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환희락락궁 소속 대남 간첩 전원 소탕이라는 타이틀은 이번에도 역시 많은 설왕설래를 일으켰다.
간첩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누군가는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딨냐며,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간첩 사건은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속을 들여다보자면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 사실.
간첩의 존재를 부정하는 쪽도, 부정하지 않는 쪽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 간첩 사건 조작이 얼마나 많았던가? 해외에서 자기 부인을 죽여 놓고 여간첩을 잡은 영웅이 되어 버린 개같은 쓰레기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국가의 필요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마저 씻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증거 조작과 고문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21세기 재판에서도 미란다 원칙 고지조차 안 지켰다는 진술이 있던 간첩 조작 사건마저 나온 와중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간첩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니까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만드는 새끼들이 제일 악질인 거야. 그런 놈들 때문에 진짜 간첩들이 도망칠 여지가 있잖아.”
환희락락궁이 그렇다.
이 비밀스럽지만 악명 높은 마교지파는 북한 내부에선 백두혈통에 대한 접대와 유흥을 맡고 있지만, 남한에 내려온 환희락락궁의 정예들은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북한의 대남 조직을 떠받치는 중추를 맡고 있다.
환희락락궁의 희락은 비밀스러운 커넥션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기술이었으며, 실제로 그간 적발되었던 환희락락궁의 조력자들은 그녀들에 대한 진술을 하느니 징역살이 하는 쪽을 선택할 정도로 충절을 지켰던 바.
과연 마교의 무공은 마교의 무공이라 할 일이었다. 실제로 어느 방송인가에 나왔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출소한 환희락락궁의 협력자는 이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나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을 정도.
“너 같은 진짜 간첩들을 말이야, 안 그래?”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은 그런 일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앞서 북한과 엮인 일들 때문에라도 말이다. 어디서, 어떻게 정보가 샐 지 모른다는 강박이 국가무공원의 고위층에는 분명 존재했고 거의 집단 심리에 준하는 열정은 무극검문의 손을 잡게 될 하나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내부가 분열되어서야 어디 국가와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단 말인가?
“어차피 끝났어, 아는 걸 다 말해.”
무극검문 쪽에서도 환희락락궁의 세력을 줄이는 건 필요했다.
애초에 무도를 수행하는 정통적인 무림인의 태도를 견지하는 무극검문과 주로 어린 여아들을 납치에 가깝게 데려와 무공을 가르쳐 소모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환희락락궁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시절, 무극검문과 환희락락궁이 여러 번 충돌이 있었을 정도.
그나마 홍혈천마가 살아 있어 중재에 나섰기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소련이 건재하고, 천마의 권위가 살아 있을 때 감히 같은 마교의 일원들끼리 칼부림을 할 수는 없었으니, 환희락락궁을 북한으로 추방하는 선에서 일을 맺음 지었지.
하지만 처지가 뒤바뀐 두 문파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무극검마가 환희락락궁에 납치된 아이 중 하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며 극단으로 치달아 서로를 잠재적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태.
무극검문에서 마교의 남파 간첩들 파악에 열을 올리고 그 목록을 넘긴 이유라 하겠다.
“…무극검문과 손을 잡았나?”
칠락요희는 모든 상황을 종합한 끝에 올바른 과정을 역산해 낸다.
마침 결정적인 증인을 보기도 했었고.
“네놈이랑 같이 왔던 젊은 놈, 그놈의 내력이 무극검문 놈들과 같았어.”
그전까지만 해도 칠락요희는 국가무공원의 심문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연화신공에 의해 무너진 내력을 수습할 여유도 없이 각혈을 하는 와중에도 희락공을 발휘, 심문관들을 꾀어내는 바람에 국가무공원 내에서도 몇 번이나 난리가 났다.
과연 남한으로 파견된 환희락락궁의 요녀 중 최고수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연화신공에 당해 내력의 흐름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생명을 담보로 한 발악을 감당할 고수가 이 안에도 몇 없었다.
