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10화 (110/175)

110화

“…와씨. 더럽게 넓네, 진짜.”

최익현은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저택과 주변을 둘러싼 정원… 정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목장에 가까운 규모의 거대한 대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땅이 넓은 나라니까.”

여상스러운 어투로 그의 말을 받는 건 꼼꼼하게 장비를 점검 중인 다니엘 김.

“너도 저런 집이 있어?”

“저런 거 없으면 사업 진행이 안 돼.”

두 사람 다 오랜만에 침투 및 교전용 풀 장비를 맞춘 상태였고, 스탠바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은 없다. 두 사람 다 연화존자의 사사를 받은 무림의 고수이니만큼 기막을 쳐 놓기도 했고, 사실 이 둘이 한밤의 만남을 이루려는 상대방의 경호원들의 수준이란 지역 시큐리티 정도.

만약 연화존자가 시킨다면 백악관이라도 뚫고 들어갈 칠익회의 최정예 인원을 막을 실력은 결코 아니다.

“와씨, 김봉춘이. 출세했네?”

“출세 예전에 했지.”

다니엘 김은 오랜만에 듣는 한국식 이름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예전엔 저 이름이 참 싫었는데, 오랜 친구 입에서 들으니 이제는 무려 반갑기까지 하다.

다니엘 김과 최익현은 일종의 입사 동기다. 같은 고아원에 있지는 않았다. 다만 연화존자의 눈에 띄어 칠익회에 든 시기가 비슷했다.

그때는 칠익회라는 이름도 없었지만 말이다.

언제나 깊은 회의감에 젖어 있던 당시의 김철민은 제자를 들인다는 생각도, 문파를 세우거나 조직을 만들어 뭘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 물려받은 재주와 익힌 무공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재능과 열의를 가진 아이들에게 베푼다는 게 그때 생각의 전부였다.

“연화존자를 만난 게 출세 아니었냐?”

아버지가 세운 복지 재단에서 괜찮은 아이가 있으면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주기적으로 들러 무공을 가르쳤던 것인데, 처음 지도를 받았던 아이들이 성장해 칠익회의 중추가 되었다.

이름조차도 그들이 직접 지었다. 일곱 명의 리더를 뽑고, 자신들을 후원하고 구원한 아버지이자 스승, 연화존자 김철민을 충심으로 보필하자며 맹세한 뒤 전 세계의 음지를 헤매고 거친 삶을 마다 않고 살아왔다.

그랬던 것이 여기까지 왔다.

“돈이야 많이 벌었지만, 모르겠다. 연화존자께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고. 넌 안 그러냐?”

“나도 그렇지.”

한때 치고받으며 죽고 못 살던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이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았다. 그것이 서로의 삶을 살았다는 건 아니다.

이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지울 수 없는 거대한 자취를 남긴 김철민, 무림사 전무후무한 절대고수가 존재했으니까.

무공의 경지나 위력,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삶과 말하지 않아도 표현되는 깊은 애정을 보인 한 사람이.

“그러니 이렇게 잘살고 있지, 안 그래?”

오랜만에 본 사이지만 대화는 이걸로 족하다. 말보다는 다른 것으로도 교감은 충분했다. 언제나 예전의 맹세,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더 크게 갚겠다는, 어린 날 함께했던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는 충만함.

이를 위해 함께했던 이 중 몇몇은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연화존자를 위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기쁨이다.

[단선작업 완료.]

그러니 움직인다.

드넓은 저택은 필연적으로 무수히 많은 틈을 유발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키기 어렵다고 해서 고용주의 위신을 깎아 가며 작은 집으로 옮겨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에 저택의 경호를 맡은 시큐리티 쪽에서는 경호의 범위를 저택으로 한정 지은 대신 헬기를 이용하면 오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캠프를 꾸려 놨고 동시에 유력자인 고용주의 안위에 관심이 많은 주변 경찰들에 즉시 연락이 갈 수 있도록 통신 프로토콜을 준비해 놓았다.

방금 전에 모두 무력화되었지만 말이다. 다니엘 김과 최익현의 침투가 외부로 알려지는 일은 한동안 없을 것이다.

