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대한민국에서 온 정체불명의 일행에 대한 소문은 조용히,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일종의 센세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열 명으로 제한된,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만 열리는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온갖 연줄과 비용을 대겠다는 자들이 넘쳐났을 정도니까.
이들의 정체에 대한 의심 역시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하이 사람들이 다들 눈 뜬 장님도 아니고 덮어놓고 믿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당장 구성원부터가 말이다.
우선 혈마제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자는 공안 수십 명을 살해하고 오랫동안 도피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아무리 중동의 왕족들과 미국이 보증한다는 국가무공원의 무공을 들고 왔다지만 살인 전적이 있는 놈을 덮어놓고 믿는다고? 멍청하다 못해 뇌가 순수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지.
한국에서 왔다는, 마찬가지로 시대에 뒤떨어져 우습기 그지없는 천지극뢰라는 별호 따위로 불리는 놈 역시 그랬다. 제 부모를 죽인 살인자 아닌가? 신뢰라는 게 뭔지는 아나?
당가그룹과 연결되었다는 젊은 놈의 번지르르한 면상은 또 어떤가? 자고로 외관이 미끈하고 주둥이가 산 것들일수록 믿을 만한 놈이 없다는 건 진리 중의 진리.
사기꾼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평소에도 워낙 엄청난 규모의 말도 안 되는 사기가 벌어지곤 하는 중국이었다. 권력자들이 평생은커녕 가족 전체가 써도 다 못 쓸 금괴를 방에다 쌓아 놓고, 현지처 수십을 거느리는 일이 왕왕 일어나는 국가.
그런 나라에서 무공을 사기의 대상으로 삼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닌 바.
그럼에도 상하이에서 방귀 좀 뀐다는 권력자, 부자들이 들썩일 수밖에 없는 건 개중 가장 알려진 바 없고, 꾸준하고도 끈질긴 조사에도 도통 정체를 보이지 않는 장 노인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는 고수였다. 국공내전과 일당 독재를 겪으며 중원이 잃어버려야 했던 진짜배기 고수.
수십 년간 중국 대륙에서 자취를 감춘 정종의 내공심법을 지닌 절정의 고수가 나타났으니, 어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그런 장 노인이 있기에 이 미심쩍기 짝이 없는 모임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앞선 세 사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사기꾼 같은 이 조합이 주최하는 소수 모임이 이어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참석한 자 중 한 명은 무조건 장 노인의 진기도인을 받는다는 건 가장 큰 메리트.
그 사실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다. 이제 진기도인만 받으면 건강마저 가질 수 있어!’
장 노인이 어디서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여전히 몰랐지만, 그 순수하면서도 그윽한 향 가득한 내력의 도인이 보이는 결과만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내공을 익힌 자들이 어떤 식으로 회춘을 맞이하는지, 지나가려는 세월에 저항하는지 수많은 사람이 목격했다.
주름졌던 피부가 팽팽해진다. 침침했던 눈이 밝아진다.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약해졌던 팔다리가 튼튼해진다.
바로 옆의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걸 보고 그 누가 환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이 뒤집히지.
‘알맞은 금액을 지불하면 여러분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자들에게도 당연하지만 내공심법이 제공되긴 했다. 참석비만 해도 수십 억인 판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장 노인의 진기도인은 금액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운이 좋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나머지 인원들에 대한 진기도인은 혈마제와 천지극뢰가 맡았다.
이 차별적 조치에 항의하는 자들에게 세일즈맨 역할을 맡은 길잡이, 구현은 되레 뻔뻔하게 되물었을 뿐.
‘그래서 안 받으시려고요?’
별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여기서 갑은 평소와 달리 그들이 아니었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다시 한번 모임에 참여하여 운이 좋기를 기대하는 것뿐.
만약 그럼에도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불만은 자연스레 터질 수밖에.
“이 개같은 새끼들!”
그중 무려 세 번이나 모임에 들어왔음에도 장 노인의 진기도인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수천억 매출 기업체의 회장이자, 중국 인민해방군 고위 장교들과 긴밀한 연줄이 있는 자였다.
