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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08화 (108/175)

108화

주한 일본 대사는 일본 정재계의 유력인사들이 모시는 ‘어르신’께서 연화존자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말을 했다.

“그분께서는 오랫동안 김철민 씨를 만나길 고대해 왔지만, 그동안 국가무공원 측에서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해 마음이 조급하신 상태입니다.”

이는 연화존자 또한 들은 바가 있었다. 공식, 비공식을 가리지 않고 그런 요청이 몇 번 들어왔었다고.

워낙 바쁜 몸이라 우선순위 목록에서 굉장히 아래에 내려놓은 제안을 김철민은 기억을 더듬어 떠올릴 수 있었다.

“최근 그분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하여 만남을 주선하고자 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내심을 짐작해 본다.

주한 일본 대사가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무공원에 찾아와 되도 않는 도발을 하고 다시 찾아와 연신 사과를 하는 걸 보면, 그 어르신이라는 분이 좀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고.

딱 여기까지만 생각한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지?”

연화존자의 얼굴은 심드렁하다.

“그 사람이 만나고 싶으면 내가 꼭 만나야 되는 건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호의이건 악의이건, 이익과 불이익 때문이건 간에 이 세상에는 연화존자를 만나 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높으신 분 중에 가까이는 한국의 정치인과 재계인들이 있었고, 조금 멀리라면 미국이나 유럽의 정상들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무공을 익힌 자 중 재력과 재주에 자신이 있는 자라면 예외 없이 국가무공원에 선을 대고자 했다. 연화존자라는 희대의 기인에 대해선 이제 세상이 다 아는 바라 혹시 모를 무공의 조각, 그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해 접견 요청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오죽하면 국가무공원, 즉 연화존자가 만든 무공을 돈을 받고 판다고 했을 때 상하이의 유력 인사들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었을까?

물론 그 대가로 시간 단위로 숙소를 옮겨 가며 원치 않는 내전에 끌려가게 되었지만, 인생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하는 법.

이것만 보더라도 연화존자가 사람을 만남에 있어 기준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난 별로 안 만나고 싶은데.”

그가 보기에 일본의 저 어르신이란 분은 현재의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될 게 없다. 만남의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만남의 결과로 무엇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분께서는 일본의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시는 분입니다. 자리를 가져 보셔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안 만나고 싶다고.”

무엇보다 일을 진행하는 방식만 봐도 이미 끝이었다.

“정말로 날 만나고 싶었다면 진실된 성의를 보였어야지. 음습한 악의를 보이지 말고.”

연화존자 역시 무림인이었기에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주한 일본 대사가 국가무공원까지 찾아와 일으킨 소란이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대상부터가 잘못된 수작질 아닌가?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김철민을 만나고 싶은데 만나 주지 않으니 주변 사람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거라고. 너만 우리의 요청을 진작 받아 줬다면 자기들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고.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안 드는 비열한 짓거리였다.

“다 질러 놓고 이제 와서 공손하면 되는 건가? 아, 본인이 몇 대 맞았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비웃음 가득한 얼굴의 연화존자를 주한 일본 대사는 아무 말없이, 표정 없이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화존자가 그 정도에 겁먹을 위인은 아니지만.

“난 이런 음습한 짓거리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생각은 해 봤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렇게 나왔다면, 어떤 참사가 일어났을지?”

이에 주한 일본 대사는 무언가 변명을 내뱉으려 했지만, 연화존자는 손을 들어 막았다.

“가라, 할 얘기 없으니까.”

선언한다.

“내가 네놈들의 어르신을 만날 일은 없을 거다. 어차피 만나 봐야 하등 쓸모없는 신변잡기나 늘어놓을 테지. 그거야말로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고 믿는 노년의 좋은 취미 생활 같은 거 아닌가?”

“…그러한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르신은 분명 양국의 우호에 큰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되묻는다.

“어쩌라고.”

