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97화 (97/175)

#97화

“아이고… 아이고, 죽겠네.”

네 명의 남자로 구성된 일행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가로지른다.

기이한 일행이었다. 생김새부터 전혀 달라 혈연은커녕 묘하게 서로 다른 나라 사람으로 느껴지는 네 사람이 차도도 없는 곳을 걷고 있는 모습이란 그래 보인다.

그리고 도보로 이동하기 좋은 길이 아니란 건 일행 중 연신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

그 앓는 소리가 그리 듣기에도, 보기에도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거, 우는 소리 좀 그만하시오.”

결국 중년 사내의 우는 소리가 꼴 보기 싫은, 중년인의 등에 업혀 있던 젊은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고야 마는 것이니.

이에 완전 지친 꼴이 되어 한탄하던 남자, 혈마제의 눈이 순간 붉은빛을 띄지만 곧바로 날아온 손바닥의 응징에 깨갱 꼬리를 내린다.

“으악!”

“눈 착하게 안 떠?”

연화존자는 아무리 주변이 텅텅 비었다지만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함부로 내공을 끌어 올린 혈마제 유영에게 경고한다.

“내가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손은 두 개밖에 없어. 만약 너 때문에 우리 존재를 들키거나, 의심을 산다면 주저 없이 네놈을 버리고 다른 두 사람 챙겨 도망갈 거야.”

“…알겠습니다.”

“꿈에 그리던 고향에 기껏 돌아와 놓고 다시 감옥에 갇혀 무슨 꼴 당할지도 모르는 신세 되기 싫으면 처신 잘하라고.”

이에 혈마제는 턱끝까지 차오른 불만을 속으로 삭이며 분통을 터트린다.

‘염병, 꿈에 그리는 고향은 무슨. 멀쩡히 잘살고 있던 사람 억지로 성형수술까지 시켜서 끌고 와 놓고서는.’

혈마제의 멀쩡한 삶을 위해 피해 입은 자들도 저 이기적인 생각에 동의할지 모르겠다만, 솔직한 말로 혈마제는 전혀 중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고국은, 고향은 애증도 아닌 그저 증오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당 간부 친척의 가게를 좀도둑질로 털었다가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으로 수감된 이후 그의 삶은 온전한 지옥이었다.

교도소에 갇힌 채 생체 실험에 가깝게 시행되었던 무공 수련과 이후 결과를 봐야겠다며 당일 통보 후 풀어 준 뒤 알게 된 부모님의 사망은 그가 혈마제라 불리기 충분한 분노를 심어 주기도 했지 않던가?

그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눈이 돌아 무모한 살인을 이어 갈 수 있었을까? 아니다. 부모님만 살아 계셨어도 죽어도 중국에서 죽었다.

뭐, 덕분에 사파 무공의 부작용으로 모조리 죽어 버린 다른 감방 동료들과 달리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압도적인 무위를 펼칠 수 있었지만, 결국 돌이켜 보면 만시지탄.

남은 것 하나 없이 텅 비어 버린 인생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가끔은 그게 전부 억울함에 기반한 분노 덕분이 아닌가, 과거를 회상하며 떠올리던 게 전부.

‘구사일생으로 도망갔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이해 못 할 괴력을 발휘, 자신을 잡으려던 공안들을 때려죽인 뒤 국가안전부의 추적마저 피해 도망갔건만, 연화존자라는 규격 외 존재에게 붙들려 본토로 돌아오다니.

혈마제 유영은 결국 돌고 돌아 돌아온 제 처지가 유감스러워 한숨이 저절로 나왔고, 그 모습을 보던 젊은이가 이번에도 이죽거리며 한마디를 보탠다.

“이봐요, 아저씨. 무림의 고수라더니 고작 이걸 못 버티고 벌써부터 한숨입니까?”

이에 혈마제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죽여야 했다.

‘빌어먹을 놈의 애새끼. 기껏 여기까지 내 업고 왔건만, 은혜도 모르고!’

혈마제와 드잡이질을 하는 이는 당가그룹의 길잡이로 무공 하나 없는 자였다. 하여 그 때문에 이동속도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한 연화존자의 명령으로 혈마제가 여기까지 업고 온 상황.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혹시나 하는 조심스러움으로 내공을 쓰지 않고 말이다.

