인한 손속에도 혈마제는 연화존자 앞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며 겨우 말끝을 잇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살고 싶은 것인지, 무척이나 청산유수였지만.
“…저, 저 같은 놈이 어찌 대한민국 협객들이 모여 계시다는 국가무공원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한국인도 아니고, 심지어 범죄자인걸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요. 제가 국가무공원에서 잠시라도 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래도 여러 사람 곤란할 일 아니겠습니까? 연화존자의 보옥 같은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지요. 암요, 그럼요!”
그것은 김동연보다도 더 높은 무공 수위, 공산당의 생체 실험에 가까운 짓거리로 무공에 입문한 이후.
나머지 세월의 후반부를 사투로 채워 고수가 된 혈마제가 연화존자의 진정한 힘을 더 잘 느끼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만큼 몸과 내력이 반응하니, 두려움을 모른 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마제라니. 그런 건 눈앞의 저 악마 같은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별호인데!’
강렬하여 눈이 멀 것 같은 연화존자의 존재감에, 혈마제는 자신의 별호를 할 수만 있다면 뜯어 버리고 싶었다.
실제로 혈마제는 덜덜 떨리는 손과 자꾸만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육신을 필사적으로 다잡는 중이다.
사파 무림인의 기개, 뭐 그런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김동연과 같은 독대의 기회를 얻지 못한 덕에 주변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국가무공원 요원들의 살벌한 눈초리 때문에 그렇지.
“그럼 그냥 중국으로 가든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국으로 가 버리라는 말은 좀 너무했다.
“그럼 저 죽습니다!”
“왜? 여기선 못 죽을 것 같아?”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살기를 뿜어 대는 연화존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칠익회 출신 국가무공원들의 모습에 혈마제는 억울함에 눈물이 찔끔 나온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는 혈마제의 모습은 초라했다. 애초에 덩치가 크거나, 그리 귀티 나는 인상은 아니다.
애초에 공산당의 음모가 아니었다면 무공을 익힐 기회조차 없었을 가난한 농민공 집안의 아들이라고 했다. 과연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중국을 발칵 뒤집은 대량 살인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연화존자는 겉이 아닌 본질을 본다.
“그렇게 말하니 좀 재수없는데.”
“예, 예?”
“네가 죽인 놈이 어디 한둘이야?”
연화존자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슷하게 하여 내려다본다. 무릎을 꿇은 혈마제와 의자에 앉은 연화존자의 눈높이가 그렇다.
이제 천지극뢰라는 별호로 불릴 김동연 때와 다르게.
“난 널 갱생시키거나, 사면해 주거나 하려는 게 아니야, 혈마제. 그냥 방법을 말해 주는 거지.”
그리고 다른 것이 비단 시선의 위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야. 네 녀석이 법의 심판을 받겠다며 나선다 쳐 봐. 중국 측에서 바로 외교 항의 들어올걸?”
내국인인 김동연과 혈마제 유영은 경우가 달랐다.
“너, 공산당의 걸어 다니는 비급서잖아. 아마 네놈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해체하고, 검시하며 네 녀석의 겉과 속을 까발려 내공심법 하나 뚝딱 만들어 낼 거다. 쯧쯧. 그렇게 보면 참 사람 목숨 쉽게 여기는 놈들이란 말이야.”
하나 남은 가족마저 죽은 김동연과 달리, 혈마제에게는 그를 간절히 원하는 자들이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런 고로 네 녀석이 노출되는 순간 우리나라 외교부니, 법무부니 나서서 널 넘겨줘야 한다고 우릴 닦달할 거라고. 그럼 국가무공원에서 그걸 막아? 막 화내고, 고집 부려? 안 돼. 못 막아. 널 지켜 줄 명분이 없어. 자국의 범죄자를 내놓으라는데,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은 나라끼리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어?”
“그, 그건…….”
“아직도 못 알아듣는 척을 하네.”
연화존자가 혈마제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눈을 맞춘다.
“이봐, 혈마제 씨. 우리 좀 더 진솔해져 볼까?”