하여 연화존자가 자처하여 심문을 하는 중인 상황.
칠락요희는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헝크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괴괴한 귀기를 띄고 있지만, 연화존자는 손쉽게 받아 내며 되레 질문한다.
“네가 뭘 할 수 있는 처지인가?”
그는 이 마교도 여간첩의 다가올 운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어차피 넌 이제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간첩 행위 정도로는 사형선고를 받지 않아.”
“재미없는 장난이군.”
되도 않는 소리에 비웃음을 날릴 만큼.
“그래, 대한민국이 간첩에게 사형선고까진 내리지 않지. 근데 북한의 조선노동당 쪽은 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다를걸?”
북한의 고위급 탈북자 중 암살된 자가 한둘이 아니다. 오죽하면 전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큰 아들조차 머나먼 이국땅에서 잘 짜여진 각본 속에 독극물로 사망했을까?
“네 입을 막고 싶을 거고, 막으려고 들 거다. 물론 금방 이루어지진 않을 거고, 쉽지도 않겠지. 북한의 대남 간첩 조직 상당수는 근래 붕괴하다시피 했으니까. 하지만 나조차도 북한이 작정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는 걸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어.”
또 다른 거물급 탈북자 중에는 자기 집 욕실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자가 있을 정도.
그것도 국무총리 이상급의 경호를 받는 와중에 말이다. 그러니 북한에서 또 그런 일을 해내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않겠나?
그것은 반드시 이런 일에 나설 암살자가 준비되어 있기도 한데 말이다.
“그리고 널 죽일 암살자는 반드시 네 사매 중 하나가 올 거란 걸 나도 알고, 너도 알아.”
환희락락궁의 법도였다. 문파를 배신한 자, 혹은 문파를 배신할 상황에 처할 자가 나오면 반드시 문도 중 하나 이상이 나서서 죽일 것.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것이 마교스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북한스럽다고 해야 할지.
“그러니까 서로 아는 헛소리는 집어치우자고. 그럴 시간 없으니까.”
숙련된 무인이자 잘 훈련된 직파 간첩인 칠락요희는 연화존자의 압박에도 육체적 반응을 잘 조절하고 있었지만, 절대고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동요 중이다.
“협조해. 그러면 최대한 보호해 주겠다.”
국가무공원은 칠락요희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우선 그녀는 환희락락궁이라는 베일에 쌓인 조직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환희락락궁의 최근 사정에 대해서는 조금 약할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의 무공, 입신의 경지로 나아가는 고수인 연화존자조차 깜빡 알아채지 못할 기이한 수법에 대한 파훼만은 상당한 진보가 있으리라.
특히 당문그룹에서 그녀를 비롯한 환희락락궁의 간첩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독으로 쓸 수 있는 거라면 오폐수 처리장의 썩은 물마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그룹 산하 연구원들이 내력으로 발현되는 교란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몸이 달았다고 당청영은 전해 왔다.
적어도 국가무공원은 그녀에게서 쓸모를 느끼고 있다.
“그걸 어떻게 믿지?”
하지만 칠락요희의 입장은 다르다.
“남조선 정부가 탈북한 자들을 필요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하는 걸 보았어. 남한으로 귀순하면 저들 필요에 따라 불러서 여기 세웠다, 저기 세웠다 하지만 막상 지도자가 바뀌거나 거슬린다 싶으면 치워 버리는 건 북한과 똑같지 않았나?”
북한과 남한 사이에 끼어 있는 채로 살아 왔던 마교의 여인은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그러니 북한을 탈출한 자들도 제 쓸모에 따라 허황된 말들을 이리저리 늘어 놓으며 떠도는 게 아니냔 말이야? 거짓말로라도 관심을 끌어야 살 수 있으니까.”
일부 탈북자의 거짓 증언에 대해서 연화존자도 알고 있다. 진술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 몇몇 증언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는 바람에 유엔의 대북 인권 결의안의 힘이 빠졌다는 사실을 그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딱히 답하지 않는다. 침묵하며 듣는다.
