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제갈유영은 오랜만에 여행 속에서 마주한 이국적인 풍경이 기뻤다.
바람조차 낯설어 무거운 일들로 답답했던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고 자란 도시와는 냄새조차 달라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안이 중원 출신이기 때문인 걸까? 그래서 이 땅의 모든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하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본래 제갈세가가 있던 곳은 이쪽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기분이, 마음이 중요한 거지.
제갈유영은 남편을 돌아보며 한껏 미소 지었다.
“여보, 저 하늘 좀 봐요.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평소에도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하늘과 이토록 가까운 땅에서 짓는 웃음이란 비즈니스적 상황 속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제법 순수하기까지 하다.
그러한 아름다운 동양인 아내의 호들갑에 존경받는 사업가, 마르코 씨는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맞장구를 친다.
마음에서 우러난 대꾸였다.
“맞네. 너무 아름다워. 당신이 말하기 전까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정말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야.”
“그렇죠?”
“그래.”
마르코 씨는 아이를 넷이나 낳고도 젊음과 미모를 잃지 않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의 허리를 감싸며 진한 볼 키스를 남긴다.
이 정열적인 이탈리아 사업가는 결혼식 날 했던 부부의 맹세를 여전히 지키고 있으며, 어길 생각이 전혀 없다.
살면서, 사업을 하면서 유혹이 없었다면 그건 솔직하지 못한 일일 테지만, 어쨌든 주님께 맹세코 그는 부정을 저지른 적이 결혼 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사랑은 오직 그의 아이를 낳고,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사랑스러운 아내에게로만 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바.
마찬가지로 제갈유영 역시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남편에 대한 헌신과 애정을 놓은 적이 없다. 남편의 아이를 낳고, 잘 키우고, 훌륭히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 중이다.
부부의 첫 만남과 얽힌 인연이 그리 우호적이라 할 수 없었음에도 두 사람의 결합은 본인들뿐 아니라 주변 모두에게 축복이었다. 사랑스러운 가족, 오직 애정과 배려만이 가득하여 믿음과 신뢰로 이어진 관계.
그리고 이번 여정은 서로 간의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해 온 부부에게 있어 휴식의 기회가 되어 주고 있었다.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독특한 문화와 풍경은 이탈리아에서 온 두 사람에게 신선함을 주었던 것이니, 그야말로 오랜만의 재충전.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밝은 한낮의 일정이었던 것이니, 여기에는 현지 조력자의 도움이 존재한다.
“두 분의 금슬이 이리 좋은 걸 보니, 제 마음이 다 흐뭇합니다. 하하하.”
풍채 좋은 한족 남자가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의 애정 행각을 보며 한껏 웃음 짓는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만 보면 세상 이런 호인이 없어 보이는 모습.
그만큼 신장 생산 건설 병단의 고위직인 남자, 왕이청이 두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럴 수밖에. 마르코 씨는 지금 이탈리아의 다국적 기업의 대표로서 이 지역에 대한 투자를 결정 짓기 위해 현장 답사를 온 것이었고 그의 결정에 따라 잘 진행되어 가던 사업 투자 계획이 그대로 진행될 수도, 완전히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열성적인 접대자가 따라붙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다 왕이청 씨의 봉사 정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감사드리겠습니다. 편의를 봐주신 덕분에 아내도, 저도 기쁘군요.”
중국의 유일하게 남은 생산 건설 병단이자, 동원 가능한 인원이 300만에 이르는 거대 준군사 조직에게도 외부의 투자는 제법 소중한 것이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조금 엄하게 일을 진행한 걸로 온갖 난리를 치는 중인 다른 나라의 제제에, 아랑곳 않는 이들의 투자를 놓칠 수야 없는 거 아니겠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마르코 씨는 우리 신장 건설 병단의 친구이자, 제 친구나 다름없는 분입니다. 어찌 이런 걸 수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봉쇄되다시피 한 티베트 자치구와 달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외국인 입국 자체는 열려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건 들어갈 수 있는 곳에 한정된 이야기고. 막상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민감한 상황에 의해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여럿 있었는데, 지금 마르코 일행이 머무르는 곳 또한 개중 하나.
