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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21화 (121/175)

121화

해가 진 지 오래이건만, 도쿄의 밤거리는 불야성을 이룬 채 어둠을 무찌르기 바쁘다.

저 꺼지지 않는 빌딩과 길 위의 불빛은 비자발적 근면함과 성실함의 상징인 것일까, 아니면 한낮의 시름을 어둠 속에 묻고자 하는 인간들의 몸부림인가 생각하던 연화존자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이 모든 생각은 저걸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거늘.

거기에 몸부림이라면 그의 발치에 누워 벌레처럼 꿈틀대는 것들이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너희들의 어르신이 어딨는데?”

연화존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일본어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은 채 신음 소리만 가득한 어느 폐공장.

그가 여기까지 다다른 건 참으로 무림인다운 이유였다.

“내 참, 네놈들의 어르신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이렇게 입들이 무거우시나?”

연화존자는 그를 건드린 자에게, 이 나라에 경고를 하기 위해 왔다.

면밀한 조사 끝에 내려진 결론이 그랬다. 저쪽의 수작에 끌려다닐 수 없다는 사실. 당하고 있어서는 실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좋지 못하는 결론을 그는 내렸다.

마침 언급이 있던 사이이기도 하지 않나?

“아주 일본의 위아래까지 손이 안 미치는 곳이 없는 분이셨네. 외국에 나가 있는 대사관도 마음대로 움직일 정도면. 거물이라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내 미처 몰랐어.”

연화존자는 미국에서 청해마도를 방해한 자들을 역추적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미국 내 아시안계라면 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분명 본토에서 손을 뻗어 온 자라고 그는 예상했다.

실제로 자금의 이동만 보더라도 그러함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얼마 전, 미국 내에서 일본계 기업 및 단체들의 자금을 관리하던 금고지기를 잡아온 건 그러한 활동의 일환.

물론 최대한 ‘합법’적으로 그들의 자금을 빼앗아 필요한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다시는 이따위 짓거리를 벌일 수 없도록 엄포를 놓기 위함이었고, 연화존자는 이를 위해 살계를 열 생각조차 하는 중이었다.

‘이런 꼴까지 당했는데, 참을 필요가 있나?’

항상 법의 테두리, 사회 밝은 곳의 상식선에서 움직이고자 했던 연화존자였지만, 그 또한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무림의 정점에 선 남자.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일본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디야?”

연화존자는 국가무공원과 기타 자신이 아는 인맥들을 총동원하여 그 어르신이라는 자와 그가 다루는 자들의 세력을 조사했다. 그리고는 폭력, 압도적인 폭력이 아니고서는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훑고 있다.

“너희 어르신이 계신 곳이?”

물론 그는 그 어르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어르신의 집안이 아주아주 유서 깊은 집안이며, 21세기의 다이묘나 다름없는 지위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연화존자는 익히 알게 되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은 정재계를 가리지 않아 원하고자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포괄적인 사실부터 어르신의 ‘부인’으로 지칭되는 여자가 세 명, 첩으로 지칭되는 여자가 넷이었다는 개인적인 사실까지, 연화존자는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 속했음에도 칠익회의 눈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런 그들이 그들의 수장에게 오만했던 자를 찾으니 못 찾을 것이 없던바.

그런 그이기에 어르신의 행방과 정체 역시 아는 연화존자였지만, 그럼에도 질문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누, 누구냐…….”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누가 자신을 공격하는지 쉬운 답안지를 주지 않기 위해, 상하이 사태를 위해 중국 본토로 넘어갔을 때와 비슷하게 미국을 떠날 때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것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상하이에 남은 자들이 떠오른다.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번 일을 끝마치고 그 자신도 다시 넘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연화존자. 그의 침묵과 얼굴을 바꾼 그 모습이 망설임이라고 추정한 것인지, 연화존자의 발에 밟힌 이가 다시금 꿈틀대며 소리친다.

“이, 이제라도 그만둬. 감히 그분을 건드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귓등으로 흘린다.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는 지금 중국에서 했던 것과 하고 있는 것에 버금가는 일들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음인데.

뭐, 그래 봐야 마음의 준비지만.

“어, 완전.”

여기까지 말한 연화존자는 잡고 있던 자의 목을 돌렸다.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똑같이 만들었다. 하지만 개중 두어 명 정도는 적절한 의학적 조치가 취해지면 살 수 있을 정도로만 힘을 주는 데 그치는 걸 잊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이 세상에 전해지려면 목격자가 필요하다.

여기에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다. 미국에서 헤엄쳐 빠져나온 뒤, 태평양 위에서 미리 수배해 놓은 배를 여러 번 거친 후 일본에 상륙하여 가장 먼저 이들을 처리하러 온 건 그가 분쇄할 적 중 이들이 가장 말단이자 쓰레기이기 때문이었다.

말하기도 지겨울 정도로 세상에 널리고 널린 인간의 언저리, 인간성의 부스러기들.

사람에 대한 도리 같은 걸 전혀 지키지 않는 말종들에게 연화존자는 자비를 베풀 줄 모르지 않던가? 그럴 때 쓸 관대함은 전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고로 이런 식의 죽음이 연화존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비일 것이다. 좀 더 잔인하게, 길고 큰 고통으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공포에 떨 일반인들을 생각하며 최대한 손속을 자제한 것이다.

