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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18화 (118/175)

118화

“아, 선크림도 못 바르고, 진짜. 서럽다, 서러워.”

더운 기후에서 오래 지낸 덕에 얼굴이 제법 까매진 최익현과 그 수하들. 이제는 해체되다시피 한 전 동유럽 지부인원 중 누군가가 따가운 햇살이 불만인 모양이다.

하지만 작전 중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의의 기습을 가하는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방에게도 무공을 익힌 자가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그 어떤 화학적 용품도 사용이 금지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고로 씨도 먹히지 않을 투덜거림이었다 하겠다.

“무공 익힌 놈이 햇빛 가지고 불만은.”

“거, 티비도 안 보셨소? 선크림 바른 사람하고, 안 바른 사람하고 한 60살쯤에 피부 비교해 보면 장난 아닌 거? 완전 자글자글해지더만.”

“왜? 환갑까지 무사하게 살 수는 있을 거 같고?”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려고 익힌 무공 아닙니까?”

우거진 숲속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는 부하에게 최익현 역시 투덜거린다.

“야, 임마. 연화존자께서 전수하신 무공을 익혔다는 놈이… 너 이 자식, 너무 불경한 거 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그게?”

“그렇잖아. 연화존자께서 주신 무공을 익히고도 얼굴 타는 게 두렵다니. 연환신공을 믿지 못하니 그게 바로 불경함 아니냐, 이거야.”

이러한 최익현의 교조적 발언은 뜻밖에도 주위의 빈축을 산다.

“지부장님, 그건 너무 사이비 종교 같은 발언 아닙니까?”

“뭐?”

“물론 저희도 연화존자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건 좀 무슨 광신도 같잖아요. 우리끼리야 그래도 그러려니 하지만, 남들이 들으면 좀 그렇습니다.”

부하들의 발언에 최익현은 “이 자식들, 연화존자께서 베푸신 크고 높으신 은혜가 희미해진 게 틀림없으니 한번 정신 개조를 받아야 되겠다.”라고 연신 투덜댔지만, 어쨌든 지금은 작전 중.

농담은 농담으로 끝을 낸 채 집중한다.

이런 일의 전문가답게.

[목표는?]

[아직 파티장 대기 중.]

지겨운 대기를 하는 것도 익숙할 뿐. 기다림 중에 오고 가는 대화는 이들의 날카로운 정신의 예기를 죽이지 못한다.

“자식, 거 팔자 좋네. 마약 팔아 번 돈으로 대궐 같은 집도 짓고, 여자도 여럿 거느리고. 나쁜 새끼들은 하여간 하나같이 잘 먹고 잘살아요.”

“그럼 뭐 합니까? 오늘 뒈질 건데요.”

“뒈질 때 뒈지더라도 그때까지 얼마나 행복하냐? 어차피 죽는 건 순식간이라 고통도 없을걸?”

이토록 살벌한 대화를 하며 그들은 기다린다.

악인의 말로를 시시한 잡담 따위로 치부하며.

“죽고 나서야 잘 죽었네, 천벌을 받았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삶의 대부분을 남의 인생 파탄시켜서 부귀영화 누리다가 죽기 직전에야 아주 잠깐 고통스러운 건데.”

“뭐,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죽는 날까지 잘 먹고 잘살다가 호상으로 죽는 것도 꼴보기 싫은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죽일 놈이, 죽일 놈들이 워낙 죽어 마땅해서 죄책감은 없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혹 선량한 사업가, 건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을 없애야 했다면 아무리 암살과 폭행, 감금이 익숙한 칠익회 멤버들이라도 조금은 마음이 켕겼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목표 출발. 지금 막 차에 탔고, 이십 분 후 도착.]

침묵을 시작한다. 긴 이십 분, 누군가를 죽여 온 삶에 익숙한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항상 뭔가 남다른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사람을 죽이고, 죽게 하는 건 어쩌면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갈고닦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무수히 많은 것을 해 온 와중에도 가끔은 생각이란 것에 빠지기도 한다.

보육원에서 자라다 연화존자의 선택을 받아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던,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무공을 익히고 싶다는 열망으로 연화존자를 찾아간 뒤 성인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에서의 일로 실의를 잃은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하던 자신들을 말리는 연화존자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다.

