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최익현과 그의 부하 직원들이 감옥에 갇힌 건 아니었다.
믿긴 힘든 외교적 참사가 일어났음에도 언론에 노출조차 일어나지 않았고, 검경에서도 이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되도록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다는 일본 측의 요청 덕분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국가무공원은 꽤나 큰 곤란을 겪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칠고 강한 무림인들과 충돌한 것치고는 육체적으로 일반인에 불과한 주한 일본 대사가 입은 상처란 뜻밖에도 타박상에 불과했던 덕도 있겠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으니 다행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일국의 외교관을 폭행한 걸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쪽에서 일부러 도발했습니다.”
“들어 보니 그런 것 같더군요.”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일본 측의 의도가 존재한다고 사건의 당사자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은 여기고 있다.
그만큼 일본은 언제나 국가무공원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설립 이후 쭉 그랬고, 이 관심을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랫동안 심어 놓은 대한민국 정부 내 인적자원에만 의존하는 주목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 수집은 미국 쪽을 통해 활발했으니,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의 행보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고조되어 왔다.
최후의 기사, 알렉산드루 칸타쿠치노의 약진은 일본의 여러 사람과 집단, 특히 잃어버린 사무라이 검법을 복원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를 통해 얻을 것이 많은 이들을 자극했으니.
주로 정치인과 관료들에게서 일어난 관심이었다. 사무라이 검법의 획득은 평화 헌법의 개헌과 함께 일본 우익 세력의 정상 국가화의 주된 목표 중 하나였기에.
저변에 깔린 생각은 이렇다.
‘연화존자는 유럽기사단의 오러연공법에 문외한이었음에도 최후의 기사를 반로환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중원의 것과 다르긴 해도 오러연공법에 비하면 유사함이 훨씬 큰 사무라이 검법을 복원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나?’
이들은 연화존자가 자신들이 원하는 걸 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협상이란 걸 하고 싶어 했다.
연화존자가 관심조차 없어서 그렇지. 다른 할 일이 많았던 그는 딱히 이쁠 것도 없는 역사의 이웃나라가 원하는 걸 주느라 중요한 일들을 뒤로 미루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여 일본 측에선 국가무공원을 움직이고, 압박하여 회유하려 했다. 지난날 다른 정부 조직과의 알력 다툼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지.
결국 대외적으로 연화존자 김철민이 칩거했다는 소식이 다시금 알려지며 인내심의 끈이 끊긴 것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미 사무라이 검법의 원본을 획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아니군요?”
“저도 처음엔 그런 걱정을 했었습니다만, 아니더군요.”
무심결에 대답한 윤아영이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데 정보가 새면 솔직히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검사님을 믿습니다.”
윤아영은 왜 그런 중요하고도 민감한 비밀을 자신에게까지 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연화존자를 쳐다봤지만, 이 상황의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대는 절대고수의 얼굴엔 한 줌의 당황스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뭐라고 하기에도 뭐 한 처지라 그냥 넘어간다. 어쨌든 주한 일본 대사가 자신을 찾아왔고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엔 그녀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
“…상당히 무례하더군요, 그 인간.”
연락도 없이 윤아영을 찾아온 주한 일본 대사는 폭언에 가까운 막말을 퍼붓는 걸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약속도 잡지 않고 막무가내로 찾아온 것으로, 전문 외교관으로 오랜 경력을 쌓은 전문가의 행태로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아니, 어쩌면 전문가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고 지금에 와서는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사람 속을 확실하게 긁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태도는 마치 윤아영과 국가무공원이 한일 양국의 우호를 저해하기 위해 작정이라도 했다는 투로, 찾아와서 쏟아 놓는 말들이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국과 일본은 오랜 시간 이웃 국가로서 우의를 다져왔다. 환태평양 국가들 간의 결속이 갖는 중요도가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시기, 함께 건설적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협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하여 국가무공원은 대사관의 요청에도 별다른 대답 없이 무시하며 반응하지 않아 양국의 협력을 파토 내기 일쑤인가?’
‘대저 현대의 세계정세란 어느 한 나라 홀로는 살 수 없는 법이란 건 상식에 가까운 일인데, 어째서 국가무공원은 내공이라는 힘을 대한민국 사회에 보급함에 있어 이웃나라인 일본에 그 어떤 상황 설명도 없이 막무가내로 진행하는가? 이는 외교적 결례에 해당할 수도 있는 일로 명백히 우리를 무시하는 행위다.’
‘대체 평검사에 불과한 사람이 국가무공원 조직에서 이토록 큰 책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게 상식적인가? 선량한 이웃으로서 심히 걱정된다. 이래서야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이요, 주변국에서 어떻게 볼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윤아영 검사 개인은 국가무공원의 설계자라는 김철민 씨와 대체 무슨 사이인가?’
앞의 말들도 어처구니없는 트집잡기, 자격 없는 이의 헛소리이자 개소리였지만, 국가무공원 측을 특히나 분노하게 했던 노골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건 마지막 말이었다.
연화존자와의 모종의 사이여서 국가무공원으로의 영전이 가능했던 게 아니냐는 조롱 가득한 말에, 윤아영의 경호를 겸하여 배석했던 최익현은 그만 눈이 뒤집혀 버렸다.
당연한 얘기였다.
‘죽고 싶나?’
맹수처럼 으르렁대며 나선 칠익회 동유럽 지부장의 기세에도 주한 일본 대사는 주눅들지 않아 오히려 더 크게 떠들었다.
‘내가 너무 맞는 말을 한 것인가? 기분 나쁘다면 사과하겠지만, 나름의 충심이 있어 내 위치를 잠시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했음을 감안해 달라.’
이에 대한 최익현의 언어적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런 미친 새끼가.’
