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무림인의 만남은 종종 밤에 이루어지곤 한다.
만나는 자들의 신분과 관계가 바깥으로 알려져서 좋을 게 없을 경우에 특히 그렇다. 당사자들의 생각이나 가치관, 태도에 대한 진실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보기에 아니다 싶으면 물어뜯듯 이리저리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귀찮음을,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고 좋아할 리 없던 것.
오늘, 위장포를 위에 씌운 작은 어선에서 만나는 자들 역시 그러한 사정으로 이토록 어렵고 비밀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오죽하면 시선을 피하겠다며 해가 진 망망대해 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불확실하기 짝이 없게 인편을 통해 잡아야 했을까?
개중 먼저 제안을 건넸고, 먼저 와서 위장포를 씌운 낡은 어선에 자리 잡고 있던 자들은 셋이다. 한 사람은 젊고, 한 사람은 늙었으며, 한 사람은 그 사이쯤 되는 연배.
가장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터질 것 같은 긴장이 역력하다. 허리춤의 검을 손등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잡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땀이 흘러 달빛에조차 번들거릴 지경.
남자의 신분과 실력을 생각하면 다소 놀라운 일이라 하겠지만, 옆의 장년인 또한 정도는 덜할지언정 비슷한 결의 같은 감정이 떠돌고 있어 숨겨진 사정이 있겠거니 짐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이에 반해 노인의 얼굴은 담담하다. 준비된 의자에 앉아 허벅지 위에 한 자루의 검을 올려놓은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기다린다.
그리 좋아 보이는 몰골은 아니라 하겠다. 이마와 볼 사이로 뚝뚝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얕은 파도에 배라도 흔들릴 때면 안색이 급격하게 좋지 못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스승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심이 어떠하십니까?”
결국 보다 못한 장년인이 조심스레 권유한다.
후회를 가득 담았다. 애초에 오기 전에 말렸어야 했다는 생각.
“다음에 다시 날을 잡으시지요.”
남자, 무극검문의 셋째 명철검이 얼마 전의 충돌로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스승을 걱정한다.
스승의 건강도 건강이고 몰래 평양의 감시를 빠져나온 후폭풍도 후폭풍이지만 무엇보다 오늘 만나게 될 약속의 당사자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없다.”
이에 눈을 뜬 바싹 마른 노인, 무극검마가 지친 기색으로도 꼿꼿하게 답한다.
“그의 사정이 아니라 우리의 사정이 그렇다. 본문을 감시하는 다른 지파들과 보위부의 눈을 피할 기회가 다시 오리란 보장이 있더냐?”
연화존자의 출현으로 대남 도발에 동원됐던 거력패부 인원이 전멸하고, 무극검마와 그의 제자만이 겨우 살아 돌아온 이후, 이들에 대한 감시는 지금껏 끊어진 적이 없다.
누군가는 공화국 최고 존엄의 자존심에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감히 국가무공원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공화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얼굴에 똥칠을 하다 못해 변소에서 뒹굴다시피 한 셈이니, 책임 있는 이의 목숨값으로 달래야 하는 건 당연지사.
문제가 있다면 적당한 대상인 무극검문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감시의 눈길은 더욱 삼엄해질 것이다.”
정확히는 무극검마의 명성이, 또 마교지파 무극검문의 실력이 쉽게 처리할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이미 소비에트 시절부터 쌓인 무극검마의 명성은 옛 공산주의 진영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교의 다른 지파들과 달리 대민 지원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무극검마를 존경하는 이가 구 공산권 나라의 정재계에는 여럿 존재했고 북한은 이를 쏠쏠히 써먹어 왔다.
실제로 미국 및 유럽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거래한 나라가 중국과 러시아만 있는 게 아니어서, 무극검마의 이름 아래 오고 가는 은밀한 물자가 지금도 꽤 있다.
뭐든 아쉬운 처지인 북한 입장에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소리.
심지어 내부에서도 그럴 것이다. 이 존중은 공화국 내 패악질을 담당한 거력패부와 수령의 유흥을 담당하는 환희락락궁과 대비되며 더욱 그렇게 됐다.
온갖 나쁜 건 다 하는 자들 옆에서 오직 무도(武道)의 길에 정진하며 몸을 아끼지 않는 무극검문이 어찌 예뻐 보이지 않을 것인지.