건강이나 챙기며 스스로를 위해 살라고 말리는 그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을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이를 낳고,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받으며, 노후를 대비하는 그런 삶.

그렇게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정확하게 폭파 버튼을 누른다.

-쾅! 콰쾅!

도로 양옆으로 묻어 놓은 크레모아가 내용물을 비산시킨다.

군에서 쓰는 물건은 아니었고, 최익현과 그의 팀이 멕시코로 넘어온 이후 재료들을 수급. 일일이 용량을 재 가며 만든 IED.

추적을 당할 염려 따위는 없으리라. 어차피 추적할 정신이 있는 놈도 없을 테지만.

“가자.”

최익현을 비롯한 팀원들이 마지막으로 복장을 점검하고 다가간다. 헬멧과 방탄조끼부터 소총을 비롯한 개인화기에 수류탄까지 모두 챙겨 크레모아로 엉망진창이 된 현장으로 다가간다.

확인 사살과 일종의 쇼를 위해.

-탕.

-타탕.

그 와중에도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력에 경이를 표하며 확실하게 죽인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는 상처였고, 설령 살 수 있다 해도 살려 둘 수 없다.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자비? 저 두려운 마교지파 살령지문의 마지막 맥을 끊어 버린 이들이 그들이다. 카르텔의 고위직으로 온갖 호사를 누린 범죄자에게 값싼 동정 따위 베풀 리 없지.

무림인의 기감으로 주변에 살아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앞뒤 차량의 호위를 받던 가운데 차량에서 비대한 시체를 끌어냈다.

생전에 뭘 그리 잘 먹고 다녔는지 두툼한 풍채를 자랑하는, 시체가 된 지금에야 살집에 불과한 그의 육신에 가져온 수류탄을 쑤셔 넣고 물러선다.

무림인의 보법이 그걸 가능케 했고, 이후 펼쳐진 건 심약자와 청소년이 보기 심히 불편한 광경.

한때 근방을 호령하던 카르텔의 군주는 산산조각 난 파편으로 화했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적 종말이 여기 한 군데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닌바.

하룻밤에 카르텔 보스가 다섯 명씩 죽어 나갔다. 어떨 땐 그 이상이었지만, 문제는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

칠익회 동유럽 팀의 솜씨란 기존에 이곳을 담당했던 남미 팀에 결코 뒤지지 않았고, 은밀성과 과단성이라는 면에선 오히려 나은 부분도 있었다.

카르텔 조직원들은 죄의 대가를 수확하러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가 있다는 도시 전설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죽어 나가는 게 보스들만 있던 건 아니었기에.

강성한 조직의 보스들이 얼추 정리되자, 다음 타깃은 부패한 공직자와 정치인들이었다. 이 경우엔 좀 더 노골적이었다. 폭탄이 터지고, 집에서 머리에 총탄이 박혀 죽고, 수영이나 낚시를 하러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이로 인한 혼란은 당연했지만, 한편으로 그리 크지 않았던 건 대체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도 좀 더 나은 자들이.

-돈 까를로 씨, 대규모 투자 유치의 성공!

대충 이런 식이었다. 유능하고 (비교적) 청렴한 인물들이 외부의 자금을 끌어오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불안을 달래는 물질적인 헌신에 기여하고, 그로 인한 인기를 바탕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대안 세력을 거듭나는 일이 남미 곳곳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반발은 있었지만, 적대의 동력은 약화되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손을 쓰고자 하는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은 연일 죽어 나가고 있고, 그 일을 실행한 카르텔은 두목들의 사망으로 혼란했으니까.

설혹 누군가 있어 새로운 질서가 되고자 하는 신진 인사들을 죽이거나, 방해하려고 할 지라도 불가사의할 정도의 조력으로 위기를 극복했으니.

그사이에 건설적인 투자는 이어졌고 남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연화존자는 친절한 설명을 잇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지.”

총탄이 난무했던 것인지, 한때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자랑했을 방 안은 온통 엉망이었다.

불에 타거나, 부숴진 것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비슷한 꼴로 기절한 채 누운 건장한 사내들이 여럿.

