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13화 (113/175)

113화

미국 텍사스주 엘 파소 공항.

최익현과 그의 동유럽 팀은 낯선 땅을 서성이는 중이다.

함께 미국으로 온 연화존자와는 잠시 떨어져 있다. 대한민국이 아닌 곳에서 연화존자를 보필할 수 있을 거라는 최익현의 기대는 그렇게 이번에도 잠시 보류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기분이란 것이 전처럼 암담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

그와 그의 팀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익숙한 것을 하기 위해 대기 중이다.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빠르고 간단하지만 부작용 많은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낸 채로.

다만 그들이 수행해야 할 ‘작전’의 최고 전문가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부 선글라스를 낀 채 주변을 경계하며 기다린다.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들고 마신다. 무언가를 생각하면서 그러는지, 더워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각 얼음을 아득바득 이로 깨물어 먹으며 시간을 죽인다.

그리고 기다리던 자들은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낸다. 연화존자의 연락을 받자마자 지체없이 날아온 형제들.

국가무공원에 속해 있음에도 희미해지는 법 없는 강력한 유대감으로 묶인 칠익회의 일원.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속 거리감만은 좀처럼 멀어지는 법이 없는 동료이자 사형, 사제 그 이상의 사람들.

“어이, 초이!”

대한민국에서 먼 이곳까지 단출한 차림새로 들어온 이들은 반가운 얼굴로 최익현과 동료들을 가볍게 껴안는다.

“어때?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더럽지.”

마찬가지로 선글라스를 낀 채 씩 웃어 보이는 상대편의 모습은 나오는 말과 달리 후련한다는 표정, 그 자체.

“언제고 돌아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번이 될 줄은 몰라서 말이야.”

그럴 만도 하다. 비록 미국 땅이라고 하지만 벌써부터 그리운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으니까.

“혹시라도 내가 대한민국에서 누워 죽나 했는데, 다시 돌아오다니. 정말 꿈만 같아서 당장이라도 깨고 싶은걸?”

“엄살은. 사람이 다 자기 자리가 있는 거지. 안 그러냐?”

“푸흐흐흐. 그래. 맞지. 내 팔자가 그렇지. 솔직히 약쟁이 카르텔 새끼들이나 때려잡는 팔자에 안전한 대한민국은 너무… 심심했어.”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설립 초기부터 교육훈련을 전담하다시피 하며 활약하던 칠익회 남미 팀이 다시 소집됐다.

이는 미 정부의 비공식적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여기서 비공식적이라 함은 언론 등에 노출되거나 증거가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며, 막상 이들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건 연화존자를 위시한 국가무공원의 미국 파견 팀이었다.

단순히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걸로는 궁극적인 목표에 다다를 수 없다는 주장을 미 연방 정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한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태도에 가까울지언정 말이다.

“우리 같은 놈들이 선생 노릇, 순사 노릇하는 거 안 어울리긴 해. 보람은 있는데 몸이 근질근질했다, 진짜. 뭐 때려 죽이지도 못하고, 총도 못 쏘고, 어디 하나 부러뜨리지도 못하고. CCTV에, 감시하는 인간은 또 얼마나 많은지, 진짜.”

“야, 그래도 우리 애들은 잘 적응했거든? 너희 애들은 대장 잘못 만나서 뭔 고생이냐.”

“뭐가?”

“아무리 빡치게 해도 그렇지. 일본 대사 뺨을 때린 놈은 우리 중에서 네가 처음…….”

“아니, 그게 내 잘못이냐? 작정하고 열받게 하려고 덤비는데?”

최익현이 가시지 않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항변하니, 칠익회 남미 팀장의 얼굴엔 짖궂음이 짙어진다.

“연화존자께서 내리신 가르침을 네가 잊었구나? 어린 중생 같으니라고. 언제나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함과 명철함을…….”

“아니, 그 일본 대사 새끼가 나보고 빠가 조센징이라고 했다니까?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참아? 솔직히 안 패 죽인 게 용한 수준 아니냐, 그 정도면?”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여전히 억울해하는 최익현과 나머지의 웃음기로 가득한 벤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엘파소 한편에 마련한 안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일단의 미국인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법무부 소속, 셜리 스미스입니다.”

