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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15화 (115/175)

115화

당연히 미 연방 정부의 수장과 김철민이 독대는 아니 될 말이었다.

맨손으로도 충분히 사람의 신체를, 어떤 부위가 되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뽑아낼 능력을 갖춘 세계 최강의 내공 사용자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남자 둘이서만 가지는 오붓한 티타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들의 승낙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백악관의 참모들이 연화존자와 독대해야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에 반대하며 극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사실 이건 국가무공원 쪽 사람들도 마찬가지.

주장과 근거야 여럿이지만,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단순한 문장이다.

‘미국을 어떻게 믿나?’

이러한 의견은 연화존자가 오기 전까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이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미국 내 한인들이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연화존자가 대응하기 전까지 있었던 한인들에 대한 혐오적 발언과 혐오 범죄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경찰들은 수사에 열의가 없었고 주요 용의자가 어이없이 풀려나기도 했다.

의도적인 무관심은 그 정도로 그치지도 않아서 한인들의 반발은 스피커조차 얻지 못했다. 어떤 언론도 이들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는다. 피해 유가족의 인터뷰를 딸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아시안계 정치인들의 성토 발언 역시 비슷한 취급으로 짤막한 단신으로 그친바.

연화존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저지르는 사람인지 알기 전의 모든 것이 한국계 아시안들에 대한 노골적인 외면이라는 명제로 돌아갔다.

솔직히 미국으로 온 뒤 연화존자가 펼친 일련의 행위들이란 그렇기에 무력시위나 다름없었다.

당장이야 범죄조직만 처리하고 있지만, 수틀리면 다른 놈들도 손댈 수 있다는 무언의 신호를 백악관의 엘리트들이라고 읽지 못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독대는 안 된다며 극심히 반대하는 것일 터였다. 정말로 혹시 모를 사태에 두려움을 느꼈을 테니까.

이에 대해 연화존자, 개인의 입장을 묻자면 전부 웃기는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죽일 거면 아무 때고 죽일 수 있는데, 난리는.”

백악관에 들어온 이후에, 그것도 모두 들으란 식으로 일부러 영어로 위와 같은 발언을 하는 건 이러한 불만의 표현이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주변을 둘러싸다시피 한 시크릿 서비스 소속 경호원들의 긴장은 높아진다.

이 노골적인 무시에 알렉산드루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리고자 했다.

그는 이번에도 미 정부가 준비한 경호원 노릇을 하기로 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나. 이들의 입장이란 게 있지 않나?”

어느 정도는 자처한 면도 있다. 연화존자와 미 정부 간의 갈등, 아직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았지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잠자고 있는 그 용암 같은 불편함을 최후의 기사 알렉산드루는 인지하고 있다.

양쪽 모두에 빚이 있는 이 명예로운 기사는 그러니 중재역을 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최후의 기사가 완연한 젊음으로 꽃이 핀 게 아니냐고 연화존자는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랬다. 단순히 육신이 재구성된 것을 넘어 기사단의 재건, 예전엔 실패했지만 지금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프로젝트는 진정한 의미의 청춘을 지상 마지막 오러 연공법 수련자에게 선사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받아 미국을 위한 기사들로 키워 내는 ‘최후의 기사단’ 프로젝트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니, 노년의 사그라듦이란 사라진 지 오래.

그조차 연화존자에게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터였다.

“얼굴 좋아 보이십니다, 어르신.”

그 말에 담긴 함의를 알렉산드루라고 모를 것인가?

“…자네의 일을 제대로 돕지 못해 미안하네.”

사과는 즉각적이며, 변명 같은 건 붙지 않는다.

최후의 기사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간 손을 놓고 계셨던 건 아니란 걸 압니다.”

그는 신의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미국에서 암약하는, 일본의 우익 세력을 대변하는 유관 단체들의 로비로 움직이는 자들을 막기 위해 알렉산드루는 발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향력을 발휘했다.

만약 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누구 하나 죽더라도 진작 죽었으리라. 그가 다져 놓은 FBI의 인맥과 유럽계 자본의 힘이 아니었다면 피를 봐도 진즉 봤을 테지.

다만 그 아래에서 알렉산드루를 방해하던 모든 것이 연화존자를 열받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가서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다, 대화의 상대는 정해져 있으니.

오랜만에 만나는 미국의 국가원수는 전과 다름없이 늙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미스터 김.”

큰 키의 환한 미소로 악수를 건네오니, 연화존자 역시 손을 내민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격식을 차린다.

일단은.

“저도 미국에 들어오고도 이제서야 뵐 줄은 몰랐습니다.”

뼈가 있는 한마디였지만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화답했다.

“이 자리가 그렇습니다. 내 몸은 하나인데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 내 마음데로 일정 하나 짤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늦었지만 미국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통령은 시종일관 미소 지으며 호의적이지만, 김철민은 정치인의 웃음에 속지 않는다.

한 나라의 정점에 선 정치인이라면, 그것도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 자리에 오른 이라면 보이는 태도만으로 믿을 수 없는 노릇이고 믿어서도 안 된다.

그는 이미 약속을 저버린 바가 있다.

지금도 선수를 치는 것을 보라.

“얼마 전에 있었던 조치로 곤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우리 측에서 아무래도 혼선이…….”

연화존자는 그 말을 끊었다. 무림의 고수답게 시의적절하면서도 힘 있는 질문으로.

“우리의 곤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이의 약속이 깨졌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멈칫한 대통령은 너털웃음을 짓는다.

쉽게 무마하려는 수작이다.

“많이 서운하셨나 봅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서운… 서운이라.”

그 말에 연화존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집단 간, 국가 간의 일에 서운이라는 감정을 넣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닌가 하고.