하여 연화존자에게 패배한 일은 누군가에겐 기회다. 눈엣가시 같던 무극검문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혹은 없앨.
당장은 손을 못 대도 머지않은 미래에 이루어질 확률이 높은 결과.
“우리는 오늘 그를 만나야 한다.”
예정된 파멸을 막기 위해 무극검마는 결단을 내려야 했고, 직접 몸을 빼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하루 이틀의 준비가 아니었다. 무극검문의 은혜를 받은 이를 은밀히 탈북시킨 뒤 국가무공원과 접촉하게 한다는 희박한 성공 확률의 계획과 미리 정한 주파수로 단문의 연락을 주고받아 날짜와 시간을 정하는 데 성공한 건 진정 보통의 노력으로 된 일이 아닌 바.
“어차피 연화존자와 대화를 하려면 내가 와야 한다. 그래야 격이 맞아.”
그러니 연화존자와 대화를 하자면 역시 무극검마, 본인이 오는 것이 옳다. 그 정도 되는 고수와 만나 이야기를, 일을 진행하자면 그게 맞다.
설령 무극검마가 큰 내상을 입었고, 그 여파에서 지금껏 벗어나지 못했으며, 연화존자로 인해 그리되었다 해도 일문의 문주가 친히 와야 최소한 동등한 모습이라도 보일 수 있으리라.
제자들에게는 그런 게 더는 중요하지 않지만.
“스승님.”
잔잔한 파도에도 서 있지 못해 앉아서 손끝을 떠는 무극검마를 보는 두 제자의 심정은 참담하다.
경애하고 흠모하는 스승을 저 꼴로 만든 자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이 처지가 억울하여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는 본문의, 본교의 원수입니다!”
무극검마를 저리 만들고 동문이 무공을 폐하게 만든 자. 천마를 죽인 자의 손을 잡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못내 분해 눈물이 흐른다.
“참아야 한다.”
하나 쇠약해진 무극검마의 눈에선 형형한 빛만이 감돈다.
“살아남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굴욕이 있더라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
얼마 전, 자취를 감췄던 귀령살이 연화존자의 암살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준비한 길이다.
가혹한 대북 제재 아래 모든 것이 통제된 북한의 상황 속에서 살령지문을 통한 마약 판매가 북한 경제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더는 시간을 끌 여유 따위 없었다.
숙청의 칼날이, 아니 숙청의 기관포가 불을 뿜을 예정이었다. 이에 강철 인간의 무자비한 철퇴마저 버텨 낸 무극검마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멸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어찌 그리 약한 소리를 하는 게냐? 오왕 부차는 가시 장작 위에 누워 복수를 다짐했고, 월왕 구천은 간과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살아남았기에 가능했던 일 아니더냐?”
홍혈천마가 죽고, 그 시체를 바이칼 호수에 던진 후 문파를 이끌고 북한에 귀순한 건 그런 개죽음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단히 마음먹거라. 본문을 지켜야 하는 건 이제 너희다.”
이에 명철검과 무극검마의 일곱째 제자, 춘풍검이 눈물만 흘리며 아무 말도 못하던 그때.
“…아! 그가 오는구나.”
쇠약해진 무극검마의 귀로도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온다.
당사자는 머지않아 나타난다, 조금은 기묘한 몰골로.
“설마 했는데 진짜 나왔군, 무극검마.”
연화존자는 직접 수영을 해서 왔다. 아마도 거리를 두고 타고 온 배가 있을 거라고, 거기서 뛰어내려 여기까지 헤엄쳐 왔을 거라고 무극검마와 그의 제자들은 짐작해 본다.
설마 동해 바다를 뭍에서 여기까지 헤엄쳐 왔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초인의 체력과 심후한 내력은 둘째치고 방향과 위치를 어찌 잡을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공전절후의 고수라도 두 사람을 양손에 끼고서 그러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푸! 어, 어허허흑.”
“엄살은.”
연화존자는 양손에 건장한 성인 남자, 그것도 무공을 익힌 게 틀림없는 둘을 잡고 헤엄쳐 옴으로써 무극검문의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무극검마조차 따라할 수 없는 재주였다. 과연 천마격살자, 천외천의 존재.