칠익회 남미 팀장은 악수를 건네 오는 법무부 조사관의 손을 굳세게 한번 잡으며 방 안을 빠르게 스캔했다.

금발의 젊은 미국인 여자는 그런 남미 팀장의 시선을 알아챘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녀도 탐색하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가무공원 소속이라는 이들에 대한 정보는 미국의 정보망에선 나오는 게 없었다. 나오는 거라곤 유럽과 남미에서 작은 사업을 하던 이들이라는 믿기 힘든 정보가 전부.

순진하게 그걸 믿기엔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서의 행적은 어느 정도 추적이 되는 판국이었다. 국가무공원 초창기부터 교육훈련을 담당한 자들과 얼마 전 대담하게시리 외교관 뺨을 때리고도 무사한 남자까지.

이런 자들이, 뭐? 국가무공원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작은 사업을 했다고? 변명을 해도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하여 의심과 불신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이야기는 필요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솥밥을 먹을 사이 아닌가? 비록 한동안일지라도.

“자, 그럼. 우리가 대화를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긴 금발을 질끈 묶고 하얀 블라우스와 회색 정장을 입은 그녀를 보며 참으로 공무원답게 전형적이란 생각을 하면서 남미 팀장은 최익현을 향해 눈짓한다.

‘너 쟤네랑 같이 있기 싫어서 일찍 나온 거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최익현을 보며 그럴 만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같이 있기에 오죽 부담되는 인상들이어야지.

이건 셜리라는 젊은 아가씨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아마도 법무부 산하 조직 중 ATF와 DEA 소속일 게 뻔한 남자들의 험하디험한 눈빛이 그와 그의 뒤를 훑지만 여상하게 넘긴다.

유치한 기싸움 따위를 하기엔 연화존자께서 직접 나서신 판국이라 마음이 급하다.

급할 일이 아님에도 많이 급하다. 그분의 곁에서 함께하고 싶지만, 자신들의 쓰임은 그분 곁에 있지 않으니 어쩌겠나? 감내하고 받아들이며 애써 볼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셜리의 언짢음이 눈에 들어온다.

‘저 친구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을 거고.’

이 또한 그럴 만한 일.

기실 칠익회 내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게 일을 처리하던 게 그의 남미 팀이 아니었던가? 칠익회가 아닌 국가무공원 인원 중에서도 소수를 제외하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일들을 벌여 왔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하긴. 그가 아는 경애하고 존경하는 연화존자라면 아무 말 없이 요청하고 자신들을 보내면서 이것도 재미라고 생각하셨겠지.

“자, 제가 던지고 싶은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은 이거예요. 왜 당신들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당신들에게 협조해야 합니까?”

한편으론 믿기도 하셨으리라. 여태 약쟁이 놈들도 제대로 때려잡지 못해 이 고생을 하는 중인, 소위 미국의 전문가들에게 칠익회가 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실로 옳으신 판단이셨다.

“아무리 무공의 고수이고 최근 여론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다지만, 왜 저 먼 대한민국에서 당신들이 파견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남미 팀장은 그 기대에 부응해 증명할 생각이다.

얼마든지, 당연하게. 모든 것은 연화존자의 뜻대로.

“국경 너머는 지옥이에요. 시우다드후아레즈는 인세에 펼쳐진 아수라장, 그 자체라구요. 공권력은 실종되었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마굴인 걸 알긴 압니까? 아, 그래요. 영화나 인터넷에서 봤을 수는 있겠네. 갱들을 잡겠다고 경찰이 출동하면 그 길목에서 폭탄이 터지고, 갱단에 밉보이거나 경쟁 조직원들을 잡아다가 다리 위에 효수하는 곳이라고 들었을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봤어요?”

젊은 법무부 조사관의 얼굴엔 아직 무너지지 않은 정의감과 잠식해 오는 공포가 있음을 남미 팀장은 알아본다.

그래도 저 정도면 함께 일해 봄 직하게 준수하다.

예전이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칠익회는 이 정의라는 것에 거는 한 줄기 기대가 커진 모양새.

다 대한민국에서 정의의 여검사를 만나고, 목격한 덕분이다.