다른 곳에 가서 이런 식의 취급을 받을 리 없는, 받아 본 적 없는 권력자.
“건방진 새끼들! 내가 여기 오겠다고 얼마를 썼는데, 그딴 범죄자 새끼들이나 매번 내게 손이나 대고!”
혈마제와 천지극뢰의 실력은 장 노인에 미치지 못했다.
명백한 사실로 반대쪽에 거는 사람만 있다면 내기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같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 중 장 노인에 의해 내공에 입문한 자들의 축기 속도가 훨씬 빨랐다는 게 육안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질 게 뻔한 쪽에 돈을 거는 자가 없긴 하겠지만.
두 범죄자가 진기도인한 내공심법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교 불가란 이럴 때 쓰는 말.
장 노인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평생 내력 한 줌 익힌 적 없는 자의 등에 장심을 댄 채 땀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빠르고 수월하게 진기도인에 성공하는 것도 모자라 중간중간 입을 열어 상태를 확인하기까지 하던 건 신기에 가까운 내외공의 조화를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
국가무공원의 무공을 만든 게 연화존자가 아니라 장 노인이라는 주장의 진실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길거리 뜨내기 내공 사용자는 절대 아닐 거라 짐작하게 하는 광경을 세 번이나 보고 온 참이니, 속이 쓰리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기분인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건방진 새끼들… 너희 놈들이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라고 방법이 없을 줄 알아? 어?”
분노로 눈이 돌아간 그가 품 안의 핸드폰을 꺼내 약속을 잡는다. 정보 누설의 위험 때문에 그간 핸드폰으로 장 노인과 그들 일행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던 그였지만, 결심을 한 이상 그런 건 하등 소용없다.
어차피 이제 다 밝혀질 일 아닌가?
“내 발밑에서 개처럼 빌게 해 주마, 개자식들.”
건방을 떨어도 사람을 보고 떨어야지.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치던 놈들을 붙잡아 무릎 꿇릴 생각에 기분 좋아 흥분마저 들 정도.
그렇게 잡은 또 다른 은밀한 모임이 있게 된 지 몇 시간 후, 중국 인민해방군 동부전구에 긴급 출동이 걸렸다.
* * *
“…당신, 사람은 맞습니까?”
“왜? 아닌 것 같나?”
기진맥진한 얼굴의 혈마제가 질린 듯한 얼굴로 장 노인, 아니 연화존자 김철민에게 묻는다.
탄력을 잃었던 피부와 줄어들었던 몸이 탱탱해지고 부푸는 걸 보며 탄식처럼 나오는 질문이었다.
그도 무공을 꽤나 익혔지만 젊음과 노년을 오고 가는 그 신기에 가까운 수법은 봐도봐도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아 차라리 공포스럽다.
“죽을병 걸린 사람도 살리는데 내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할까? 이건 다 고작해야 피륙의 일일 뿐이다.”
“그래서 쉬운 일이라는 겁니까?”
“겉모습을 조절하는 거야 할 만하지.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을걸?”
현존하는 무림인 중 무학이라는 산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아마 고금을 통틀어서도 손꼽힐 만큼 높이 올라온 게 틀림없는 연화존자의 말에, 혈마제는 기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게 전부.
원하지도 않게 얻은 무공이란 힘에 취해 살아온 그에게는 생경한 감정이다.
“그런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 혈마제는 물론이고 천지극뢰와 구현 역시 놀라고 있는 건 마찬가지.
자유자재로 외모를 바꾸는 걸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놀라운 고수라지만 이거는 뭔가 상식이 파괴되는 기분이었고, 가슴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천지극뢰는 연화존자의 무공에 대항할 생각이 사라지고, 길잡이 구현은 자신의 오만방자함이 후회로 다가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모든 것이 연화존자에게는 다만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다.
“덕분에 거짓말 안 하고 다 속여 넘길 수 있었지 않나? 돈도 꽤 짭짤하게 벌었고 말이야.”
반로환동 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히죽 웃는 그의 말처럼 여태 거짓은 하나도 없다.