그러자 순간 혈마제의 몸에서 미약한 살기가 흐른다. 그것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본심, 경박한 말투와 태도로 가려진 내면의 깊은 진심이었지만, 곧바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꺼지고 만다.
연화존자의 눈에 맺힌 무지개를 보니, 언감생심의 참뜻을 절감했음이라.
“안 막지. 국가무공원이 왜 너 같은 쓸데도 없는 살인마를 보호해 줘야 되냐고. 그렇잖아? 하지만 네 녀석이 국가무공원의 비밀 부대로 들어오면, 이야기는 달라져.”
연화존자가 아까까지의 웃음기를 싹 뺀 채 혈마제라 불리는, 사실은 공산당의 피실험체에 불과했던 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강렬한 시선이다.
“널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하게 해 주마.”
그리고 연화존자의 말을 들은 혈마제 유영의 눈빛 또한 달라진다.
“다른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 관심도 없어.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널 감옥으로 끌고 가서 원치도 않는 무공을 익히게 한 놈들의 심장에 칼을 꽂을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거야.”
이 말에 혈마제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르르 떤다.
“범죄자로 묶여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두 손, 두 발 자유롭게 데려가겠다. 이게 내 약속이다.”
어떤 때는 살기 어렸고, 어떤 때는 경박했던 눈동자에 이루어 헤아릴 수 없는 격랑이 인다. 대량 살인마였던 그에게도 사연은 있는 걸까?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은 그저 가타부타를 정할 때.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는 겁니까?”
고민 끝에 나온 대답에 연화존자는 웃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연화존자는 혈마제를 중국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중국 내부에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키운다는 계획의 결과가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혈마제라 불리는 녀석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 할 거고.
짐승 같은 면모를 가진 놈의 목줄을 단단하게 조일 예정이었고. 그런 다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자신감, 이자가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혈마제 또한 강기를 다루는 무인.
사파의 무공을 익혀 성정이 잔혹하고 교활하기까지 하며, 중국과 대한민국 정부 어디에서도 불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며 잡히지 않던 범죄자를 과연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믿지 않았다.
“으아아악! 이, 이 빌어먹을 놈들!”
그렇기에 김동연의 설득을 먼저 진행한 것이었다.
혈마제가 무슨 짓을 해도 일단 방해하고 볼, 죽이려고 들 사람을 하나 들인 건 그런 이유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사, 살려 준다며!”
“죽일 거면 내가 직접 죽였지.”
연화존자의 말에 혈마제는 억장이 무너진 표정을 짓다가 뜨끔한 표정으로 김동연의 뇌기 어린 공격을 피한다. 그만큼 천지극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울러 생사 비무에 가까운 지금은 김동연의 요청.
김동연은 연화존자에게 말했다. 자신 또한 죄인인데, 이제 와 어쩌겠느냐고. 그렇지만 분이 풀릴 때까진 싸워야겠다고.
아무리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사이이고, 전과 다르게 살리라 다짐했어도 이대로 그냥은 못 넘어간다는 말에, 연화존자는 그러자고 했다.
무공을 익힌 자들끼리 무공으로 해결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우연이고, 아니고를 떠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김동연의 동생을 죽인 자가 혈마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는 것이 옳다.
“이 새끼가 날 물로 보고, 어디 감히.”
“기다리던 바다, 덤벼라.”
하여 국가무공원 지하 연무장에서 두 사람은 삼 일 밤낮을 치고 받고 싸웠다. 그냥 때리고 쓰러지고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 냈다.
실수로라도 서로를 죽이고 싶어 했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두 사람의 생사여탈권은 연화존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렇게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린 두 사람에게 연화존자는 한 가지 지시를 내린다.
“너희가 아는 나쁜 놈들에 대해서 쭉 적어 봐.”
“나쁜 놈들이요?”
“그래. 너희가 그 생활하면서 알게 된 녀석들 있잖아. 특별히 알려지지 않았어도 충분히 세상에 손가락질당하고도 남을 놈들.”
역시 있을 수밖에 없다.