아울러 데려온 자들이 무공을 익혔다는 걸 확신한다. 다른 게 아니다. 양팔을 감싼 채 덜덜 떨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간 무표정한 남자가 손을 잡고 뜨겁다 못해 따가운 열기로 감싸 물기를 날려 버리는 걸 보면 모르기도 힘들다.
보기 드문 뇌력공을 일으킨 남자, 근래 성명절기를 따 국가무공원 내에서 천지극뢰라 불리는 일이 잦은 김동연이 혈마제의 물기를 날리는 솜씨란 그만큼 드러날 수밖에 없게 거칠었다.
“아, 아, 따가워!”
“싫으면 얼어 뒈지든가.”
천지극뢰는 튀겨 버릴 기세로, 그래도 상관없다는 기세로 열기를 북돋았고 혈마제는 내력을 일으켜 이에 저항한다.
하여 명철검과 춘풍검은 이게 대체 다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긴. 아무리 별의별 꼴을 다 보며 살아온 마교지파라 해도 중국에서 지명수배 된 대량 살인마와 그에게 유일한 가족을 잃은 남자를 붙잡고 연화존자가 바다를 건넌 저간의 사정이란 건 알 수 없을 테지.
연화존자에게는 하등 하찮은 논외의 것이었지만.
“피차 바쁜 몸이니 본론부터 얘기하지. 날 왜 불렀지?”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촌극에 시선이 팔린 사이, 어느새 젖은 몸을 뽀송하게 말린 연화존자가 뱃전에 앉아 태평한 질문을 던진다.
많은 반대에도 우직하게 오늘의 자리에 나타난 사람치고는 꽤나 아무렇지 않은 태도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잘 알 테지? 미리 할 말을 준비했길 바라.”
무극검마가 북한의 감시를 받듯이 연화존자 또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
북한-마교에 가해지는 압력만큼은 아니어도 연화존자의 소재는 관리 대상이다. 국가무공원이라는 전무후무한 조직의 설계자는 이제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우리를 도와주게.”
“준비한 말이 그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하지만 무극검마의 솔직담백한 말은 연화존자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내가 왜? 아, 그래. 북한에 동조자가 있으면 좋긴 하겠지. 내가 천마의 목을 따긴 했지만 마교지파라고 눈 까뒤집고 때려잡아야 된다는 반공주의자까지는 또 아니거든. 그랬으면 지금 저쪽 컨테이너에 묶여 계신 암살자는 지금쯤 변사체가 되어 있을 테니 말이야.”
살벌한 농담을 던진 연화존자의 미소가 깊어진다.
호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무극검문을 도울 의리라는 게 있나? 현재 시점에서 당신들한테 손을 내밀었다가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처지인데, 내가.”
북한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은 일이 없을 것은 뻔하디뻔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은밀한 만남을 할 필요가 없을 일.
예상되는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우선 내부의 반발부터가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이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기이해서 조금이라도 어느 쪽 편을 들거나, 혹은 든다는 생각을 들게 하면 득달같이 어디선가 누군가 나타나 온갖 비난과 조롱과 악의를 퍼붓는 편이었고 개중에서도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최악.
중국 측의 사주이긴 하지만 얼마 전 무극검마를 살려 보냈다가 청문회에 끌려간 일이 당장 그렇지 않던가?
그 전까지만 해도 친미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이라며 욕을 먹다가 어느 순간 빨갱이가 아니냐며 욕을 먹고 있는 그 모순이란.
이제는 기준점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연화존자는 여기던 참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도 생각할 수밖에 없고 말이야. 이제 겨우 미국 내에서 사업 좀 시작할 상황인데, 내가 당신 손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미국과의 관계도 그렇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적이 필요해서건, 아니면 본토 타격에 대한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이 실제건 상관없이 북한과 가까운 관계는 미국의 의구심을 더더욱 깊게 만들고도 남으리라.
“뭐가 되었든 간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럼… 준비한 대화는 이제 끝?”
연화존자의 미소에 살기가 어리고, 넘실대는 무지개빛 내력이 슬금슬금 영역을 확장하던 바로 그때.
무극검마가 입을 연다.
“통일을… 이루고 싶지 않나?”
“뭐?”
“대한민국의 통일 말이세.”
“뭐라고? 하하하하하!”
무극검마의 준비한 제안이 연화존자를 그만 웃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