“윽.”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 개인화기류를 충실히 갖춰 왔지만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쓰는 일은 없었다.

사실상 두 사람이 총기를 사용하면 실패인 임무였다. 오늘의 임무는 암살이나 타격이 아닌, 대화였기에.

미리 받아 숙지한 시큐리티 팀의 동선과 개인명세를 떠올리며 손끝의 내공을 조절했다. 아마도 세 시간 정도 쓰러져 재우면 건설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대화의 시간으론 충분하지 않을까?

목표로 하여금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걸 예상해도 말이다.

“누, 누구야!”

두 사람의 목표, 미국의 거대 제약 그룹을 운영 중인 집안의 남자, 데이브는 침대 옆에 서 있는 복면 괴한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등에는 소총을, 양 허리에는 각각 권총과 대검을 달고 배와 가슴에는 빼곡히 탄창을 채운 두 남자는 이목구비는커녕 인종조차 알아볼 수 없게 스키드 마스크로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도, 돈을 원하는가?”

“돈… 돈이라. 가진 게 많으셔서 그런가, 그 얘기부터 꺼내시는군.”

데이브는 조롱 섞인 탁한 목소리가 음성 변조를 위함인 걸 알았고, 동시에 위험한 자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돈을 원하지 않는, 신분을 감춘 남자들이라. 잠귀가 밝은 자신이 두 사람이 발로 툭툭 치기 전까진 일어나지 못했으니, 저택의 보안 팀은 제압당했다고 보는 게 옳을 테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니 외부와의 연락도 모두 끊은 것이 분명했다.

‘저택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은데… 대체 이자들은 누구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이 여럿 있다. 개중에서 이런 대담한 일을 능숙하고도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이들?

도출이 생각보다 쉽다.

“한국… 자네들은 한국에서 왔겠군.”

“오, 역시 명문가의 사람은 다르네. 계산이 빠른데?”

정체가 드러나자 다니엘 김은 복면을 벗는다. 최익현은 유지한다. 이 부조화는 데이브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다니엘 김의 얼굴이야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재계를 풍미한 거물급 투자자이자 믿기 힘든 경력을 쌓은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 언론에 노출이 자주 된 그 얼굴을 못 알아본다면 사업가의 자질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다니엘 김… 무공을 익혔군?”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다니엘 김이 무공을 익혔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뭘로 알아봤지?”

“날 바보로 아나? 나도 사업하며 보고 들은 게 있네. 무장이 통상적인 수준보다 과한 거야 힘이 좋다고 넘어갈 수 있어도 야투경을 하지 않고도 내 보안 팀을 제압했다면 내공을 익혔다는 얘기밖에 없지.”

이러한 목표의 똑똑함은 다니엘에게 기쁨을 준다.

대화가 빨라지면 퇴근이 빨라질 것이고, 그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똑똑하네, 참 똑똑해. 그런데,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왜 우리 일을 방해하는 걸까?”

다니엘의 질문에 데이브는 냉소를 짓고는 침대를 벗어난다. 그러곤 한쪽에 준비한 냉장고에 가서 차가운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다.

다니엘과 최익현에게 권유하지는 않는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내가 왜 방해하지 않아야 하지?”

밤손님에게 냉수 한잔 대접할 만큼 좋은 사이가 아니란 건 분명한다.

“자네들의 그 시장파괴적 기술… 내공을 통한 진기요상을 내가 막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뭐가 되었든 간에 그룹의 손해를 증가시킬 것이 뻔한데.”

“우리의 마약 퇴치 사업이 왜 당신네들의 손해로 이어지나?”

데이브의 적의 어린 말투, 총도 모자라 온몸이 흉기인 사내 둘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주눅 들지 않는 태도에, 다니엘은 의아함이 앞선다.

“나는 미국 내 반발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디서도 내게 이유를 설명하거나, 질문을 던져 오는 일 없이 그저 무조건적인 적대를 보이고 있어. 아, 그래. 우리의 존경하는 대통령께서는 지지율 때문에 마음이 급하실 수도 있지. 한국에서의 약속, 잊어먹을 수도 있어. 그럴 나이니까.”

