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들 또한 연화존자가 궁금했었다.
연화존자라는 인물이 상하이 사태의 배후에 있을 거라 강력하게 의심하던 그때부터, 실은 대한민국에 태풍처럼 출현한 국가무공원이라는 조직이 몰아치며 이루어 내던 대한민국의 변화를 목격하던 예전부터, 연화존자에 대한 궁금증은 존재했다.
무림인이라면 아니 그럴 수도 없게 애가 탔다.
이해한다. 연화존자가 해 온 일들을 떠올려 보라.
어느 곳에나 있던 부패한 쓰레기들을 처리한 건 차치하더라도 대단하지 않은가? 현존하는 무림인 중 세계적으로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없을 정도.
당장 미국을 움직이며 빚을 지운 것만 봐도 그렇다.
새로이 당선된 미 대통령의 곤란을 경시하며 비웃던 젊은 왕세자를 설득해 체면을 세워 준 것부터 미국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 및 인력 파견을 생각하면,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마약 퇴치라니. 여태 세계 그 어떤 정부도, 권력도 성공한 적 없는 일에 대담하게 그 나서는 모습이란.
진기요상을 통한 마약중독 치료야 알음알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긴 했다. 하나 그것이 가능한 수준의 내공 사용자는 비싼 몸값을 자랑했고 그 정도 무공으로는 다른 일을 하는 게 개인의 삶에 훨씬 효용이 컸던 바.
그걸 미국 본토에 의료재단을 세워 가면서까지 해내겠다고 공포하며 실행하고자 하니, 그 과감한 발상에 탄식하며 감탄하던 이가 한둘이 아니었던 바.
최후의 기사 알렉산드루에게 잃어버린 봄을 되찾아 준 건 연화존자의 명성을 하늘 끝까지 솟게 한 화룡점정이었다.
중원의 정기가 살아 있던 시절, 무수히 많은 명문거파의 도인들이 도전했음에도 실제로 이룬 이를 찾지 못했던 전설적인 현상이 연화존자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으니, 존경은 저절로 솟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으로 그게 가능한 것인지.
그러니 당대에 무공을, 내공을 익힌 이에게 있어 연화존자와 겨루어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확인보다는 차라리 영광스러운 일.
대만 정파 연합의 손꼽히는 고수인 검제에게조차도 그랬다.
“…잘 보거라.”
“네, 조부님.”
청명검 남궁현이 참관인이 된 가운데 검제와 연화존자가 마주 선다. 당부의 말을 남기는 검제의 얼굴은 그의 무림에서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긴장됐다.
검제 남궁명은 연화존자가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임을 인정했던 것이니, 주책 없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중.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결국 무림인은 무공으로 말하는 법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국가무공원에서, 중원 본토에서 이룬 일을 보면 인정해야만 했다. 연화존자가 거대한 존재라는걸.
남궁명은 자신이 작은 사람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건 한 사람이라기엔 너무도 큰 시대의 현상이라는 것을.
“가볍게 실력만 보자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그렇긴 힘들지?”
함께 일하기에 앞서 실력을 보자는 것에 연화존자는 여유로운 편이지만, 속내마저 그렇진 않아 한편으론 서두른다.
장 노인과 연화존자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누가 목격하는 걸 걱정하진 않는다. 절대고수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하는 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조력자가 늘기도 했다. 상하이 사태 이후 은밀하게 입국한 당가그룹 본사 인원들이 이미 여럿. 혼자서 동분서주하는 단계는 어느 정도 지났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노출의 위험을 감수하고 당가그룹을 통해 대만 정파 연합으로 연락을 넣은 것도 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지금이야 중국 공산당이 내부투쟁으로 시끄럽고, 책임 소재를 논하며 서로를 공격하는 정치적 행위로 대응이 지연되어 혼란하다지만 또 모른다.
아무리 말이 많고, 사건 사고가 많아도 옳고 그름을 떠나 국력이라는 면만 보자면, 중국은 저력이 있는 국가였다.
미국이 작정하고 견제를 나설 만한 잠재력이 있는.
“언제 또 기회가 있을까?”
“그건 그래. 한번 해 보자고.”