그런 처지인데 오는 내내 계속 저런 식이니, 혈마제가 열이 받을 만한 일이지 않겠나?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자세히 보니 젊다기보다는 차라리 앳된 소년에 가까운, 당가그룹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중국 본토 내 협력자 그룹이 보냈다는 구현이라는 이름의 길잡이는 묘하게 조소 어린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어쨌든 연화존자가 원하는 루트를 찾아내는 능력만은 확실했다. 오는 동안 그 어떤 공권력의 시선에도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13억 인구에서 나오는 저력인 걸까? 압도적으로 높은 지능과 잘생긴 외모, 거기에 더해진 배짱과 말솜씨가 과연 당가그룹에서 준비한 길잡이다운 능력이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위구르족 혈통의 어머니를 둔 처지.

그 단 하나의 사실이 이 위험 가득한 일로 구현을 몰아넣었다.

“그만하고 길 안내나 마저 잘해라. 왜 그렇게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냐?”

위구르족으로 분류되었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끌려가서인지 아니면 어린 날의 치기로 무공의 고수가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서 그런지, 구현의 태도는 묘하게 반항적이었다.

혈마제의 나름 살벌한 말에도 무공 하나 없이 뻗대는 것만 해도 그렇다.

“사전에 한족 놈의 길 안내를 해야 된단 말은 없었단 말입니다.”

혈마제 유영이 짜증이 극에 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구현 역시 현재 불만이 머리끝까지 차 있는 상황이었다.

“이따위로 길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없었고요. 어디 그뿐입니까? 대체 뭘 하러 여기 온 겁니까?”

“뭐, 임마?”

“무슨 생각인지 여태 한마디도 안 하고 있잖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본래 입안했던 계획들은 모조리 폐기한 채 변변한 준비도 없이 상해 근방을 이리 헤매는데 화가 아니 날 수 있나?

원래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온 당신들은 저희를 믿지 못합니까?”

구현의 불만에 연화존자가 반응한다.

“어째서 그렇게 묻지?”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확보한 안전한 루트를 당신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폐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현의 불만은 연화존자를 향한 것이었지만, 이 똑똑하고 복수의 열망에 차 있는 젊은이는 영악하게도 연화존자에게 직접적인 화살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중국 공산당에 당한 씻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 처지에 유일하고도 유력한 후원자, 당가그룹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야 무슨 결과가 나오겠는가? 남은 건 희망 없는 파멸뿐.

오히려 그렇기에 화가 난다. 그 독하고 두려운 당가그룹이 받들어 모신다는 연화존자라는 자가 하는 일이 어째 이해가 되지 않다 못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해서.

“동남아를 경유하여 인도로 입국, 거기서 신분을 세탁한 뒤 육로로 입국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중국을 내부에서 갉아먹을 최초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고요. 이렇게 와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있긴 합니까? 중국 공산당의 내부 감시는 극에 달해 있어 이대로는 함부로 움직일 수도, 변변히 도움받을 것도 없습니다.”

희미했던 희망이 이제는 어두워진 기분을 느끼는 와중에도 구현은 목소리를 낮춰 항의한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고.

“대체 상해까지 와서 뭘 하려는 겁니까? 왜 헤엄쳐서 온 겁니까?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공산당의 인적자원은 상상을 초월해요. 전부는 파악하지 못해도 대략적인 움직임은 능히 알아챌 거에요. 무슨 생각인 겁니까, 대체?”

그 작은 목소리를 한 절규에 연화존자는 침착하게, 하지만 여전히 뜻 모를 말을 내뱉는다.

“상해에 그렇게 부자들이 많다지?”

“네……?”

구현의 멍한 얼굴과 별개로 혈마제 그리고 떠나기 전 맹렬한 교육으로 듣기는 몰라도 입은 트이지 않아 벙어리 행세를 하기로 한 천지극뢰가 연화존자의 말에 집중한다.

그들도 궁금하던 차였다. 연화존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세계에서 부자가 많은 도시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을 부유한 도시가 상하이라고 하더군.”

