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오, 주여.’
간밤의 열렬했던 움직임에 지쳐 잠들었다 돌연 잠에서 깨어난 돈 까를로 씨는 자신을 덮친 살아 있는 악몽에 습관처럼 하느님을 찾는다.
어두웠던 과거를 지나 이제는 지역의 존경받는 부유한 인사이자,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성도인 그는 그럴 수밖에 도리가 없다.
왜 아니겠나? 저 악마 같은 놈이, 고국으로 돌아가며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지옥의 전사들을 이끄는 동방의 타락한 악마가 다시금 돌아온 것도 모자라 그의 침실에 홀연히 출연했는데.
그는 처음에 이것이 정말 악몽인 줄로만 믿었다.
믿고 싶었다.
‘주여, 당신의 어린양을 인도하소서.’
벌벌 떠는 와중에도 성호를 그을 수 있는 건 그렇기에 초인적인 인내와 오랜 시간 굳어진 신실함 덕분에 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일.
남미의 모든 카르텔이 저들을 죽이고자 기적적인 합심을 이루어 냈음에도 죽이지 못했던, 그 대가로 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카르텔 보스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때에 그 누구도 저와 같은 독실함을 보이지 못했다.
과연 존경받는 지역 유지이자 최근 성세를 이어 가는 거대 기업의 소유주.
“오랜만이군, 까를로.”
그가 가진 주님에 대한 신실함의 증명의 한 가지 흠이라면, 돈 까를로가 지옥의 전사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 정도?
돈 까를로는 돈과 생존을 위해 칠익회 남미 지부의 하수인 노릇을 했었다.
“가세가 더 번창했군.”
그리고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오랜만의 옛 친구… 는 아니고 옛 동료 혹은 조력자인 돈 까를로를 찾아온 칠익회 남미 팀장은 확연히 달라진 돈 까를로의 부유함에 혀를 찼다.
허수아비 같은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숙면 중인 돈 까를로의 침실에 들어서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 이거. 완전 출세했네?
전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광대한 저택과 그 안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돈 꽤나 썼을 게 분명한 사치스러운 실내장식과 열 명 정도는 흔쾌히 누워 할리갈리를 하고도 남을 넓은 침대.
그리고 그곳에 누운 배불뚝이 사내와 아리따운 젊은 여자 세 명의 모습이란 그런 감상을 하게 한다.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자네의 사업이 무탈하게 진행된 것 같아 마음이 기쁘군.”
예전에도 물론 상재 있는 유능한 중개인이자 상인이었지만, 칠익회가 사라진 후 그 혼란의 여파를 수습하며 쌓아 올린 금력의 탑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위상을 까를로에게 부여한 듯싶다.
곳곳에 존재하는 부의 상징과 까를로, 한 사람을 경호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도 많은 숫자의 경호원이 권력의 정도를 보여 준다.
어디 그뿐인가? 돈 까를로라며 지역 빈민들에게 나름의 지지를 받고 있다니. 영세 약팔이로 목숨을 위협받던 과거에 비하면 지대한 발전이지.
“…다 자, 자네들의 도움 아니겠는가?”
이러한 남미 팀장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오만함,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그 문장에 까를로는 치를 떨었지만, 달리 반박의 여지는 없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 진술이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어서 기쁘군. 이야기가 빠르겠어.”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할 법하건만 까를로와 남미 팀장 모두 십오 년 전의 그날을 기억한다.
두 사람 모두에게 잊기 힘든 날이었다. 칠익회의 초창기, 모든 것이 어설프거나 완벽하지 않던 그때 신생 남미 팀과 까를로는 조우했으며 한쪽은 첫 대규모 작전, 한쪽은 죽음의 아가리 그 혓바닥 위였다.
삼양 태극문의 비기 중 일부가 흘러 들어갔다는 카르텔을 습격한 칠익회 남미 팀이 발견한 유일한 생존자는 당시 인근을 장악한 카르텔 멤버들 몰래 물량을 빼돌린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이자 갯벌에 묻힌 진주 같은 이였던 것.