뭐, 당연하게도 현장을 발견한 일본 사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젯밤, 도쿄 시내에 있던 용역업체 십여 곳의 직원들이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살해 동기는커녕 살해의 방법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언론은 연일 참담한 일이라고, 공권력이 무너진 사회의 일상이라고 떠들어 대며 흉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과 범행의 잔인함만을 부각했지만, 그 안에 숨은 이유만은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가령 한밤의 참사를 당한 용역업체가 실은 불법적인 대부업 등의 별로 착하지 못한 일을 주로 하던 회사라는 사실과 죽은 자가 대부분이긴 해도 개중 살아남은 자들이 몇 있다는 팩트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살아남은 자들이 말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이 어르신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 같은 것이 활자나 영상으로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이 닿아야 할 이들에게는 비상사태나 다름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는 일본의 총리 앞에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도쿄도 경시총감은 자신이 생각해도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주워 담는다.

“그… 현재 전력을 다해 추적 중에 있으니 곧 흉수와 그 배후를 밝힐 수 있을 거라고 기대…….”

“기대? 기대?”

총리는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한다.

“이거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인 거야? 엉!”

“죄송합니다!”

경시총감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이지만, 그런다고 하늘 끝까지 치솟을 기세의 분노가 사그라들 리 없다.

무려 ‘어르신’과 그 주변을 캐려는 자가 나타난 일 아닌가?

“그깟 기대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어르신을 찾는 그놈이 누구인지, 불측하게도 뭘 노리는 건지, 어디로 갔고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세세히 파악해도 모자랄 판국에 기대하고 있다니? 대체 그놈의 머리라는 걸 생각을 위해 달고 있는 게 맞기는 한가?”

경시총감은 허리를 숙인 채 공포에 질린다. 그것은 총리의 협박이 결코 과장이 아닌 진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만약 이 일로 어르신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했다간 일본 사회에선 발도 못 붙이고 살 각오를 해야 할 판국인데?

이게 비단 그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란 것도 잘 안다. 지금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총리라고 다를 것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흉수를 잡아야 했다. 반드시, 기필코.

그렇지만 흉수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조차 힘들었던 건 생존자들의 증언과 시신에 남은 흔적, 일부 살아남은 CCTV가 보여 주는 모순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은 얼굴을 가린 흉수에 대해 각기 다른 증언을 했다.

누구는 말랐다고 했고, 누구는 비대하다고 했으며 또 누구는 키가 크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는 키가 가슴 어림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고 증언하는 등.

그래, 여기까지야 흉수가 신경 등에 적용하는 물질 등을 살포하거나 했다면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신에 남은 객관적인 증거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했다.

죽은 자들의 사망 추적 시간이 다들 엇비슷한 것은 흉수가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대한 도시인 도쿄의 동쪽과 남쪽의 시신이 죽은 시각의 차이가 이토록 근소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 전부 맨손으로 상대해 죽이기까지 했다. 이는 살해 현장이 아닌 흉수가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찍은 CCTV로도 어느 정도 증명된다.

자리를 이탈하는 그의 모습에서 두 손 외의 다른 것은 찾지 못했으니.

이에 일본의 공권력은 현재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내공 사용자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선다.

“이거 놔! 내가 뭘 했다고?”

“의심을 벗고 싶으면 수사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도록 해! 그게 내공 사용자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알겠어?”

반인권적인 강제적인 조치가 연일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이 사실이 정부에 알려진 이들이라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조리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예컨대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는 이는 몇 없었다. 집안에 높은 사람이 있거나, 당사자가 권력이 있는 게 아닌 경우라면 억지로 끌려가 공격적인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불법적인 소지가 다분한 일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이에 대한 조사를 거부할 수 있냐는 주변의 압박에 대부분 잠시 굴욕을 참는 정도로 끝나는 분위기였다.

조사 도중 무고한 내공 사용자가 죽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끝났을 거였다.

일본 정부가 생활 스포츠 용도로 보급한, 실은 재능 있는 무림인을 가려내기 위해 간단한 토납법을 곁들여 보급한 본류 아이키도의 수련자이자, 현직 회계사로 일하는 중이었던 32살 타츠야는 근무 중 경찰에게 강제적으로 끌려간 지 삼 일 만에 죽어서 돌아왔다.

경찰은 그가 수사 중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최선의 조치를 취했지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이는 경찰의 강압 수사로 인한 사망이 결단코 아니며 부검 등을 통해 사망 원인을 면밀히 살필 거라고, 이유를 막론하고 불운한 일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세상을 뜬 것에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며 발표를 마쳤다.

당연히 이딴 말로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츠야를 살려 내라!

-누구도 경찰 조사 중에 죽어서는 안 된다!

시위가 일어났고, 그보다 더 맹렬하게 여론이 불탔다.

경찰을 규탄하고, 공권력을 비판했다.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냐고, 죽은 타츠야가 익힌 건 효과가 미미한, 그것도 정부에서 보급한 무도류가 아니었냐며 시민들은 노여워했다.

잘생긴 타츠야의 얼굴과 울다가 기절한 그의 홀어머니의 모습이 유출되며 분노는 기름이 부어진 것처럼 격하게 타올랐다.

“…이런 일을 이용하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본에 마련한 모처에서 방송을 보던 연화존자는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일어난 예상치 못한 시위에 당황스러웠지만, 어찌 되었건 현 사태가 기회인 건 분명했다.

“죽은 타츠야의 복수를 우리가 해 주자고.”

“…알겠습니다.”

연화존자와 같은 방식으로 밀입국한 칠익회 인원들이 이에 대답하며 계획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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