이것은 사태의 초창기 때부터 이해되지 않는 점이었고, 해결을 난망하게 만들었던 요인이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다니엘조차 미국 의료계 전반에 퍼진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 대한 반발심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데이브에게 말한 것처럼 대통령의 신의 없음은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정치하는 족속들은 믿고 가는 게 아니지. 믿게 만들며 끌고 가는 것도 능력이니까.

하지만 진기요상을 통한 마약중독 치료가 대체 미국의 의료 체계, 그 복만전에 대체 무슨 손해를 입힌단 말인가?

누구도 이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일은 없었다. 관계자와 약속을 잡는 것도 어려웠지만, 설령 약속을 잡아도 별 쓸데없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나 하기 일쑤.

결국 연화존자는 직접 가서 만나라는 조언을 했고, 다니엘 또한 그것밖에 수가 남지 않았다 생각하여 이렇게 직접 온 것이다.

설명하고, 설명을 듣기 위해.

“우리는 당신들과 싸울 의도가 없어. 미국의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지. 만약 그랬다면 차라리 무공을 팔면 팔지, 마약중독 문제 해결이라는 분야에 끼어들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다만 동맹국이자 우방으로서 미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이 나라의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분야에서 이익을 보고자 할 뿐이야.”

이러한 다니엘 김의 설명에 데이브는 풀지 않는 의심을 보인다.

“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건가? 정말 모르는 건가?”

목이 타는지 다시 한번 찬물을 들이켠 그는 낮게 외친다.

“당가그룹!”

이 네 글자에 다니엘과 최익현은 머리가 밝아진다.

“대한민국의 국가무공원이라는 조직 그리고 연화존자와 당가그룹이 매우 가까운 관계라는 걸 알고 있다. 결혼으로 묶어 버리고 싶어 안달이라는 소문마저 돌 정도지. 그런 당가그룹은 유럽 최고의 제약 회사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래! 그래서!”

왜 이걸 모르냐는 투로 말하는 데이브는 물로는 부족했는지 선반에서 술을 꺼내 마시기 시작한다. 답답한 상황이었나 보다.

“마약을 치료하겠다는데 우리가 막을 명분은 없지, 막을 생각도 없고. 본사에서는 만약 너희의 말대로 진기요상을 통해 마약중독이 치료가 된다면 손해보다 이익이 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 잔을 들이켠 그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말한다.

“길거리 약팔이 놈들도 아는 걸 우리라고 모르겠나? 마약의 중독성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더 많은 오피오이드를 쓸 수 있을 텐데.”

“역겹군.”

마약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더 많은 약을 팔 수 있을 거라는 데이브의 말에 듣고 있던 최익현은 부지불식간에 감상을 내뱉었다.

그건 데이브에게 있어 최고의 감탄사였다.

“돈은 역겹게 버는 거야. 역겹게 벌어서 고상하게 쓰는 거지.”

그들 집안이 저런 식으로 번 돈을 박물관과 미술관 등에 투자하는 걸 떠올리며 다니엘은 되물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우리를 믿지 않는 거고?”

“당연한 소리 아닌가?”

데이브는 취기 하나 없는 눈으로 묻는다.

“믿을 수가 없지. 내공 사용자들만 달랑 끌고 온 것도 아니고 한국의 대기업과 함께 들어와서 의료 재단을 세우려 하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최후의 기사라는 뒷배까지 끌어들인 너희 아닌가?”

생각했던 바를 말한다.

“나는 자네들이 일종의 첨병이라고 생각해. 마약중독 치료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적인가? 그렇게 재단을 세우고, 이 나라의 건강보험 재정을 파탄시킨 다음에, 짜자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나고 잔인한 제약 회사를 끌어들이면,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때 가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니엘 김은 저 말이 설명하는 결과가 가지고 있는 타당성을 인정한다.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악몽이며, 어느 정도 생각한 결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침공까지는…….

‘아니, 당가그룹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두고 사람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일 따위 현 시대 가장 뛰어난 금융가 중 하나인 다니엘은 하지 못한다.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며 데이브는 말한다.

“이제 알겠나? 그러니 죽일 거면 죽이게. 내가 죽더라도 자네들과 타협할 일은 없으니.”

하지만 다니엘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 사람 하나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합의안을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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