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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16화 (116/175)

116화

윤아영의 국가무공원으로부터의 독립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녀는 간단한 내부 행사도 없이 퇴직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축하, 국가무공원을 나가서도 종종 보자는 말과 함께 주어진 잘되라는 덕담을 안면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조직 차원의 거창한 행사 같은 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사자가 원치 않기도 했고, 국가무공원의 현 상황상 그런 일로 시간을 뺏길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반대로 말하자면 상당히 조용하게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국가무공원의 설립 이전과 그 초기부터 함께했던 주요 인사, 이제는 전 국민이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의 신상에 큰 변화가 있음에도 이에 대해 알거나 관심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계의 경우 윤아영에게 ‘공식’적인 관심을 쏟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이는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국가무공원의 꾸준하고도 지속적인 정화 작업이 결과적으로 정계의 명망 있는 인사들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부르다시피 한 덕이 큰 바.

세상천지 더러운 돈 안 받아먹은 놈이 없고, 깨끗한 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다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멀쩡하고, 괜찮은 사람이 정치하기 참 녹록치 않은 세상이라는걸.

그렇지만 그걸 백일하에 까발리는 건 좀 다른 문제.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기에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원인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이야 어찌하겠냐마는,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떨쳐낼 길 없는 환멸을 느끼는 중.

그러니 정치에 몸 담고 있는 이라면 살기 위해 자력갱생을 노력 중인 것이며, 거기에는 국가무공원의 활동으로 바뀐 환경적 변화에 대한 원망이 들어 있는 것도 사실.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뿐 아니라 지역 정계의 부정부패까지 싹 뽑아 버린 강단 있는 여검사에게 손을 내밀 이유는, 그러니 없다 하겠다.

고로 윤아영 전직 검사는 의도적인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검사일 때도 그 모양이었는데, 국회에 입성이라도 하면 감당 못 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뭐, 이 역시 그녀 쪽에서도 바라 마지않던 일이지만 아무래도 공식적이지 않은 루트에서의 피곤함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는 게 이 업계를 아는 이들 대다수의 평가였다.

당장 오늘, 그녀를 찾아온 사람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절 잘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들.”

“하하하. 윤 검사님의 명성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윤아영은 기존의 구태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생각하는 정계 입문의 방식이 그런 것이었다면, 국가무공원을 나오지도 않았으리라.

조금 거칠고, 이해하기 힘든 족속들이긴 해도 국가무공원의 무림인들은 일하기에는 꽤 괜찮은 동료들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누가 상대가 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상대가 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주저 없이 질러 버리고 두려움 없이 잡아 오는 게 참 편했지.

그러나 이제는 남이다. 남이 되어야 할 사이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를 찾아온 남자는 깔끔하지만 작고 허름한 사무실을 돌아보며 물었다. 현 청와대 정무수석인 그는 대통령이 원했던 인재가 왜 이런 곳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비단 정무수석 혼자만의 궁금증은 아닐 것이다. 의도적인 무시라 함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니까.

“소문은 파다한데, 아무도 확인을 시켜 주지 않아서요.”

여유로운 웃음을 가장하는 그의 안경 너머 눈빛이 번뜩인다. 기필코 알아내고야 만다는 의지 같은 것이 보여 윤아영은 내뱉지 못한 한숨을 삼킨다.

귀찮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겉으로는 몰라도 속에서만큼은 틀어진 지 오래인 국가무공원과 대통령의 사이이기에, 운하신권을 비롯한 국가무공원의 일부 고위급 인사들에게만 밝힌 정계 진출의 다짐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명시적으로는 말이다.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능력 있고 끗발 있는 검사가 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찾아오고, 사람을 보내고 하는 거 아니겠는가?

“국가무공원과는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VIP께서도 윤 검사님의 거취에 각별히 관심이 많으십니다.”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변호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을 많은 이들이 했다.

그것은 처음 국가무공원이 설립됐을 때 가장 야심만만하고 진취적인 변호사들이 했던 선택의 요인으로, 만약 윤아영이 로펌을 차린다면 사무실의 성업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일.

국가무공원의 초창기 멤버이자, 가장 전투적인 기소와 재판을 보여 줬던 윤아영이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국가무공원의 영향을 받는 모든 단체와 기업은 그녀를 원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무수석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곧바로 정치로 직행하는 꽃밭 같은 길이 있다.

이 또한 유력한 가능성이다. 그건 바로 윤아영, 그녀의 대중적 인기와 호감도가 심상치 않기 때문.

그녀 쪽에서 접근하든 아니면 오는 접근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든, 길은 여럿이며 꽃놀이패는 확실하다.

청와대 정무수석쯤 되는 양반이 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셨겠나?

“저야 뭐, 일단 뭘 할지 생각하는 중입니다.”

위와 같은 당사자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그녀가 국가무공원에 재직하며 이루어 낸 일들, 그 어떤 공직자도 얻지 못한 거대한 사랑과 호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사이비 종교의 테러에도 굴복하지 않은 강한 여인. 그렇지만 염전 등에서 노예처럼 다뤄지며 갈 곳조차 없던 이들의 신원 회복과 거처 마련에 사비까지 턴 따뜻한 사람.

수많은 권력과 돈에 대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오직 법률이 정한 대로만 일하던 그녀에 대한 대중의 호의는 매우 깊다.

잡아넣은 재벌과 정치인, 공무원과 무림인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그럴 수밖에 없지.