아무것도 못할 거라 기대하는 건 순진한 상상이다.
급변의 가능성은 여럿이지 않겠나? 외부의 적을 일단 치워 놓고 협상을 하자고 나설 수도 있었고, 극적인 지도력으로 모든 갈등이 봉합될 수도 있었으며, 상하이의 방심이 어이없는 패배와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
고로 연화존자의 목적이자 바라는 상태, 중국이 내부 단속에 실패하여 외부로 힘과 의지를 투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 체급 차이가 오죽 나야지.
쓸 만한 칼이 여럿일수록 좋다는 말이었다. 본토로의 귀환을 열렬히 희망하는 무림의 고수,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중공의 침략을 경계하는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기꺼울 수밖에 없다는 소리.
이해관계는 충분하다.
하여 확인은 미루지 않고 이루어진다.
“와라.”
검제는 마다하지 않는다.
기합도 없이, 검을 뽑는 소리도 없이 펼쳐진 한 자루의 검 끝에서 피어나는 건 남궁세가의 대표적인 무공인 창궁무애검법.
안정된 보법으로 올곧은 검로를 따르는 모습에 연화존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바쁜 와중에도 착실했군.’
검제의 무공에는 바쁘게 살면서도 놓지 않은 수련의 시간이 올올이 얽혀 있었다.
그것은 기교에 의지하지 않는 우직함, 타고난 재능을 믿기보다는 검날 위에 쌓인 세월을 신뢰하는 정직함이 얹혀 있다.
그래서 아쉬웠다.
‘재능은 부족하군. 타고난 그릇이 이 정도인 걸까? 아니면 다른 할 일이 많아 채우지 못한 것일까?’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것마저 알 수는 없는 일이라고 부지불식간에 생각한다.
검제라는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이 연화존자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착실하여 성실하지만, 재기 발랄함이 부족하여 정직하기만 한 검로를 손날로 쳐 내는 와중에 든 감상.
검제 남궁명은 검기상인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요즘 시대를 생각하면 대단하지만, 무공 수위라는 것의 효용이 예전만 못한 시대이지만, 글쎄.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물론 지금 하려는 일에 검제, 개인의 무공은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가 대만 정파 연합에 부탁하고자 하는 건 일종의 후방교란이어서 쓸 만한 무인들을 침투시켜 혼란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거였으니, 검제가 어떤 무인이냐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비감은 가시지 않는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무림의 정기가 쇠하다 못해 부스러진 시대를 사는 천하제일의 고수에게 이 감정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비애를 어찌 틀어막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군.”
결국 검제는 스스로 검을 거둔다. 거기엔 미련이나 분노 같은 것보단 알 수 없는 후련함이 존재한다.
그는 천하제일인을 상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내 무공은 여기까지야.”
“그런가?”
그래서 미련이 없다.
제(帝)라는 말이 무색한 실력이라는 건 자신도 익히 알았다. 다만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다. 천마에게 도전했다 황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검황의 뒤를 이을 구심점이.
창궁무애검법에 이어 제왕검형마저 대성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던 그의 아버지는 천마를 죽여 명성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그건 한여름밤의 꿈처럼 스러졌다.
만약 부족한 자신일지언정 가문의 중심을 잡지 않았더라면 남궁가는 해체되었으리라. 중원을 강탈한 공산당과 사파무림이 아니라 함께 탈출한 연합의 동지들에 의해.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검제 남궁명이 집중한 건 그래서 다른 쪽이었다. 최소한의 구색과 성실함을 갖춘 상태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동시에 거기에서 얻은 것들로 남궁세가의 미래를 키울 것.
“어차피 남궁의 미래는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미련이 있을 수 없다.
“현아.”
그는 소임을 다했다.
검제로서는 몰라도 남궁세가의 가주로서는 그랬다.
“연화존자께 가르침을 청하거라.”
연화존자가 이 일에 개입되었다고 확신한 남궁세가는 세가의 미래를 가주와 함께 보냈다. 그건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붙잡은 담대한 결정.
“볼초 현이 삼가 아룁니다.”
강력한 고수임이 확실시되는 남자에게 남궁현은 극심한 존중을 보인다.