적어도 연화존자에게만은 그랬다. 혈마제의 경우 상하이로 온 이후 입에서 나온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지만, 적어도 장 노인이라는 소개 말고는 김철민이 거짓을 입에 담은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무림의 고수가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이자 유희였다
“근데 넌 국가무공원 욕할 때마다 신나 보인다?”
“거, 묻지 마십시오.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두려운 감정과 별개로 그사이 제법 친분이라도 생긴 건지 농담 비슷한 것도 오고 가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믿을 수 있는 거라곤 여기 있는 넷과 매우 은밀하게 돕는 소수의 조력자인 덕분에.
위험 속에서 유대감은 생기는 법이었다. 곧 있을 거라 기대하는 일에서 그렇듯이.
“그나저나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
장 노인으로 분한 연화존자가 열에 하나를 진기도인함에 있어 기준으로 삼은 건 오직 하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외되는 자들의 기준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 혹은 공안과 조금이라도 꽌시가 있는 자에게는 연화존자의 손길은 닿는 법이 없었다.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무모해지고, 참을성이 사라지고, 후회할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해.
당가그룹의 협력자들이 신중하게 선정한 모임의 대상자들은 이 귀한 기회를 독점하기 위해서라도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보안을 유지했지만, 소외되는 자들까지 그럴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부와 권력은 한 몸이었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쓰고 싶은 법.
“그러잖아도 연락이 왔습니다. 상하이 주둔 인민해방군 중 일부가 출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각계각층에 촉수를 뻗은 당가그룹의 협력자들은 바뀐 계획 속에서도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준비를 했다지만 이렇게 실시간으로 군대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었을 터.
여기엔 연화존자의 결단이 한몫하기도 했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군. 바람직한 현상이야.”
연화존자가 신비의 고수 행세를 하며 갈퀴로 쓸어 담은, 상하이 부자들이 건넨 막대한 자금은 협력자들의 요긴한 활동 자금이 되었다.
이게 단순히 연화존자가 돈 욕심이 없어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
“덕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군, 안 그래?”
어차피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면 함부로 쓸 수 없는 돈들이었다. 조만간 벌어질 일 이후에 자금 추적이 들어오면 묶여 버릴 게 뻔한데, 그럴 거면 빨리빨리 세탁해서 필요한 곳에 쓰는 게 나은 일.
“그런데… 진짜로 하실 겁니까?”
이번에도 질문은 혈마제의 몫.
연화존자가 우는지, 떠는지 모르는 그를 빤히 바라본다.
“겁나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옆을 보니 구현의 얼굴도 비슷하지만, 이쪽은 이해할 수 있다. 무공을 모르면 저런 반응일 수 있지.
천지극뢰는 평온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중국으로 오기 전에 연화존자에게 한 말이 있다.
국가무공원에 합류하여 무공을 다시 가다듬고 떠날 준비를 하니, 이제야 좀 제대로 사는 기분이라고.
그렇다면 물을 필요 없겠지.
“겁나도 된다. 우리는 딸랑 넷, 아니 싸울 줄 모르는 한 명을 빼면 셋이니까 그럴 법하지.”
하여 이 말은 혈마제 유영에게 하는 말.
“그런데 또 도망치면 답이 있나, 너?”
아프게 찔러 온다.
“네 인생을 망친 게 중국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시오?”
혈마제는 별호와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변명했다.
“나는 연화존자, 당신처럼 강하지도, 놀랍지도 않소. 무공의 재주가 있다고는 하지만, 젠장. 그게 뭐 어쨌단 거요? 당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오.”
그리고 연화존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의지를 세울 수 있겠지.”
어느새 본모습을 되찾은 그의 눈에 예의 무지개가 맺혀 있고 그는 선언한다.
“네가 뜻을 세우면 사람은 자연히 모인다. 날 봐라. 대한민국은 나와 내 동료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던가? 흥. 없애지 못해 안달이지 않았나?”
털고 일어나며 따라오라 말한다.
“네 녀석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에 하고 싶다던 복수가 어떻게 될지 보여 주마,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