방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라고는, 이 모든 것의 원인인 연화존자와 의자에 손과 발은 물론이요, 입에 재갈까지 물린 동양계 남자가 전부였다.

슬슬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남자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주장하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연화존자는 대화 따위를 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아아, 그래. 뭔가를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말이야. 세상에는 굳이 말 섞을 필요가 없는 때도 있는 법이라고.”

연화존자는 난리통 속에 용케 부서지지 않은 의자를 하나 가져와 그 위의 먼지를 털고 앉는다. 대화라기엔 일방적이지만 어쨌든 할 말이 많았다.

“괜히 역겨운 인간하고 말 섞어 봐야 듣기 싫은 말이나 듣는 거 아니겠어? 너절한 개인사나 되도 않는 변명들. 예를 들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냐’라든가, 아니면 ‘무슨 오해를 하고 이러는 모양인데’라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반드시 이 일을 보복할 거고 후회하게 될 거라는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놓을 거잖아. 안 그래?”

남자, 니시모토는 연화존자의 말에 벌벌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좋았다. 눈앞의 괴물 같은 놈, 빌딩 내 모든 경호원을 일일이 무력화시키고 걸어 들어온 저 괴물 같은 작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니시모토는 그 어떤 말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미국 내에서 일본계 자금을 움직여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을 방해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뺏긴 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안 돼. 병신하고 말 섞는 게 얼마나 괴로운데.”

하지만 연화존자는 받아 줄 생각이 없다.

“내 시간은 귀하고,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건 들어야 할 게 남아 있기 때문이야. 알겠어? 기름진 혓바닥으로 되도 않는 소리 내뱉으며 있는 척, 없는 척할 생각하지 말고, 잘 듣고 대답해. 네가 생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중요한 선택이 될 테니까.”

오직 최소한의 설명만을 한다.

“우리는 남미의 여러 국가를 원조할 생각이야. 미 대통령과도 합의한 상황이지. 이유는 단순해. 마약을 매개로 그려지는 수요 공급 그래프에서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은 모두 건드리자는 거고, 공급을 우선 줄이기로 한 거지.”

이 부분에서 연화존자는 윙크하며 말했다.

“마약 생산국의 경제와 치안이 올라가면 생산량이 줄 거라고 보고 있어. 아, 그래. 이 개같은 약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겠지만, 그거는 급진적으로 어쩔 수 없는 거라 이쪽부터 접근하는 거야. 알겠어?”

니시모토는 연화존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극한의 공포. 일이 실패했으니 자신의 인생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걱정과 함께 코앞에 실존하는 무력에 오금이 풀려 온몸이 흐물흐물하다.

“고로 우리는 돈이 필요해. 내가 거렁뱅이는 아니지만 국가 단위로 움직이기에는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란 말이지. 오, 그런데 마침 우리를 괴롭히던 나쁜 놈들이 아주 부자네?”

“읍! 으읍! 읍!”

니시모토는 연화존자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고개짓의 방향을 바꾼다.

필사적으로 가로젓는 니시모토의 절박한 얼굴을 보며 연화존자는 배시시 웃는다.

“그래도 말귀는 빠르군. 맞아. 난 네놈들의 돈을 원해.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너희 우익 놈들의 돈으로 남의 나라를 도울 걸 생각하면 짜릿해서 이불을 차며 아침에 일어날 지경이지. 이 심정을, 조금 이해하겠어?”

니시모토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외치고 싶다. 복잡한 지배 구조와 아무도 믿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법적 책임은 그런 식의 유입을 불가능하게 하니,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거라며.

그리고 바로 그것이 연화존자가 궁금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니시모토 씨.”

“허억, 허어억. 허억.”

“미국 내 일본 우익들의 금고지기이자 삼십 년이 넘게 그 자금을 굴려 온 창고지기인 당신에게 답을 구해야겠어. 소유주들도 파악이 안 된 그 거대한 자금을 굴리는 남자라면 어떻게든 답을 찾아낼 거라고 생각해.”

막힌 입이 열렸을 때 니시모토가 말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을 노려보는 연화존자의 살기 어린 웃음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리라.

미국 본토에서 암약하던 우익들의 자금이 움직인 건 그로부터 두 달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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