중국에서의 공작을 잠시 접어 두고 와야 했음을, 이 크고 먼 나라까지 와서 별 볼 일 없는 쓰레기들을 치우는 동시에 자식 같은 수하들을 동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방향이 틀어질 뻔한 것들을 바로잡는 그 모든 행위를 고작 ‘서운했냐’라는 물음으로 퉁칠 수는 없는 것인데 말이야.

불쾌해졌다.

“아드님은 잘 지내십니까?”

갑자기 자식의 안부를 묻는 연화존자의 질문에 대통령은 대답의 타이밍을 놓친다.

“아마 부작용은 없을 겁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 진기도인을 받기 위해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임에도 누구도 결과에 후회하는 법이 없었으니까요. 참, 그거 아십니까? 사우디의 왕세자가 대통령의 방문을 제법 정중하게 맞이했던 대가가 그것이었음을요?”

“…그것까진 몰랐군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아드님께 물어보도록 하세요.”

여기까지 말한 연화존자가 준비된 좌석에 앉는다. 제집처럼 털썩 주저앉은 그가 손을 뻗는다. 허공섭물의 기예로 주전자와 찻잔을 들어 따른다.

홀짝이며 말을 잇는다.

“아, 말할 형편이 못 되시려나?”

방금 전, 자신이 지었던 웃음을 돌려받음에 대통령의 얼굴이 굳는다.

연화존자는 개의치 않는다. 할 말은 아직 많다.

“한 달에 제정신인 날짜가 몇이나 됩니까? 아, 한 달은 너무 깁니까? 일주일에는요? 하루에는요?”

이제 대통령은 포커페이스를 잃는다.

“제정신이긴 합니까?”

장남을 병으로 잃은 뒤 애지중지하는 둘째 아들, 온갖 구설수와 아버지가 유력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면 감옥에 가고도 남았을 골칫덩어리 아들임에도 부성애는 통 사라지지 않아 저 말이 가슴을 후벼 판다.

분노를 일으킨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는 않겠소. 하지만 부디 그 입을 조심해야 할 거요.”

“입을 조심해야 한다라…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리고 연화존자는 분노의 근원을 지적한다.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조심해야 할 건 내 입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부자와 권력자들이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받고 싶어 하는 진기도인을 받고 다시 마약중독의 길로 빠진 댁 아들의 정신 나간 행실인 거 같은데?”

“…뭐라고?”

“행실이 개판이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 건, 병으로 죽은 형의 와이프랑 데이트하는 걸로는 부족했냐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연화존자는 아이스크림 없냐며 주변에 물었다. 질문을 받은 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최후의 기사는 이마를 짚었고, 방 안의 공기는 바닥을 찍을 기세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대통령에겐 화를 낼 기회조차 없다, 매서운 말의 향연은 그칠 줄을 몰랐기에.

“나의 진기도인에는 최소 천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대통령. 이건 나의 자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장가가 그래요. 문제는 지급수단을 돈이 아니라 다른 걸로 받을 때가 많다는 거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귀한 걸 댁의 망나니 아들한테 펼친 건, 시발. 내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당신네 나라와 건실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알아?”

연화존자의 전신에서 견디기 힘든 기운이 터져 나온다.

“댁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생각이 다른 인간들이 어찌나 많은지 나보고 이런 말을 하더군. 북한을 적대하고, 미국을 가까이하는 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친미주의자로 인권 의식이 부족해 한국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이야.”

주변을 내리찍는 듯한 연화존자의 내력에, 최후의 기사는 내심 ‘지금이라면 그와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라고 했던 생각을 수정한다.

나이 같은 것과 상관없이 아직 그의 무력은 연화존자를 넘어서지 못했다.

알렉산드루조차 이럴진대, 주변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소속 경호원들은 무장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흘리면 양호한 것이었고, 구토하며 속을 비워 내는 자들이 속출할 정도.

세계 최강대국의 정예라고 하기엔 안쓰러운 모습이지만, 참아 왔던 분노가 있는 대로 터진 연화존자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아니다.

“북한을 적대하는 것에 대한 욕이야.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민족이니까 내가 싫은 거에 대한 책임을 진다지만, 친미주의자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억울하더군.”

어느새 오색빛깔 안광을 빛내고 있어 사람, 그 이상의 것으로 보이는 연화존자의 시선이 알렉산드루의 철저한 보호 아래 숨은 대통령을 향한다.

“난 미국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건데 말이야.”

21세기 사회에서 홀로 살 수 없음을 일찌감치 자각했지만 한민족인 북한도,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일본도, 일대일로를 외치며 주변국을 억압하던 중국도 선택할 수 없던 연화존자는 종전처럼 미국을 파트너로 삼고자 했다.

실리적인 이유였을 뿐이니, 연속하여 이어진 배신에 분노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FTA를 맺어 놓고 그런 식의 배타적 조항을 집어넣어 배척한 것, 국가무공원의 진출을 통해 내공 사용자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 모두 왜 그런 지 알겠어. 앞의 거야 당신 지지율이 박살 났으니 그런 거고, 뒤에 거야 최후의 기사가 있으니 굳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지?”

말을 하며 더해지는 연화존자의 기세에 알렉산드루가 침음을 내뱉는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천하제일인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의 수작질을 관망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왔으니, 나는 물어야겠다.”

가혹한 힘의 화신, 그 자체가 된 연화존자를 보며 대통령은 어지럼증을 느끼지만, 그를 부축해 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약속을 어기겠다면, 맹세하지. 이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고 초강대국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겠다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럴 힘이 있다.”

최후의 기사조차 버티는 게 전부인 지금, 미국의 국가원수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천하제일인의 물음을 견뎌 내야 하리라.

“선택해라. 신뢰인가, 배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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