천지극뢰 김동영은 지명수배를 피해 숨어 있었지만, 그의 동생이 뒷세계에서 브로커로 활동했기에 주워듣고 본 것이 많다.
실제로 동생이 죽은 사고에서 혈마제의 존재를 특정 짓고 곧바로 찾아온 것만 해도 나름의 견문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일.
혈마제는 뭐,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하던 일이 그런 건데.
“그런 것들은 왜 찾으십니까?”
“너희만 이런 꼴 당하는 거, 아깝지 않냐?”
연화존자의 대답에 정작 질문을 던진 김동영은 가만히 있는데, 혈마제의 눈빛이 홱 돈다.
아무래도 쌓인 게 많나 보다.
“그 말씀은?”
“한번 정리 좀 하게.”
세상에 모든 나쁜 놈이 드러나 있으리란 법은 없었고, 그 나쁜 놈이 무공을 익혔다면 더더욱 그렇다.
“밝은 데서 처리하는 거야 우리 윤 검사님이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신경 쓸 거 없고… 대신 숨어서 나쁜 짓 저지르는 놈들 쓸어버릴 때가 됐긴 했지.”
옛날만 못한 기예가 대다수라 하지만, 쉽게 벽을 뛰어넘고, 기척을 죽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오고 가는 재주는 좋은 일보다 좋지 못한 일에 쓰이는 일이 더 밝았다.
그리고 국가무공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머지않은 시기에 잠시 대한민국을 떠나 있을 연화존자는 이 나라의 미뤄 뒀던 묵은 때를 벗기고자 한다.
“저기… 그러면 문제가 좀 있지 않겠습니까? 인권이니, 법이니 그런 것들 말입니다.”
이제 국가무공원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인지, 혈마제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해서 연화존자를 웃게 만들었다.
“UN 무공헌장에 적혀 있잖아. 범죄를 저지른 무림인의 인권은 제한될 수 있다고.”
그렇게 나라와 사회의 그늘에 숨어 성실한 시민들에 기생하던 자들에 대한 처우가 결정되었다.
이를 위해 김동연과 혈마제는 그야말로 기억을 쥐어짰다. 특히 혈마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이미 관리하던 자들은 물론이고 굴복시킬 예정에 있던 자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적어서 제출해 연화존자를 기쁘게 만든다.
은거를 깨고 대한민국에 돌아온 뒤로 계속 그렇게 잡아넣고, 잡아넣었음에도 아직도 이렇게 악인들이 많다니!
당장 잡아들여야지.
“너, 너희 누구야?”
“조용히 따라와. 어디 하나 없어진 채로 실려 가기 싫으면.”
동네 장사 사채업자들, 정상적인 영업을 하는 걸로 위장해 자금 세탁을 하던 전문가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결성한 갱 등등.
사회 암적인 존재 여럿이 밀고를 통해 잡혀 왔지만, 앞선 두 사람처럼 연화존자를 보조하는 영광을 누리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었다.
‘무슨 삼청교육대도 아니고, 잡아다가 괴롭혀 봐야 뭐에 쓰겠어? 세상에 고통만 늘리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무슨 옛날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처럼 혀를 뽑고, 귀를 막아서 써먹을 것도 아니고.’
다 떠나서 연화존자를 보조할 만한 실력을 갖춘 자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 데려가 봐야 방해만 될 무공 수준을 가진 게 전부.
이에 억울해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잡아온 자들을 분류, 국가무공원 내 파견 검사들에게 넘겼다.
이제 국가무공원도 조직이 제법 커져서, 많은 수의 법률가와 수사관이 보충되었지만, 일거리는 일거리.
즐거운 비명이 사방에서 넘쳐났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즐거움이 있기도 했다.
“날 보자고 했다고?”
“그, 그렇습네다… 이것을… 전하라고…….”
한참 체포에 열을 올리던 것도 막바지에 들던 어느 날.
잡혀 온 이 중 억센 말투의 한국어를 쓰는 어떤 이가 연화존자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평양에서 왔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