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세상에. 마교도가 읊조리는 민족의 소원이라니.
그 어이없음에 자기도 모르게 파안대소하며 연화존자는 떠올린다. 이미 오래전, 공산주의 세계에 참여하여 지대한 활약을 한 바 있는 강자존주의자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말해 봐.”
웃음을 뚝 그친 연화존자의 기세는 어이없음과 함께 흘러나온다.
“다만 헛소리는 받아 주지 않겠다, 무극검마.”
날이 선 냉혹함이 선상을 지배한다.
“너도 북한에서 제법 살았으니, 이 나라에 통일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알겠지. 그건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라면 특히나.”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반으로 갈라진 채 한 세기로 나아가는, 어쩔 도리도 없이 그 지경이 된 나라에서는 반드시 신중해야 하는 법이라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만약 무극검마와 그의 문파가 생존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으며 통일에 대한 고민이 말뿐인 기만이었다면, 그렇다면 홀로 북한의 심장에 잠입해 마교의 또 하나를 끊어 버리고 말겠노라, 연화존자는 다짐한다.
“제대로 설명해라. 허튼 소리면 여기 너희 셋이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 아, 너희가 여기서 죽으면 내가 아니어도 위대한 령도자 동무 손에 다 뒈지긴 하겠군.”
무극검문의 곤란한 사정은 여기 오기 전, 국정원에 들러 브리핑 받은 바 있다.
대북 정보력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국정원답게 무극검마의 사정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수집한 것들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고를 들으며 연화존자는 이들이 매우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 역시 충분히 인지했다.
그래서 온 것이기도 했다. 생존의 위기에 몰린 마교지파 무극검문이 왜 하필 자신을 찾는 것인지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의 반대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온 것이다, 연화존자. 자네가 어떤 자들을 데려온 건지 의아하긴 하지만, 그래. 그런 건 상관없겠지.”
무엇보다 혈마제와 천지극뢰를 데려간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렇지 않나? 무극검마와 그 제자들이 나올 것이 뻔한 자리에 아무리 금제를, 그러니까 연화존자가 풀어 주지 않으면 일정 시간마다 극한의 고통을 받는 처리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데리고 가겠다니.
특히나 칠익회 출신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지만, 연화존자는 단행했다.
저들을 믿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여차하면 고기방패로 써먹기 위해 데려온 거니까.
감옥 대신 들어온 국가무공원에서 저들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위험한 자리에서 소임을 다할 것.
그로써 속죄할 것.
“진심이다, 연화존자. 믿기 힘들겠지만… 이게 노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제안이다.”
거기에 더해 실질적인 위험의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북한 또는 중국의 수작이라면?
다행히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 약속 장소가 될 배 위에 폭탄을 싣고 터트린다거나 아니면 숨어 있던 잠수함이나 전투함 등이 기습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만, 음험한 음모가 꼭 오늘 여기서만 이루어지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는 일.
“북한과 남한의 통일을 위해 협력하겠다.”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연화존자는 무극검마의 눈빛에서 간절함과 진실함을 읽는다.
“남북의 통일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간에. 그러니 우리가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다오.”
그 말에서 연화존자가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무극검마조차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엇으로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상이 없다는 것. 그렇기에 무공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자신에게 매달리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믿기 힘든 일이라고 연화존자는 생각하며 고민은 길어진다.
‘무극검문을 살려 달라? 어떻게? 무엇으로?’
여러 가지 방안들이 머리를 떠돌지만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그리하여 다시금 죽음 같은 침묵이 바다 위를 망령되게 떠돈다.
하지만 상황이 그로 하여금 고민을 길게 가져갈 수 없게 만든다.
“쿨럭.”
마지막 심력을 소모한 탓일까? 아니면 평양에서 여기까지 움직이며 무리한 탓일까? 용건을 겨우 밝힌 무극검마가 돌연 기침과 함께 검붉은 핏덩이를 속에서부터 토해 내기 시작한다.
“스승님!”