하지만 금지 구역의 출입쯤이야, 신장 건설 병단이 접대 중인 유망한 사업가와 그 와이프가 간다는데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은 어지간한 일로 눈도 깜짝하지 않을 인물들 아닌가? 모르고 온 것도 아닌데, 좀 돌아다닌다고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라고 신장 건설 병단은 판단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마르코가 기분이 상하는 게 더 위험할 거라고 말이다.
“신장 건설 병단의 호의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감사할 일이죠. 하하하!”
그렇게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은 경호원 여럿을 데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제집 누비듯 돌아다니며 즐겼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휴가라도 온 것처럼 편히 지냈다.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잠깐이면 족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 결과를 정해 놓고 온 길이었다.
이 거래가 양측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라는 걸 확인했기에 진행했던 게 아니던가?
머지않아 신장 위구르에서 강제 노동을 통해 생산된 면화는 이탈리아로 수출될 것이다. 신장 건설 병단과 이탈리아 마피아들 사이의 계약은 그렇게 사인이 될 예정이었고, 지체 없이 이루어질 예정이기도 했다.
물량은 충분했고, 가격은 시장 파괴적이다. 성사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미국 및 세계 여러 나라의 제재를 우회할 수 있다는 점 말고도 고급 원단의 성지라는 이탈리아에서 신장 면화를 가지고 생산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프리미엄이 충분히 붙을 일이었으니, 신장 건설 병단의 간부들은 기쁜 마음으로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에 대한 접대를 아끼지 않았다.
후일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코사 노스트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패밀리의 일원인 마르코 씨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두렵다는 제갈패밀리의 직계인 제갈유영과 척을 져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나?
신변의 위협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양측 모두 협력했다.
검은 속내는 오직 한쪽에만 있는 일.
“긴장하지 마렴.”
왕이청을 비롯한 신장 건설 병단 사람들이 돌아간 밤의 숙소.
제갈유영은 미소 지으며 안심시키는 말을 하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무릎 꿇고 앉은 젊은 여자는 덜덜 떠는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다.
가증스러운 한족 압제자들에게 끌려와 방 안을 채운 거구의 사내들, 그것도 노란 머리의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까.”
한족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는 연신 괜찮다고 하지만, 그 말이 더욱 무서웠다. 시꺼먼 사내들이 가득한 곳에서 안심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이곳에서의 삶이 그런 안심을 할 수 있는 곳이던가?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의 삶은 가혹한 것이었다. 특히나 이곳처럼 가혹한 탄압,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무도 막지 못하는 어둠만이 가득한 땅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막말로 자신이 여기서 세상 끔찍한 모든 일을 다 당해도 내일은 올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거고,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받아 줄 사람도 없고,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오직 슬픔과 분노, 체념만이 남을 테지.
그렇지만 제갈유영은 진심이었다.
“네 오빠가 위구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알고 있어, 맞니?”
이 질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위구르 여인은 몸을 움찔했고, 이는 대답이나 다름없던 바.
“알아 보니 너뿐만 아니라 너의 친인척들이 고초를 많이 겪었더구나. 가여운 것.”
다가가 안아 준다. 이 뜻밖의 온기에 어안이 벙벙한 그때, 호박빛 술을 투명한 유리컵에 담아 홀짝이던 노란 머리 남자, 마르코 씨가 입을 연다.
“신장 건설 병단은 위구르 독립운동가 소탕에 너의 가치가 미비하다고 여기고 있더군. 괜히 건드렸다가 폭력 사태가 일어날까 봐 사태를 예의 주시하자며 결론을 유보하면서 말이야.”