주한 일본 대사는 그 짧은 물음에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

“양국의 우호에 기여? 재미없는 소리하네. 양국의 우호를 걱정하는 분이시면 알아서 잘 노력하시면 되지, 왜 날 만나자고 하는 건가?”

연화존자는 비웃는다. 그 뻔한 수작, 음습한 저의를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려는 모든 시도를 배격한다.

“무슨 소리를 할 지야, 뻔한 일 아닌가? 사무라이 검법을 복원시켜 달라고 하는 이야기야 빠지지 않을 거고, 돈 얘기가 좀 나올 거 같은데… 그게 전부겠군. 거기에 경제협력이니 외교 혹은 정치에서의 협력이라는 보기 좋은 포장지 몇 개 곁들이는 게 뻔한데, 내가 귀한 시간을 내야 하나?”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려던 주한 일본 대사는 어느새 연화존자의 주변을 감싼 오색의 빛을 보며 입을 다문다.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 말할 처지가 못 되는 그는 더 이상 말하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만나자면 다 만나 주는 사람도 아니고… 꺼져.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이 비슷한 일로 만나게 되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아.”

축객령을 내린다.

동시에 참고 참았던 사과가 흘러나온다.

“…죄송합니다.”

그런 연화존자에게 최익현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열중쉬어 자세를 한 채였고, 고개를 들지 못한다.

최소한의 염치였다.

“됐어. 얻어맞겠다고 찾아온 놈을 어떻게 막아?”

어깨를 두드리는 연화존자의 손길은 다정했지만, 숙여진 고개는 쉽게 올라오지 못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안 싸우는 게 이기는 거’라는 헛소리야. 작정하고 달려들었는데 시원하게 잘 쳤지.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일본 외교관 뺨을 후려치겠어? 잘했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이러한 말들에도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그의 존경하는 스승이자, 아버지가 말은 저렇게 했지만 이 결단으로 인해 어떤 손해를 감수했는지 알고 있다.

아주 잘.

“굳이 척을 질 필요 없는 인간과 척을 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이성적으로 굴었어야 했는데, 어리석었습니다.”

최익현이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일본 측의 수작이 연화존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분명할지언정 거기에는 최익현, 본인의 지분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안다.

만약 자신이 연관되지 않았어도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가 아는 연화존자라면 만나서 더 큰 대가를 받아 내면 받아 냈지 이런 식으로까지 밀어낼 사람은 아니었다.

“됐어. 어차피 아쉬운 건 저놈들인데, 뭘.”

그러나 연화존자는 괜찮다고 말한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네. 너 그때 학교에서 비슷한 일로 싸움박질하고 오지 않았었니?”

옛이야기를 꺼내 최익현을 다시 부끄럽게 만든다.

“너한테 고아라고 놀린 놈의 얼굴을 아주 볼만하게 만들어 놓은 걸 보고 이놈 물건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벌써 언제적 이야기인지.”

어린 시절, 연화존자의 아버지가 세운 고아원에 있던 최익현은 이 비슷한 일을 이미 한번 저지른 적이 있다.

자신을 애비 애미 없는 고아 새끼라고 부른 반 친구. 최익현은 그걸 친구가 아니라 교실의 지형지물 정도로 생각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친구의 몰골을 도저히 몹쓸 물건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그것.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 야무진 솜씨에 얻어맞은 학생의 부모와 학교 측에서는 고아원에 연락을 취했던 것이고, 마침 그날 우연찮게 고아원을 방문했던 연화존자는 보호자 자격으로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의 소년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하하.”

당시엔 아직 국정원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원만한 합의가 가능했다.

얼굴이 완전히 박살 나 있긴 했지만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신분도 제대로 밝히지 않지만 보통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한 김철민의 점잖은 합의 제안을 거부할 배짱 따위는 당시 자리했던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최익현이 강해지고 싶다고 말한 것이 칠익회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다. 김철민 또한 아이였던 그의 눈에 가득했던 독기를 보며 기꺼이 받아 줬었지.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여기까지 말한 그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한국에서는 답답하지?”