싸늘한 폭언을 뇌까리는 최익현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주변인들의 일부는 말렸지만, 또 일부는 그렇지도 않아 저 새끼를 어떻게 죽여야 하냐며 눈빛을 교환했을 정도.
연화존자의 보살핌과 가르침으로 성장한 칠익회였다. 저런 말을 듣고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칠익회에 속해 있을 수도 없었을 터.
그 명백히 살벌한 분위기에도 멈추지 않는 주한 일본 대사가 이들 가슴에 연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국가무공원은 참으로 무례하군. 일국의 대사에게 그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여기는 외교관이라는 신분 말고도 다른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사무라이의 기예가 사라졌다고 일본 땅에 내공심법을 익힌 자들마저 없어진 건 아니었다. 국가무공원마저 인정할 정도로 제법 훌륭한 명문의 무공이, 부유했던 섬나라에는 아직 남아 있다.
버블 경제의 유산이었으니, 돈은 정말로 귀신도 부렸다 해야 할 것이다. 넘쳐 나는 돈으로 부족했던 자존감을 채우고자 했던 일본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주인 잃은 내공심법을 사서 모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무림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국가무공원에 들어와 헛소리를, 하지만 의도된 것이 분명한 조롱을 찍찍해 대는 주한 일본 대사를 경호하는 건 그때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들.
그래 봐야 칠익회, 그중에서도 몇 없는 지부장에 댈 만한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
윤아영을 모욕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자, 아버지를 비웃은 주한 일본 대사를 향해 결국 최익현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런 그의 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본국에서 건너온 대사관의 경호원들이 주먹을 뻗고, 발을 걸고, 허리를 잡고 몸을 날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못했다. 최익현을 막으려는 자들은 이러한 시도에 실패했다. 뻗어 온 주먹은 잡아서 그대로 으스러뜨렸고, 걸어 오는 발은 밟아 부쉈으며, 허리를 잡는 손은 반대로 꺾어 버렸다.
그렇게 가라앉은 얼굴과 눈으로 주한 일본 대사의 앞에 선 최익현은 손바닥을 들어 그의 두 볼 사이를 왕복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강력한 무림인의 뺨싸대기에 주한 일본 대사는 그만 기절하고야 만다.
“…시원하긴 했겠습니다.”
송구하기 짝이 없다는 현장에 있던 목격자의 진술에 연화존자는 재밌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부로 알리려 하지 않았음에도 알음알음 알려진 최익현의 폭행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더욱 험악해질 위기에 있음에도 그는 별로 걱정이 없어 보인다.
“맞을 만하면 맞아아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면 본인도 몇 대 얻어맞을 각오하고 떠든 거 같은데.”
그런 연화존자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목격자이자 사고에 지분을 가진 이의 통렬한 자기 고백은 이어진다.
“최익현 씨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래요?”
“저도 듣다 보니 흥분해서 세게 말하긴 했습니다.”
하긴. 윤아영의 성격상 부당한 대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듣고만 잇는 건 잘 상상이 안 가긴 했다.
“미친 왜구 같은 새끼가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 먹고 헛소리냐고…….”
“큭큭큭.”
연화존자는 그 자리에 없어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아주 볼만한 광경이었을 텐데.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쪽에선 원활하게 머리가 돌아간다. 사건의 본질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일본은 그런 식으로 움직였는가?
물론 정말로 주한 일본 대사가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어쩌면 본국의 압박, 국가무공원과 선을 연결하라는 푸시가 너무 강해서 스트레스성으로 일을 저지른 것일 수도 있을 테지.
그렇지만 낮은 확률이다. 일이라는 게 순서가 있는 법인데 아무렴, 다른 접촉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밀고 들어왔을까?
필시 저쪽에서도 뭔가 생각이 있음이 분명했다.
‘마음이 급하긴 급한 게 맞는 거 같은데… 뭘까?’
몇 대 맞아 줘서 만나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걸 보면 확실히 뭐가 있긴 있는 모양.
궁금했지만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익현이 감옥 대신 갇혀 있던 안전가옥에 선객이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철민 씨.”
볼의 붓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남자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인상을 주는 그는 연화존자의 얼굴을 아는 것인지 서슴없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한다.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얼마 전의 일을 생각하면 놀랍다.
“미력하나마 대사의 자리를 맡아 근무 중입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와 벌써 만날 거라고, 최익현을 구금한 장소에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주한 일본 대사의 이어지는 말들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
“일전의 무례는 진실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윤아영 검사님.”
연화존자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금 허리를 접는, 오히려 연화존자에게 했던 것보다 더더욱 예의 바른 모습으로 그는 윤아영을 향해 사과했다.
“이런 사과를 드린다고 상하셨을 마음이 다 풀리지는 않겠지만,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고는 하나 한 사람의 여인의 명예에 오명을 얹었습니다.”
들었던 것과는 다른 태도에 연화존자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사이, 민망하다는 얼굴로 뒤에 서 있던 최익현이 전음 몇 마디를 우물거리며 보고한다.
이를 듣고 연화존자가 하문한다.
“뭘 원하지?”
주한 일본 대사의 허리가 펴진다. 한일 관계에 있어 일본의 대사관이 이토록 공손했던 적이 있던가? 입맛이 쓰다.
아쉬우면 굽히는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와의 관계는 이런 이성적인 설명이 조금 힘들다.
불편한 감정과 의심스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건 없는 호의란 게 없는 외교의 세계라지만, 무공으로 육신의 세월을 거스른 노인이나 다름없는 연화존자에게는 남다르다.
“날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다던데.”
특히 이쪽에서 줄 것이 있는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하겠다.
일본이 대한민국에서 많은 것을 뺏어 간 나라라는 건 확실한 사실이니까.
“한 사람을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한 일본 대사는 그들이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에 대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