그들은 대한민국 서해 바다를 건너 해안가를 따라 이동, 상하이로 향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급격한 계획 변동으로 당가그룹이 보낸 길잡이가 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중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로 이들이 향하고 있는 게 맞으리라.

하지만 연화존자가 거기에 대해 입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난 그 부자들에게 장사를 할 생각이야.”

“…장사요?”

혈마제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것과 달리, 구현의 눈빛이 무섭도록 빛난다.

이 똑똑한 젊은이는 저 몇 마디만으로도 연화존자의 뜻을 눈치챘나 보다.

“설마, 무공을 파신다는 겁니까?”

“그래.”

대화하기 참 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연화존자는 자기도 모르게 구현의 전신을 살폈다.

영민함에 비해 근골이 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번 가르쳐 봄 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연화존자 아닌가? 대한민국이 보유한 천하제일인, 천마격살자. 조금 부족한 정도는 얼마든지 채워 줄 수 있다.

“나는 이들에게 무공을 팔 거다. 그러려고 여기로 온 거야.”

“그런 거라면 굳이 기존 계획을 폐기할 이유가…….”

“시간이 없다.”

구현의 질문을 연화존자는 끊었다.

말 그대로다. 시간이 귀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여기서 천년만년 앉아서 누구를 가르치고, 세력을 키울 시간 따위 없다는 말이다.”

그는 당군명의 계획을 들으며 생각했다. 좋은 계획이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걸.

그게 단순히 연화존자와 저항 세력의 시간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다.

“그게 나만의 이야기도 아니지.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중국 공산당의 중앙집권적 행태는 날이 갈수록 강해질 거야. 천망(天网)과 황금 방패를 봐. 그 안에서 공산당의 지배에 반발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중국 공안의 역작이라는 사회 감시 시스템 천망은 연화존자로 하여금 흑해자 노릇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CCTV와 인공지능을 통한 안면 인식 기술을 통해 중국은 물리적 세계에서 인민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황금 방패라는 희대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이 더해지면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물리적 세계도 모자라 의식마저 지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넘쳐나는 자금과 일당 독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 아울러 기술의 발달은 21세기 빅브라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오로지 공산당에 대한 충성으로 이익과 불이익이 나누는 이 체계는 날이 갈수록 공고해질 것이다.

“견제할 시기를 놓친 중국 공산당의 힘이 얼마나 커져 가는지는 역사를 살펴보면 알 테지, 알겠나? 차근차근 힘을 키워 공산당을 전복시키는 건 가능성이 희박해, 나조차도 말이야.”

설령 공산당의 최고위 간부 모두가 일시에 죽는다 해도 시스템은 남을 터.

견고하게 짜인 프로그램 같은 사회 체계는 외부의 충격에 격렬하게 저항하리라.

“그러니 적들의 힘을 흩어 버리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는 게 최선이지 않겠나?”

연화존자는 자신이 할 일을 밝힌다.

“나는 중국이 아니라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무너뜨리러 왔다. 그러자면 싸울 수 있는 힘을 줘야겠지, 안 그런가?”

이에 구현은 묻는다.

“그래서 상해의 가진 자들에게 무공을 팔겠다는 겁니까?”

“그래. 그로써 서로 싸우게 만들 거다. 너희가 할 일은 그 사이를 파고드는 거고.”

이런 방식은 미처 생각 못했던 젊은 길잡이의 눈이 커진다.

“당가그룹에게 들었다. 다들 중국 공산당에 복수를 맹세한 자들이라고 하더군, 맞나?”

“맞습니다.”

“좋아.”

연화존자가 구현의 앞으로 다가온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버티고 버틴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단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너희의 복수를 대신해 주지 않을 거다. 너희를 위해 희생하지도 않을 거야, 복수는 오직 당사자의 것이니까.”

그렇지만 마지막 말에 실린 범접할 수 없는 기세에 결국 버텨 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구현은 투덜거리는 혈마제의 등에 다시 업힐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너희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 주마. 열심히 날뛰어 보도록.”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문 하나가 상하이 권력자와 부유층 사이에 떠돌기 시작한다.

도망쳤던 살인마가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의 무공을 훔쳐 돌아왔다는 믿기 힘든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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