연화존자가 오기 전까지의 굳건함이란, 그가 지닌 마지막 기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의 마지막. 그간의 모든 위기 속에서도 어찌어찌 버텨 온 마교지파가 극한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 버텨 오던 정신이 생사대적이나 다름없는 자와 마주함에 그만 무너진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생사의 기로에 선 모습은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부, 부디… 크흑…….”
그 와중에도 무극검마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논해야 할 것이 많음에도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왜 하필 교의 원수에게 도와 달라 손을 내밀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남북의 통일을 돕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시대의 거마는 밝히지 못했다.
하나 애석할 따름이다.
연화존자에게 패배했다고 하나, 역시나 무림의 고수인 그이기에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남은 생명이란 심지가 닳은 초나 다름없다는 것을.
연하존자와의 생사결에서 패배한 일과 이후 조선노동당과 다른 마교지파의 견제로 마땅히 이루었어야 할 진기요상의 때를 놓쳤던 일은 그만큼 치명적.
아무래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떠나야만 할 것 같다는 예감은 진하디진하다.
“하, 참. 고작 이렇게 이야기하고 쓰러진다고?”
그렇지만 여기, 그와 같은 미지함을 용납 못 하는 남자가 있다.
무릇 하늘 아래 생과 사를 가르는 건 연화존자의 의지인 바.
무극검마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오지 말라!”
이에 무극검마의 제자, 춘풍검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외친다.
“이 간나새끼! 너, 이 미제 자본주의 앞잡이 새끼가 감히 스승님을!”
무극검문 내에서도 연화존자에 대한 유감이 가장 많은 이였다. 그것은 얼마 전, DMZ에서의 일로 무공을 잃은 현현검과 함께 무공에 입문한 인연에서 기인했던 바.
기아로 길바닥에서 죽었어야 할 자신을 구원한 스승, 무극검마를 위협한 연화존자에게 악감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뽑아 든 검의 넘실대는 검기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비켜.”
하늘 아래 무엇에도 거침없는 연화존자에게는 가소로울 따름이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산 거 안 좋아하니까. 네 스승이 곧 숨넘어갈 상황인데 날 막아서서 뭘 어쩌자고?”
“네놈을 어찌 믿고 스승님을 맡기겠나!”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저대로 두면 네 스승은 확실히 죽어. 난 무극검마가 고작 이 정도만 얘기해 놓고 죽게 놔둘 생각이 없고.”
“날 치우기 전까진 스승님께 갈 수 없다, 위선자! 흐아압!”
기어코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춘풍검을 보며 연화존자는 차갑게 비웃었다. 그리고 공방이랄 것도 없는 충돌은 순식간.
명문검파의 제자답게 춘풍검의 솜씨는 예리하게 연화존자의 목을 노리지만, 이미 그 수를 읽은 손바닥에 곧장 가로막힌다.
귀를 때리는 쇳소리와 함께 춘풍검은 검을 놓칠 뻔했다. 찬란한 오색빛깔 수강이 어린 연화존자의 왼손이 마치 거대한 바위라도 된 것처럼, 설령 진짜 바위벽이라도 능히 갈라 내고도 남았을 자신의 검을 철벽처럼 막아 세웠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멈춘 칼날은 손가락을 접어 잡은 뒤 뎅겅 두 동강을 내어 버리니,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춘풍검의 속을 완전히 뒤흔든다.
“쿠웨엑.”
그 안에 실린 거대한 반탄지기에 춘풍검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무릎을 꿇는다.
연화존자에 대한 증오가 한풀 꺾여 버릴 만큼,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에 스승처럼 피를 토하며 버티질 못한다.
그걸 보며 연화존자는 스쳐 지나갔다. 토막 난 춘풍검의 검을 무심히 파도 아래 던져 버리고선, 그대로.
“네놈들!”
이에 옆에 있던 명철검이 노호성과 함께 나서려 했지만, 그런 그를 막는 건 두 사람.
“거, 보고도 모르나? 여기 있는 인간들이 다 덤벼도 상대가 안 된다는걸?”
이죽거리는 남자와 무표정하게 조용히 있던 남자가 명철검의 앞을 막아선다. 은은히 끌어 올린 내력이 참으로 상반된 자들이었고, 이 초유의 사태에 명철검은 황당함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낀다.
