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연화존자는 한참을 그 문서들을 읽고 씨름하며 고민했다.
거기에는 제자로 삼기를 추천한 아이 혹은 청년들의 자질에 대한 검증과 성장 배경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당가그룹의 협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확인한 사실들에는 안타까운 사연과 감탄을 부르는 의지 같은 것들이 빽빽하게 써 내려져 간, 보안을 위해 손으로 적은 기록들.
그 안에 담긴 인생을 읽어 내려가는 행위는 묘한 감상을 안겨 준다.
그건 아마도 김철민이 여태껏 제자를 들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는지.
이것이 어찌 보면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란 걸 스스로도 알고 있다. 정식으로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뿐이지 무공을 가르친 일이 어디 한두 해이던가? 또 한두 명이던가?
뿌린 무공과 이를 익힌 사람수만 따져 보아도 말이다. 현천공 자체도 부모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아 아버지의 친우였던 운하신권에게 이 나라를 위해 써 달라고 넘긴 것이고, 무엇보다 칠익회 출신 인원들 거의 대부분이 김철민에게 무공을 배운 것이 아닌지.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진기도인단을 가르치고, 윤아영에게 연화신공을 전수한 일도 있었건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자신의 진신절학은 물론이요, 사상과 가치관을 전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렇기에 자신은 아직까지 제자가 없는 것이 맞다고.
그렇기에 무공을 더욱 쉽게 세상에 풀 수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만약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제자가 있었더라면, 과연 그렇게 사심 없이 전부 내놓을 수 있었을지.
제자가 없고, 가족이 없는 것이 이럴 때는 차라리 복이던가?
하지만 꽤 커다란 규모의, 장기간 프로젝트를 앞둔 지금, 고민하게 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무공‘만’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인지에 대해.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장악한 공산당이라는 집단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에 맞서는 인생이란 결코 쉽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기에.
연화존자 김철민, 그 하나만이라면 자신 있다.
일기당천의 절대고수인 그이기에 어느 한쪽이 죽어 버리는, 그러니까 끝장을 보는 싸움을 시작한다면 결코 지지 않을 거라는 내심의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이는 오만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가깝다.
그저 옳은 길이 아니란 걸 알 뿐이다.
어찌 사람을 죽이자고 무공을 익혔겠는가? 그러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르친 신공절학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을 어찌 죽일 것이며, 설령 죽인다 한들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되는 법이 없다.
개인과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집단 사이의 일이라면 마음을 모을 수 있어야 하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와 증오는 오직 스스로를 잡아먹을 뿐이며, 종국에는 더 큰 문제를 불러오기 마련이란 걸 연화존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종신토록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독재자를 죽인 뒤, 지금껏 이어져 온 역사의 목격담이 그렇다.
아버지가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는 걸 알고 있고 여전히 지금도 존경하고 있지만,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묻어 버릴 수 있는 건 없다고. 드러날 일은 언제고 드러나기 마련이며 감출 수 없는 건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다는 걸 김철민은 알고 있다.
그런 걸로 분열을 막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을 바꾸기 위해 돌아온 그가 지금껏 해 온 일들을 바로 그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일.
지금까진 나름의 성과가 있고 전망도 밝지만, 이것이 낯선 땅에서 먹힐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어렵다고 또 포기할 수는 없지.’
할 수 없다는 실의로 손을 놔 버리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쪽팔리게.’
다 내던지고 자포자기하는 걸 다시 할 수는 없다고, 또다시 그렇게 산다면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 될 거라고 여기고 있다.
그만큼 놀며 외면했으면 충분하다.
거기에 더해진 동기부여가 있기도 하다.
‘마교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나랏일도 나랏일이지만 개인적인 사유, 무공의 증진을 위한 정보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아 얼마 전 성과가 있었다.
중국과 미국에 마교지파 묵혈성의 나머지 신물들이 존재한다는 믿을 만한 첩보가 그것이다. 정확한 소유자를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마지막 경로가 그렇다.
연화존자가 찾아야 할 물건들이 두 나라로 흘러 들어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만큼 마교의 물건은 슈퍼 리치들의 좋은 수집품이 된 처지. 빛나던 옛 영광은 그런 식으로 퇴색되어 한때 붉은 공포의 한 축이었던 천마신교의 유산은 경쟁적인 경매 입찰의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아련한 향수와 결부된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수집품으로.
그러니 흑혈성의 신물, 지금에 와서는 알아보는 이가 거의 없는 물건이 그 열기 속으로 함께 흘러 들어갔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겠다.
‘귀찮긴 하지만,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어차피 중국이나, 미국이나 한 번은 꼭 갔어야 할 곳.
미국에 그와 함께 돌아온 의형제가 가 있고, 아들 같은 수하가 열과 성을 다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격려의 차원에서라도, 그런 이유랄 것도 없이 그냥 보고 싶어서라도 언제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연화존자는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전에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가깝고도 거대한 나라에 먼저 들러야 할 터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른 준비는 다 됐습니까?”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연화존자가 당군명에게 묻는다. 결심이 섰고 목표가 분명하니, 이제 수단을 꾀할 때.
그리고 수반되는 여러 사실을 아예 암기해 온 당군명은 그로써 자신이 늙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중국에서 쓰실 신분을 준비해 놨습니다. 아예 정부 관계자를 매수해 만든 신분증이니만큼 걸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에 중국 내부에서 본 그룹의 믿을 수 있는 협조자들이 차린 회사가 있습니다.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준 이들이지요.”
“혹 발각되면 그들은 어떡합니까?”
“그럴 경우를 대비한 탈출 루트를 준비해 놨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목숨만은 건져서 유럽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조치를 다 취해 놨습니다. 연화존자께서 입국하실 바로 그 루트이기도 하지요. 우선 동남아를 경유한 뒤 육로로 이동,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국경을 통과하시는 방향으로 경로를 잡아 놨습니다.”