분단이라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살아온 여인에게 아무래도 대답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국가무공원에 협조하면 난 또 무슨 거짓을 말하며 살아야 되나, 연화존자? 쓸모에 따라 이용되며 얼굴이 팔리다가 어디로 보이지 않게 쫓아낼 거지? 내게 무슨 협조를 원하나? 북한에 대한 증오와 분노라도 이끌어 내라는 건가?”
먹고살기 위해 환희락락궁에 들어가 무인이자 간첩이라는 도구로 쓰이며 평생을 살아온 여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연화존자를 노려본다.
어쩌면 그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연화존자는 천천히 입을 연다.
“난 환희락락궁을 지워 버릴 지식을 원한다. 그게 내가 너에게 바라는 오직 한 가지야.”
“지식?”
“그래. 그거면 충분해.”
그는 턱을 괸 채 말한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이미 결론이 난 조건들을 술술 풀어놓는다.
“경호 인력이 붙을 거다. 당연히 감시를 겸하지. 지금 상황만 봐도 이해할 거야. 네 희락공을 감당 못해 이 내가 직접 들어오지 않았나? 그렇지만 너와 다른 이들의 협조를 받는다면, 머지않아 파훼할 수 있는 수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고 나면 이제 날 치우거나, 방치할 건가?”
“아니. 나는 그렇게 일하지 않아.”
여전히 날이 서 있는 그녀에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제시한다.
“악한 자는 악하게, 선한 자는 선하게 대하는 것이 내 인생의 철칙이지. 마찬가지로 신의를 지킨 자에게는 신의를 지킨다.”
“…….”
“네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주겠다.”
연화존자는 약속한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신분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도 들어주겠다. 대한민국이 싫다면 내 개인적인 인맥을 이용해서라도 외국으로 보내 주지.”
답을 정해 놓고 제시한 건 아니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문파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면 그조차 존중해 주겠다.”
어차피 희락공을 익힌 요녀였다.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말이었고, 철저한 감시에도 언제든 틈을 볼 수 있는 실력은 충분히 갖춘 여자다.
단순히 내공을 금제한다고 다인 것도 아닌 게 그들이 익힌 기예라는 것이 내공 한 줌 없이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라, 신뢰 없이 함께 가긴 아무래도 어려운 일.
“그러니 선택하라.”
다만 연화존자의 긍휼일 뿐이다.
제 의지로 선택한 것이 거의 없는 인생을 살아온 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
“간첩으로 죽을지, 아니면 모르던 네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 볼지.”
긴 침묵 끝에 칠락요희는 고개를 끄덕였으니, 이를 믿고 연화존자는 그녀를 국가무공원으로 데려갔다.
그 과정에서 귀중한 정보 여럿을 얻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희락공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거니와, 제법 고위급인 칠락요희의 진술을 통해 해외에 존재하는 다른 환희락락궁 무인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칠락요희를 통해 설득에 애를 먹던 다른 간첩들을 귀순시킬 수 있기도 했다. 잔인한 마교지파일지언정 그 안에서도 나름의 인망이 존재했던 모양.
무극검문의 춘풍검은 이러한 상황에 거북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어차피 기호지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탈북한 계기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대담을 진행하고, 채널에 얼굴을 비추며 바쁘게 지낸다.
그사이 얼마 전 추진했던 의료 재단과 병원 설립의 허가가 났으며, 윤아영의 지방 조직폭력배 준동에 대한 선제적 수사 또한 마무리가 되었고, 아울러 진기도인단의 2기가 출범하며 모두가 바쁘던 가운데.
연화존자가 기다리던 소식이 당가그룹을 통해서 전해진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야 결론을 내릴 수 있겠더군요.”
손수 자필로 적은 문서를 들고 찾아온 독군 당군명은 조심스레 그것을 연화존자에게 넘긴다.
“저희 그룹은 이들에게 연화존자의 제자가 될 잠재적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가 대한민국을 잠시 떠날 순간이 운명처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