감히 무극검마의 제자인 자신에게 이토록 대거리할 자들이 있을 거라고 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쇼, 뒤지기 싫으면.”
더 환장하겠는 건 저 말이 그리 틀리지도 않다는 사실.
설령 연화존자가 빠진대도 말이다. 대체 얼마나 사람을 죽이고 다닌 것인지 눈가에 혈기마저 감도는 남자와 조용히 뇌기를 끌어 올리는 무표정한 남자를 동시에 감당하기는 버거워 보인다.
과연 연화존자. 암묵적 천하제일인의 위용인가? 대체 어디서 이런 자들을 구해서 온 것인지.
한편으론 그의 말을 인정하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있다. 정말로 그의 경애하는 스승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걸로 보이니까.
그리하여 북에서 온 무극검문의 제자 중 하나는 정신을 못 차린 채 쓰러져 있고, 다른 하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어느새 무극검마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연화존자가 나지막하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무극검문을 구해 달라고 했지? 구체적인 방안은 생각해 놓은 게 없지만, 내게 원하는 게 그런 거라고.”
토해 낸 피로 하얀 수염이 검붉게 물든 무극검마는 그와 대조되는 평온한 눈빛으로 자신의 생사 대적을 바라본다.
한때는 그를 뛰어넘겠다고, 천마를 죽인 교의 대적자를 반드시 무공으로 누르고야 말겠다며 열의에 불탔던 적도 있었던 노마두(老魔頭)는 이제 미련이 없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귀령살, 그자도 그걸 깨달았으니 사로잡혔음에도 자진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겠지.’
천마신교가 자유세계에 자랑하던 암살자들의 수장조차 연화존자를 죽이는 데 실패하여 산 채로 사로잡혔다는 소식은 북쪽까지 전해졌다.
이는 무극검마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동시에 비참함을 선사했다. 언제부터 자신이 남의 눈치나 보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위로받았던가?
갈 때가 된 것이다. 이미 늦었고,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 말을 듣고 방금 생각해 본 건데, 위기에 처한 무극검문을 구하려면 역시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
연화존자는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연화존자의 손이 무극검마의 단전 위에 얹어진다. 가볍지만, 그 안에 가득한 건 마공과 완전히 상반된 기운을 지닌 연화신공의 내력.
이에 화들짝 놀란 무극검마의 내기가 불길처럼 일어나며 반발하지만, 밤바다 위 작은 무지개는 뜻밖에도 이를 달래며 서서히 스며든다.
긴 세월, 홍혈천마의 천마신교가 침묵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쌓아 온 내력은 마치 바다처럼 깊고 짙었지만, 결국 우주의 시작, 혼원에서 비롯된 것.
만류귀종의 묘리야말로 연화신공의 극의였던 바.
오행무극도의 무지개는 마기의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며 그의 선천지기에게 닿는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노마두의 내력은 뜻밖의 기사에 어쩔 줄을 모르지만, 연화신공은 할 일을 한다.
텅 비어 버려 소멸하기 직전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 무극필반의 원리를 내공의 세계에서 실천하는 것.
주변에선 이것의 실현을 보며 경악 중이다.
“세상에…….”
누구인지 모를 이의 감탄은 이 일의 놀라움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비워진 선천진기가 채워진다고 이미 흘린 피가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깊어졌던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 팽팽해지고, 비쩍 말랐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무림의 기사였다.
“어떻게… 이렇게…….”
그것은 무극검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화신공을 알고 있다. 천마의 목이 베이는 걸 목격했고 직접 검을 맞대고 싸워 봤기에, 연화신공이라 불리는 이 희대의 무공이 마공의 완전한 대척점이란 걸 뼈저리게 깨달은 지 오래다.
한데 그것으로부터 목숨의 구원을 받다니.
“무극검마.”
그렇게 자리한 모두를 놀라게 한 연화존자가 감았던 눈을 뜨곤 고요히 입을 연다.
“너의 문파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간결하게 요구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구하라. 누구에게 기대지 말고, 마교도답게.”
무극검마는 이에 따랐다.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를 지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