최익현은 답하지 않았지만 연화존자도 알고 있다. 예전, 학교를 중퇴하고 전 세계를 떠돌며 외국 생활을 하던 그에게 대한민국에서의 일은 잘 맞지 않다는걸.

“아닙니다. 윤 검사님과 함께 재밌게 일하고 있습니다.”

“아니긴. 깡패 놈들 잡아 오는 걸로 성에 찰 리가 없는데.”

최익현을 비롯한 동유럽 지사 인원들이 국가무공원과 윤아영 검사에 대한 호감은 둘째치더라도 여기에만 머물기에는 아직 젊고 고급 인력이다.

남미 팀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소수 팀으로 그 큰 대륙을 수없이 헤치고 다녔던 그들은 안정된 생활을 갈망하는 면이 컸다.

남미라고 사람 사는 곳이 아니겠냐마는, 개중에서도 인세의 지옥을 돌아다녔던 칠익회 최고의 타격 팀은 안전한 한국 생활이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같이 어디 좀 가자.”

그런 그들이 대한민국에 남아 있기에 포지션이 겹치는 동유럽 지사 인원들을 달리 배치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만약 남미 팀이 국가무공원 전반의 교육 훈련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대체할 수도 있었겠으나, 어쨌든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건 그들이었으니까.

당사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연화존자는 이들에게 새로운 무대가 필요함을 안다.

“어디라 하시면……?”

“미국.”

들은 바가 없어 되묻는 최익현에게 연화존자는 제안했다.

“미국에 있는 청해마도가 지원을 요청했다. 우리의 사업에 저항이 거세다고 하더라고.”

그러자 안온한 생활에 질려 가던 최익현의 눈에 불꽃이 튄다.

* * *

연화존자가 미국으로의 외유를 선택한 건 상하이에서의 일이 나름 체계를 갖춰 간 것도 있지만, 그를 향해 쏟아지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함이 컸다.

그래서 그의 미국행은 대대적인 언론의 보도를 탔고,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상하이에 남겨 놓은 혈마제와 천지극뢰, 대역으로 세워 놓은 장 노인의 활동 역시 활발했다.

원래는 죽음을 가장할까도 했지만, 훗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일단은 유보했다. 그 신분이 필요한 날이 다시 올지도 모르니 일단은 살려 두고 관심을 돌리기로 한 것.

목표가 승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어쨌든 미국으로 떠나는 마당인지라 연화존자는 상하이 쪽의 상황은 정기 보고만 받고 그쪽에 맡겨 두기로 했다.

공산당이라면 이를 가는, 중원에서 쫓겨난 옛 명문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돌아왔으니 한동안은 안심일 테지.

지금 중요한 건 생각보다 지지부진한 미국에서의 사업.

“형님께 지원을 요청드려 송구합니다.”

요즘따라 자신에게 송구한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며, 연화존자는 공항까지 마중 나온 청해마도를 가볍게 포옹한다.

“고생하는 거 다 안다. 오래만에 만났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여전히 담백한 사내인 청해마도는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의아할 지경이었다. 보고서를 받긴 했지만 활자로 설명된 상황보다 현지의 분위기는 심각해 보인다.

무공의 경지로 따지자면 자신에 비견할 만하며 심지의 단단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굳건한 사내가 이토록 피로한 기색이라니.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고?”

기름진 미국식 식사를 마친 뒤 연화존자는 물었다. 간략화된 보고서보다는 의형제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형님께서 미국의 고위직을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청해마도가 전보다 약간 수다스럽다. 그건 여기까지 와서 겪은 고생 때문일까?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 그가 여기까지 와서 겪은 사건 사고들의 피로함을 알 수 있다. 말의 마디마디마다 배어 나오는 피곤함의 깊이란.

“미국은 우리를 배신하다시피 했습니다.”

단어의 선택부터가 그렇지 않나?

연화존자는 청해마도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살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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