가죽이 벗겨진 채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기식이 엄엄하던 까를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멤버들 간에 격렬한 찬반 논쟁이 있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팀장이었던 현 남미 팀장은 까를로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연화존자의 대자들이 강력한 무공과 더불어 세계 각지의 특수부대에서 실력을 쌓은 베테랑들이라 해도, 숫자가 적은 이방인이기에 믿을 만한 현지 조력자가 있어야 함을 그는 알았다.
변덕스러움과 신중함 사이를 줄타기한 끝에 그를 살려 동업자의 위치로 격상시킨 남미 팀장의 탁월한 안목은 그것만으로도 증명되었던 바.
까를로는 쓸 만한 인재였던 것이다. 응급처치를 하고는 곧바로 칠익회 남미 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성치도 않은 몸을 움직여 무너진 카르텔의 잔존 세력을 흡수. 지역 내 새로운 패자로 등극한 건 단순한 생존 본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려 십오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충실했던 것도 말이다.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남았나?”
이제는 돈 까를로라 불리며 무서울 게 없는 그였지만 딱 하나, 칠익회가 그는 두렵다.
진실로 두려웠다. 자신을 살려 준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만, 그들의 손속은 그 어떤 카르텔보다도 잔인하고 냉철했다.
그들의 조력자 중 자신만 남은 건 바로 이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간 칠익회가 남미에 심어 놓은 대다수의 조력자 중 돈에 눈이 멀어, 혹은 다른 카르텔의 협박에 못 이겨, 또는 알 수 없는 다른 이유로 배신을 시도했던 자가 많았는데, 이들 대다수는 잔혹한 응징 끝에 사망했다.
거기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돈 까를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으니, 신실한 신앙은 나약한 인간을 굽어살피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
칠익회 역시 이러한 돈 까를로의 우정과 성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의 만남은 조금 다른 식이었으리라.
“우선 자네가 지난 세월, 우리를 위해 보여 준 신의에 감사함을 표하겠네.”
하나 이와 같은 호의의 문장은 돈 까를로 씨를 더 없는 공포로 몰아넣는다.
말투는 온화하기 짝이 없지만 오랜 시간 이들을 봐 온 까를로는 방심할 수 없었다. 고생했고, 수고했으니 이제 죽으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강박이 아니다.
‘이 미치광이 놈들…….’
까를로는 칠익회의 인원들이 미쳤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었다. 저들의 왜 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화존자라는 현인신을 믿는 저들, 긴 세월 칠익회의 한 축에 헌신한 그도 얼굴조차 모르는 무림의 고수를 섬기는 이들은 대체 왜 사는지 모를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돈도 싫고, 여자도 싫다고 했다.
카르텔과 전쟁 아닌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채권과 현금, 보석이나 금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동방의 글자로 적힌 낡은 책 따위를 신주단지 모시듯 귀하게 취급했다.
여자를 싫어하는 건 정도가 더욱 심했다. 애초에 가족을 만들 수 없다며 여자를 가까이하지도 않았지만, 단체로 정관수술을 하고 오는 건 좀…….
그에 더해 극에 달한 살인 기술까지.
어쩌면 까를로의 칠익회에 대한 공포는 저들이 보여 준 신출귀몰한 솜씨, 냉정하여 숨죽이게 하는 살인의 기예보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행과도 같은 삶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그래서는 아니 될 테지만.
“우리가 잠시 이별을 했지만, 앞으로 다시 긴밀한 협력을 했으면 해서 말이야.”
남미 팀장의 말에 돈 까를로는 무슨 말인지 경계의 눈빛을 보냈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혹하는 눈빛을 빛냈다.
그럴 법도 했다. 돈이 부족하지 않은 그에게 부족한 건 좀 더 큰 권위와 권력이었으니.
“우리는 자네가 이 나라의 정계에서 힘을 발휘해 줬으면 하고 있어.”
칠익회 남미 팀장은 얼마 전, 그들의 경애하여 충심으로 섬기는 연화존자가 미 대통령과 지었던 담판의 내용을 듣고 가장 먼저 까를로를 떠올렸다.
“이 나라에도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해. 그렇지 않나?”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소? 하지만 그건…….”
까를로는 자신을 정계로 유인하려는 칠익회 남미 팀장의 말이 영 와닿지 않았다.