“잠적한 너의 오빠나 다른 친척들이 연락을 취해 오면 꼬리를 잡겠다는 생각인 것 같던데… 여태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 그치?”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이 번갈아 던지는 질문에 어찌 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부부는 제 할 말을 한다.
그야말로 일심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면 너의 효용 가치는 처벌을 통한 본보기 정도로만 남게 될 거야.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널 수용소로 끌고 갔을 테지.”
“그래서 우리가 널 고용하고 싶다고 했단다. 핑계는 이랬어. 어찌 되었든 우리 측 인원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파견을 해야 하는데, 독립파의 친인척들을 고용하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지 않겠냐고, 어찌 되었건 외부인인 우리는 줄을 탈 수밖에 없어야 하는 거라고 말했지.”
이러한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의 제안에 신장 건설 병단은 불쾌해했지만, 수용했다.
일단은 그랬다. 코사 노스트라와 제갈패밀리가 합작하는 사업의 성사 여부가 중요했기에, 일단은 거부하지 않았다. 정작 파견 인원들이 도착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댈 생각이 그들에겐 가득했기에 우선 수락했다.
“요청을 받아들이기야 했지만, 중국 놈들이 약속 지키는 거 봤어? 아마 정작 일이 진행되면 어떻게든 거부하려 들 거야.”
“그러면 왜……?”
하지만 딴생각 하고 있는 게 꼭 중국 공산당의 주구만은 아니었다.
“우리도 시간 길게 끌 생각이 없거든.”
제갈유영의 웃음, 그녀와 악의적인 비즈니스로 엮인 이들을 공포로 떨게 만드는 살벌한 웃음에, 독립운동가를 오빠로 둔 위구르 여인 또한 몸을 떨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신이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이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는 사실만은.
“우리는 위구르와 티베트의 독립을 바란다. 그러기 위해 현지 세력과의 연계를 원해.”
“윗대가리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서 이 지역의 독립, 이후 이어질 중국 인민해방군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기엔 명분도, 숫자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외국인인 우리가 구심점이 될 수도 없으니까.”
“티베트 쪽은 이미 어느 정도 접선이 끝났다.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 정부와 협상을 진행 중이지.”
“자금과 무기를 지원 중이며 교육 인원 역시 파견해 훈련 중이지. 같은 것을 위구르 독립 전선… 그렇게 부를 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공할 수 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위구르 여인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그게, 그게 다 무슨… 그걸 이렇게 다 털어놔도 되는 거예요?”
“오, 물론이지.”
여인의 물음에 마르코 씨와 제갈유영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돌 같은 표정으로 침묵하며 서 있는 경호원들과 대비되는 그 밝음이 어딘지 모르게 섬찟했다.
“나는 제갈패밀리란다.”
제갈유영은 진법과 술법의 대가라 불리는 집안의 여식이라고 했다.
“우리의 은인께서 복원해 주신 무공을 통해 제갈패밀리는 가문의 옛 기예를 복원할 수 있었단다. 개중에는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 같은 것에 힘입은 재밌는 것들이 여럿 있지. 가령 기억을 건드리는, 뭐 그런 것들 말이야.”
필시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신장 건설 병단에서 온갖 질문을 던지며 진실 여부를 검증할 것이다. 그런 술책에 대비하기 위해 제갈패밀리 내에서도 이러한 수법에 가장 능숙한 제갈유영이 직접 와야만 했다.
불만은 없다.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대모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그녀 역시 제갈패밀리의 일원.
이 모든 것이 어느 분께서 원하는 일이던가?
“이 자리에서 나가면 너는 기억을 모두 잃게 될 거야. 그리고 7주가량이 지나면 기억의 봉인이 풀릴 거고, 만나야 될 사람과 해야 할 일을 하게 될 거란다.”
연화존자가 원하는 일이었다.
감히 귀찮다고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
“우리는 기다릴 거야. 그것만 알고 있으렴.”
제갈유연의 손가락이 여인의 이마를 짚었다.
연화존자의 안배가 어둠 속에 씨앗을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