“경험해 봤어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누비던 특수부대 출신들도 손발이 굳는 곳이라구요. 그런 곳에 그깟 알량한 무공을 익혔기로서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무슨…….”

“잘 알아.”

증명은 필요하긴 하겠지만.

“…뭐라고요?”

“존나 잘 안다고.”

남미 팀장의 거칠고 도발적인 언사에 방 안의 분위기가 경색된다.

그 전에도 그리 따사로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존나 잘 알지. 당신은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할걸?”

“이봐요, 지금 이게 장난이나…….”

“장난 아닌데. 근데 그거 설명하기 전에 질문 하나만.”

여유롭게 앉아 다리를 꼰 채 책상 위에 올리며 손을 들어 올린 남미 팀장은 묻는다.

“이 방 안에 빌어먹을 CIA 새끼들 있나?”

“…뭐라고요?”

“난 그 새끼들 있으면 일 같이 못 하겠거든.”

그의 거침없는 말에 할 말을 잃은 이들을 보며 선글라스를 벗은 그가 윙크하며 덧붙인다.

“다분히 감정적인 부분이긴 한데, 진심이야. 남미를 마약 지옥으로 만든 새끼들이랑 마약 퇴치하겠다고 함께 가는 거, 못할 짓이지. 안 그래, 법무부 아가씨?”

방 안에 내려앉은 침묵을 배경 삼아 남미 팀장은 말한다.

“이란 콘트라 생각하면 나 같아도 미국인들 쏴 죽이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종종 들거든.”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함에 거침없다.

그는 대한민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다. 칠익회, 어쩌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이들 중 가장 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이기에 어느 정도의 청사진은 잡힌 상황.

하고픈 말을 함에 있어 망설일 이유 따윈 하나도 없다.

“내가 여기로 오게 된 건 다른 게 아니야. 국가무공원 안에서 나보다 남미의 카르텔을 잘 알고, 오랫동안 싸워 온 놈이 없어서 그래. 부패와 경제 불황, 불균형한 부의 재분배가 저 거대한 대륙과 거기 사는 사람들,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집어삼키는지 존나 잘 알아. 다 봤거든.”

학교를 갈 돈이 없고 일자리조차 없는 사회에서 마약을 배달하는 것만으로도 한 식구의 일용할 양식이 나온다면,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배고픔은 나라님조차 해결할 수 없는 재난이었고, 남미의 부패한 정치인들은 그 재난을 해결할 의지도, 의욕도, 의향도 없이 제 배만 불리느라 기름기가 두툼하게 꼈다.

인세의 지옥? 그건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란 걸 연화존자의 뜻을 받들어 악인들을 사냥하고, 무공 비급을 모으던 그는 너무나도 잘 안다.

칠익회의 남미 팀장으로서 그 거대하고 견고한 악순환의 굴레를 모두 목격한 그는 그러니 알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아래에서 위까지, 세계의 가장 큰 마약 공장 중 한 곳을 치워 버린다는 건 보다 큰 결단이 필요하다는걸.

“그러니 나야말로 좀 묻고 싶은데? 미국은 이웃나라의 부강함을 참아 넘길 수 있는 관대한 나라인가?”

지난날의 과오일지, 의도일지에 대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건 미국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한 것이었다.

“단순히 범죄조직 소탕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선량한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건지 궁금해. 이유는, 당신도 알겠지. 저 시우다드후아레즈를 안다고 했으니.”

남미 팀장의 말에 셜리 스미스는 혼란한 얼굴이었다. 자기 정체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 남자와 그 동료들 사이에서 흐르는 여유가 그녀의 눈에도 잘 보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법무부의 엘리트로 이만한 큰 작전에 동원될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그녀지만, 뭐 그렇다.

미국이 능력이 없어서 주변국의 혼란을 방치했던가?

“카르텔 놈들을 싹 다 죽인다고 해서 카르텔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 당신들은 나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목표부터 명확히 하고 오라고. 카르텔을 치울 것인지, 아니면 카르텔이 자라나지 못하게 할 것인지.”

미국 내 불법적 마약 반입을 줄이고자 했던 계획은 이로써 격론에 휩싸이게 된다.

수하들이 이처럼 목표 의식을 뚜렷이 하는 사이, 연화존자는 도심을 바쁘게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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