그건 마치 ‘여기에서 죽겠느냐, 아니면 앞으로 쓰임을 다하고 죽겠느냐’라고 묻는 것 같아 언짢게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잘사는 듯하더니 왜 이제 와서 이런 제안을 하는지도 의심스러웠고, 무엇보다 그가 정계로 간들 뭘 바꾸고, 뭘 할 수 있을 거란 말인가?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영문을 모르겠군.”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고 싶은 말은 해 보기로 한다.
칠익회가 사라진 사이,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수습하며 지역의 유력자가 된 이후 이어진 주변의 떠받침과 우러러 봄이 작았던 간덩이를 다소 늘려 놓기도 했고.
“그래. 자네와 자네 팀이 내 생명을 구해 주고, 또 지난 세월 동안 내 재산을 늘린 걸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하지만 난 자네들이 너무도 두려워.”
억눌렸던 말들이 튀어나와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난 자네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의지도 이젠 없다네. 대체 뭘 위해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남미 팀장은 저것이 보편적인 시각임을 안다. 무림인, 무공에 미쳐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는 무공을 모르는 자들의 시선.
지금이야 시대가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저 중국, 감히 연화존자를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나라에선 사람을 도구로 써 가며 무공을 익히곤 하지 않았나?
“급하게 사라진 것만 해도 그래.”
하물며 십오 년이었다. 충실한 조력자였지만 동시에 남미에서 가장 가까이 칠익회를 봐 온 문외한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라고 모를 리 없다.
“그때 내가 했던 고생은 치지도 마세. 어차피 나한테도 이익이었으니, 별로 따지고 싶지도 않구먼. 그래도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뭔가?”
“자네들한테 이 나라는, 이 땅은 무슨 의미인가?”
돈 까를로 씨는 깊은 눈으로 물었다.
“나름 긴 세월 아닌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갈 만한 시간 동안 여기에 머물면서 대체 자네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던가? 어떻게 그 모든 걸 망설임 없이 버리고 돌아갈 수 있지?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내게 정치인이 되라고? 하!”
칠익회에 충실했지만 믿지는 않는 까를로는 이렇게 묻는 듯하다.
그간 단 한 번의 신뢰도 보여 주지 않은, 심지어 얼마 전 한국으로 떠날 때조차 멋대로 휙 떠나 놓고 멋대로 돌아와서는 너희 말을 들으라고?
남미 팀장은 까를로의 이와 같은 항의가 타당하고 느꼈다.
“우리가 자네의 도움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섬기는 연화존자가 무엇보다, 나 자신보다도 우선이었기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
하여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길고 자세하게, 보다 솔직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자네가 해 준 게 자네의 목숨값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미안한 감이 있던 것도 사실이야. 단지 우리는 연화존자를 위해 살기에 여기에 대해 언급도, 대접도 할 수 없었을 뿐.”
그가 왜 직접 여기로 왔는지에 대해.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야.”
“아니라고?”
“상황이 바뀌었다.”
남미 팀장은 설명한다. 어떻게 상황이 바뀌었는지, 이제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연화존자께서는 남미의 부흥을 원한다. 아, 물론 이 넓은 땅의 수많은 사람과 국가가 한마음, 한뜻일 수 없는 건 알고 계시지. 그런 환상을 품고 계시진 않아.”
그의 눈빛이 빛난다, 차갑게 가라앉은 까를로와 다르게.
“더는 이 나라가 마약 생산국 따위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연화존자께서는 그 더러운 물건을 싫어하시며, 없애고 싶어 하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연화존자께서 말씀하셨다.”
남미 팀장의 얼굴엔 종교적이라고 불러야 할 열의로 가득 찬다.
“그분이 말씀하셨으니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지게 할 거야. 그 길에 자네가 있는 것에 감사하며 이렇게 왔어. 우린 자네가 같이 갈 수 있을 거라 보고 있거든.”
그것이 돈 까를로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침묵하며 듣는다.
기민한 정신은 속삭인다. 정말로 마약을 없애지는 못할 테지만, 적어도 그 파도에 편승할 수는 있을 거라는걸.
혹시 몰라서 그럴까 봐, 잘 벌리던 마약 장사를 접지도 않았던가?
“이미 우리는 움직이고 있으니 결정하게. 따를 텐가?”
대답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