“작금의 정세가 어지러운 가운데 남아의 뜻을 세우고자 하나 현인은 멀리 있고, 자질이 부족하여 수많은 날을 울분으로 보냈나이다. 그러던 중 하늘이 보우하사 무림의 고인이자, 천하의 영웅이신 연화존자를 만나게 뵈니, 감히 머리를 풀고 무릎을 꿇어 가르침을 청하는 바이나이다.”
세가의 어른들은 물론이고 남궁현 본인마저도 이것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절대고수, 그것도 무공을 아끼고 아껴 일신에 지니고만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밖으로 꺼내어 가르치고 써 가며 사람을, 세상을 바꾸는 그를 만남에 있어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공감했다.
자존심 따위 챙길 겨를조차 없다. 그런 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오직 하나,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간절함만이 청명검 남궁현의 가슴속에는 가득했다.
이 판단은 옳았다.
“재밌군.”
그 절실함이 연화존자의 관심을 끌었다.
“일어나라.”
남궁현의 간절함 밑에 깔려 있는 자신감을 그는 보았다.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보아라. 하고 싶은 걸 다.”
남궁의 후계자는 거절하지 않는다.
조부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고요함이 서늘하다.
알 수 있었다. 내공의 양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세월을 이길 수 없을 테지만 돋아나는 예기, 검기의 조절과 섬세함이란 손자의 것이 조부의 것을 능가한다는걸.
남궁현의 검은 부드럽게 누르며 들어왔다. 그건 남궁세가에서 추구하던 절대자의 모습의 초현. 연화존자는 아직 많은 면에서 미숙함에도 오의를 꿰뚫은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이게 바로 그와 같은 고수가 원하는 모습이었다. 높지는 않을지언정 본질에 다가간, 오직 재능과 통찰과 우연이 겹쳐야만 가능한 천재의 영역.
수련만으로 깨우칠 수 없는 말 그대로 깨달음, 그 자체.
그렇다고 감탄만 하기엔 장난기가 돋는다. 조금 골려 주기로 한다.
“하하하.”
웃음과 함께 내력을 끌어 올린다. 예의 무지개, 연화신공의 오색내공이 남궁현의 주변을 감싼 폭풍이 되어 격렬하게 떨린다.
타오르는 강기가 금방이라도 남궁현의 전신을 꿰뚫을 것처럼 포효한다.
기대한다, 창궁무애검법의 오의를 깨달은 천재가 어떻게 대응할지.
“흐읍.”
남궁세가의 미래는 이에 부응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남궁현은 검기를 극도로 압축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제 몸을 감싼다.
그리고 버텨 내며 연화신공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마치 화재가 난 건물에서 창문을 깨고 몸을 던지는 것처럼 그리했다. 극한의 쾌검으로 풀어낸 검기의 다발이 잡아먹히는 가운데 보충되며 두 걸음. 단 두 걸음으로 위기에서 몸을 빼낸다.
이 대응은 연화존자의 마음에 들었다.
솜씨와 용기를 모두 갖춘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연화존자 쪽에서 강기의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절하긴 했지만, 그렇다 쳐도 그 속으로 검기를 뽑아낸 뒤 달리는 건 다른 문제.
심지어 다시금 달려들지 않나?
‘검을 놓고 온 게 조금, 아주 조금 아쉽군.’
남궁현의 검을 두 주먹으로 맞서며 이런 생각을 한다.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만.”
연화존자가 손을 튕겨 남궁현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본인의 의사와 별 상관 없이 그리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매일 밤 11시에 이곳으로 와라.”
“…그 말씀은?”
“하루에 두 시간씩 네 무공을 봐주마.”
연화존자가 중원에서 와서 얻은 첫 제자였지만, 어쨌든 당금 무림에 곧바로 알려질 사실은 아니었던 바.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상하이 사태가 다른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주일 후, 현 총서기를 지지하던 당의 고위 공직자 중 네 명이 암살당했다.
중국 당국은 이것을 대만 정파 연합의 범죄로 추정한다는 잠재적 조사 결과와 함께 타이완 정부에 대한 비난 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대만해협으로 함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