그녀는 건국 이래 최악의 무림인 범죄자 두 명을 모두 기소한 유일무이한 업적을 세웠다. 강력한 범죄 조직을 해체시켰으며, 전관예우의 압박 따위에 굴하지 않고 나아가 수많은 재벌 어르신을 휠체어에 태운 포토라인 안 피사체로 만들기도 했다.

잡범 따위 감옥으로 차 버린 건 말하기도 입 아프고.

그런 사람이 국가무공원을 나와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한 와중에 잠시 쉬겠다고 한다면 누가 있어 그 말을 믿을까?

그러나 이는 윤아영의 진심이다.

“지금으로서는 휴식을 취하며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네요.”

이후로도 끈질기게 의중을 떠보려는 정무수석을 힘겹게 돌려보낸 윤아영은 어제 막 도착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소파에 앉아 겨우 한숨 돌린다.

멀고 먼 목표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이 한가로움에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일 안 하고 살면 죽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급하게 얻느라 크게 따지지 않은 사무실은 확실히 작고, 그녀의 이름값이란 걸 생각하면 누추했지만 그럼에도 안온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음에도 불편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아 오직 편안하기만 했으니, 그로써 알 수 있다.

윤아영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연화존자를 만나 국가무공원에 합류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인간 윤아영은 검사로 임용된 이후 쉬어 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사이비 종교 새세상의 테러에 의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정도지만, 그건 회복이지 휴식이 아닌 일.

재충전의 시간이다.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윤아영의 퇴직 자체는 갑작스러울지 몰라도 그에 대한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 생각은 오래됐다. 뭔가 잘못되었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각은.

그녀는 검사로 일하며 대한민국의 많은 모순을 목격했고, 국가무공원에서 일하면서는 한계라는 것을 맛보았다.

잡아넣어도, 잡아넣어도 끝이 없는 악인들을 보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엄정한 법 집행은 물론 필요한 것이지만 그래 봤자 지켜져야 할 그 법이란 것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끼는 건 그녀만의 착각이었을까?

국가무공원, 능력과 실행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최고인 그들과 함께했음에도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고작 이 정도 처벌이 다인가? 고작 이 정도가 전부인가?

그래서 그녀는 대통령이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다른 게 필요하다는 그 말을.

국가무공원을 그만두고 잠시 쉬기로 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대로 가기보다는 뭔가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그런 마음.

하지만 뭘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없다.

“계십니까?”

그런 그녀의 사무실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옷차림과 얼굴을 살피며 윤아영은 생각한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아닌 거 같다고.

환갑 직전으로 보이는 남자의 복장도 복장이지만 그 육신은 육체노동 끝에 단련된 것이 아니라 눌린 채 작아진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얼굴에 담긴 고단함이 지난 형편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심히 피로해 보인다.

“누구시죠?”

“윤아영 검사… 아니, 변호사님 맞으시죠?”

그렇기에 의아해진다. 전화 정도야 개통해 놨지만 휴식이 우선이기에 그 외의 다른 작업들은 전혀 진행하지 않은, 말 그대로 간판만 걸어 놓은 거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찾아온 남자가 누구인지.

“김승우 변호사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남자는 윤아영의 사법고시 동기의 이름을 말했다.

이로써 개연성은 갖춰지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그녀가 기억하는 김성태라는 사람은 꽤나 나이스 한 사람이었지만 검사가 된 이후로는 연락이 끊기다시피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누군가를 보냈는지.

인권 변호사라는 거창한 이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권에서 외면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정도로 알고 있던, 그럼에도 정치에 뜻은 없는지 언론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은 채 묵묵히 일하던 그가 왜 사람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의도지?

하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윤아영은 내심 쓴웃음을 짓는다. 검사적 버릇을 아직도 못 버리고 사람을 의심부터 하는 것 좀 보라면서.

“일단 앉으시죠.”

내려놓기로 한 마음을 지킨다.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 보자 마음먹지 않았나?

정리가 덜된 사무실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고 또 본인이 마시려고 사 놓은 차와 커피 종류가 갖춰져 있음에 다행이라 여기며 윤아영은 바쁘게 움직인다.

차와 커피 중 커피가 좋겠다고 말한 남자는 윤아영이 핸드 그라인더를 꺼내 그람 수를 재 가며 원두를 가는 걸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인내심을 보이며 기다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그렇기에 눈치를 보는 모습에서 아마도 사건의 수임을 부탁하려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옳은 짐작이었다.

“제 딸아이가 몹쓸 일을 당했습니다…….”

오래전에 이혼한 채 홀로 딸을 키운 남자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정을 설명한다.

어찌 보면 흔한 이야기였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편부 가정의 아이가 교내의 가해자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그 강도가 심해지며 범죄에 노출된 것은.

심지어 가해자들의 부모들이 제법 사회에서 힘을 갖춘 자들이라는 것마저도.

“김승우 변호사님께선 윤아영 검사님께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통쾌하지 못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제 딸아이를 그렇게 만든 놈들의 부모 중에는 시의원과 지역 무림 문파의 소유주가 있습니다.”

윤아영은 왜 안면 정도나 겨우 있는 사법고시 동기가 자신에게 자기 의뢰인을 보냈는지 이해한다. 정치인도 버거운데 무림인이라면 확실히 그녀만 한 사람이 없긴 하지.

하여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휴식을 생각했었는데, 곧바로 마음을 바꿔 먹는 것에 대해.

고민은 길지 않다.

“성함이?”

“이영덕입니다.”

딸아이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아버지를 보며 분에 넘치는 사치를 누릴 수야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우선 수임서부터 쓰시죠.”

그녀는 의욕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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