당가그룹은 꼼꼼하게 준비했다. 무공과 성세를 되찾아 준 연화존자의 은혜를 갚기 위해 단 하나도 허투루 처리하지 않고 집착하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응한 것으로 보일 정도.
그렇지만 그런 당가그룹조차 상상하지 못한 건 연화존자가 중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접선지를 옮길 수 있습니까? 저 헤엄쳐서 들어갈 거라 여기선 내륙쪽은 좀 그런데.”
“…예?”
냉혹한 기업가이자, 무림인인 독군 당군명조차 당황스러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건만, 무심한 햇살만이 두 사람의 발치에 서성이며 느리디느린 춤을 춘다.
대한민국의 천하제일인은 오직 두 손과 두 발로만 적진으로 가겠노라 선포한다.
* * *
김철민이 헤엄쳐서 들어가겠다고 한 건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해야 제 신분을 최대한 오래 속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운하신권이 말꼬리를 늘리는 모습이 실로 오랜만이라 연화존자는 웃었지만, 그 앞에 마주 앉은 국가무공원의 수장은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아들 같은 친우의 주화입마는 아니었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준비되어 있긴 했으니까.
연화존자는 흑해자를 가장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맨손으로 가겠다는 건가?”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연화존자의 태연한 말에 설득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 운하신권조차 이마를 짚는다.
“자네도, 사람 참.”
애절한 호소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연화존자를 보며 당군명이 도움을 요청해 왔건만, 오랜 친우이자 보호자 같은 존재인 운하신권조차 할 말을 고르는 게 마땅치 않다.
설득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선 언어적 문제는 없다. 중국어 정도는 이미 익혀 뒀기 때문이다.
그만한 세월을 살면서 해외에 오래 살며 하는 취미 생활이 무공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이었던 만큼 중국어는 선택이 아니라 차라리 필수였는데, 단순히 읽고 쓰는 것을 떠나 중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 묻고 답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회화 역시 완벽한 김철민이었다.
안전에 대한 문제는 더 보탤 것도 없다. 그의 진정한 신분이 밝혀지면 곤란한 것이 사실이지 않던가?
“뭘 들고 간다고 해서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더군요. 어차피 당가그룹의 협조자들이 대륙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것들은 현지 조달하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연화존자의 죽음을 바라는 공산당의 비공식적 척살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일에 아무렇지 않는 건 운하신권 같은 고수에게도 불가능한 일.
차라리 자기가 가면 모를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물론 김철민의 저 말이 마냥 근거 없는 오만 혹은 미친 소리라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어떤 신병이기, 막대한 가치를 지닌 재화를 가져가는 것보다 들키지 않는 것이 안전에 더 유리할 터였다. 또한 연화존자가 지닌 무위를 생각하면 매우 합리적인 가정으로 공산당의 의표를 찌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걸 운하신권도 알고 있었다.
누가 있어 그와 같은 밀입국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에서 헤엄쳐 중국으로 흑해자를 가장해 들어가는 방식을.
당장 연화존자를 잘 아는 이들조차 경악을 금치 못하고 이렇게 말리려 들고 있는 판국에.
다만 친밀한 사이기에 드는 인간적인 걱정일 따름이다.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긴 여정이 될 터인데.”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는, 그런.
최근 연화존자가 미친 듯이 일하며 간첩들을 잡고, 처리해야 할 것들을 처리한 건 그래서였다. 언제 돌아올지, 돌아올 수나 있을지 과연 장담할 수 있는가?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연화존자 김철민은 뜻을 세웠음을 밝힌다.
“중국 공산당의 존재가 그리 옳고, 좋고,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습니다.”
“자네, 정녕…….”
“옳지 않은 것을 두고 보는 건 지난 세월이면 충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해 연화존자의 뜻대로 계획이 수정된다.
당가그룹은 다급하게 내륙의 협조자들과 연락을 취해 접선 장소와 경로를 바꾸었다. 국가무공원은 연화존자의 부재를 가릴 명분과 상황을 조성했다. 연화존자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진행하던 사업들을 점검했다.
동시에 사람을 뽑았다. 아무리 천외천의 고수라지만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이기에 최단 경로를 갈 수 있도록 배와 사람을 준비한다.
여기에는 이를 위해 국가무공원에 협조하며 죗값을 미뤘던 자들이 포함된다.
“진짜, 진짜 가는 겁니까?”
“그럼 가짜로 가나?”
혈마제 유영은 어둠 속에서도 파리한 안색을 자랑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디데이였다. 이날을 위해 수영을 배우고, 무공을 가다듬고, 위조 신분의 신상 명세를 읽었던 그였지만 막상 넘실대는 검은 바다 너머를 상상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모양이다.
“왜? 무섭나?”
이런 상황임에도 장난기 어린 연화존자의 물음에 학습이 되어 냉큼 대답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섭다고 했다가는 그럼 죽으라고 하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다면 바다로 밀어 버릴 걸 안다.
애써 참으며 달달 떠는 혈마제를 보며, 연화존자는 씩 웃은 후 옆의 사람을 본다. 무표정한 얼굴의 천지극뢰가 참으로 대조적이게도 이를 악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도 괜찮지 않나.
위험한 길을 가는 동행들의 상반된 모습에 연화존자는 소리 죽여 웃는다. 요즘 따라 인생의 재미를 느낀다. 윤아영 같은 고집불통 검사도 그렇고, 제 목숨만 소중한 이기적인 범죄자와 극악무도하지만 불쌍하기 짝이 없는 범법자도 그렇고.
“그만 가자.”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며 궁금해진다.
앞으로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